누린 것, 그대로를 후배들도 누리게 하라.
방송 카메라기자협회의 주춧돌을 쌓으신 원로 선배들이 새로 생길 종편의 자문 역할을 맡았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내심 반가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종편과 함께 수많은 카메라 기자들이 생겨날 것인데 그 처우와 지위를 챙겨줄 든든한 선배들이 생겼다는 소식에 그 반가움은 더욱 컸다. 게다가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뒤 소위 사회적 지위까지 얻은 존경할만한 선배들이었기에 은근한 자부심과 기대감마저 들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심상치 않은 소문이 들려왔다. 그저 와전된 ‘소문’이라 생각하며 ‘설마’를 곱씹었건만 ‘자문’ 내용의 실체가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되면서 협회원 모두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며칠 전 협회 집행부가 논란의 당사자 중 한 명인 한 원로 선배를 만나 해명을 듣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해명 내용의 골자는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되는데 그 일성은 이 모든 논란의 출발점이 카메라기자 후배들을 위하고자 하는 본인들의 ‘진정성’이 잘못 전달되었다는 것이다. 원로선배들이 후배들을 위하겠다는 진정성을 굳이 의심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 진정성의 진위여부를 떠나 해명의 내용과 지금까지 드러난 객관적 사실이 우리에게 미칠 파장이 너무 크기에 해명 내용을 조목 조목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카메라기자 조직을 종편 조직 안에 둘 것을 최우선적으로 요구했다는 부분이다.
고마운 말일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 손바닥이 따로 없다. 이 말을 들은 종편 사주 입장이 한번 돼보자. 카메라기자 외부 파견이라는 옵션이 버젓이 보이는데다 그것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 명확해 보이는 당사자들이 제안한 ‘내부 조직 제안’이라는 것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정말 후배들을 위했다면 한손에 든 또 다른 옵션, 즉 카메라기자 외부 파견이라는 옵션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말았어야 했다.
둘째, 위의 제안이 이루어 지지 않아 부득이하게 외부에 둘 경우 ‘파견’이 아닌 ‘도급’ 형태로 가겠다는 주장이다. 파견직은 설명할 것도 없이 이른바 ‘비정규직’이다. 그에 비해 ‘도급’은 회사의 책임성이 커 처우와 고용안정성의 자율성도 크다는 주장일 것이다. 그러나 도급이라 할지라도 직접고용이 아닌 이상 모기업인 종편이 계약을 해지하면 그만이다. 이른바 ‘저널리스트’로써 카메라기자에게 고용의 안정성은 비단 근로조건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바로 ‘기자’의 자존심에 관한 문제이다. 어찌 보면 급여의 많고 적음보다 더 중요한 사항이다. 그런데 소위 ‘도급회사‘가 모기업인 종편과의 계약과 무관하게 이들의 고용, 더 나아가서는 기자로써의 자존심을 보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낙관이다.
셋째, 3년이 지나면 외부에 둔 카메라기자 조직을 종편 안으로 편입시키라고 권고했다는 부분이다. 이건 더 어처구니가 없다. 세상에 어떤 사주가 3년 동안 별 탈 없이 굴러가는 도급회사를 조직 안으로 들이겠는가? 이 제안의 진정성과 선의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현실성 없는 ‘선의’는 ‘악의’의 과대포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당장 굶어죽을 거지에게 정작 동냥은 하지 않으면서 열심히 노력하면 몇 년 후에 부자가 될 것 이란 말만 늘어 놓는다면 이런 ‘선량한 말’은 거지에게 상한 밥을 던져주는 것보다 못하다.
‘이런 시도를 우리가 하지 않아도 다른 누군가는 하게 될 것’이라고 반문할 수 있다. 맞는 말이다. 작금의 ‘방송 판’에서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분노하고 허탈해하는 이유의 요체는 이런 ‘볼썽사나운 시도’를 카메라기자 출신 원로선배들이 굳이 해야 하는지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돈 때문도 명예 때문도 아니라고 한다. 그럼,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진정 미래의 후배 카메라기자들을 위한 충정 때문이라면 그것을 증명하는 길은 간단하다. 본인들이 카메라 기자로써 누렸던 모든 것, 그대로를 후배들도 누리게 하려는 노력!
그 ‘노력’이 ‘선의’와 ‘해명’보다 먼저여야 했다.
방송 카메라기자협회의 주춧돌을 쌓으신 원로 선배들이 새로 생길 종편의 자문 역할을 맡았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내심 반가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종편과 함께 수많은 카메라 기자들이 생겨날 것인데 그 처우와 지위를 챙겨줄 든든한 선배들이 생겼다는 소식에 그 반가움은 더욱 컸다. 게다가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뒤 소위 사회적 지위까지 얻은 존경할만한 선배들이었기에 은근한 자부심과 기대감마저 들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심상치 않은 소문이 들려왔다. 그저 와전된 ‘소문’이라 생각하며 ‘설마’를 곱씹었건만 ‘자문’ 내용의 실체가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되면서 협회원 모두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며칠 전 협회 집행부가 논란의 당사자 중 한 명인 한 원로 선배를 만나 해명을 듣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해명 내용의 골자는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되는데 그 일성은 이 모든 논란의 출발점이 카메라기자 후배들을 위하고자 하는 본인들의 ‘진정성’이 잘못 전달되었다는 것이다. 원로선배들이 후배들을 위하겠다는 진정성을 굳이 의심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 진정성의 진위여부를 떠나 해명의 내용과 지금까지 드러난 객관적 사실이 우리에게 미칠 파장이 너무 크기에 해명 내용을 조목 조목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카메라기자 조직을 종편 조직 안에 둘 것을 최우선적으로 요구했다는 부분이다.
고마운 말일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 손바닥이 따로 없다. 이 말을 들은 종편 사주 입장이 한번 돼보자. 카메라기자 외부 파견이라는 옵션이 버젓이 보이는데다 그것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 명확해 보이는 당사자들이 제안한 ‘내부 조직 제안’이라는 것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정말 후배들을 위했다면 한손에 든 또 다른 옵션, 즉 카메라기자 외부 파견이라는 옵션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말았어야 했다.
둘째, 위의 제안이 이루어 지지 않아 부득이하게 외부에 둘 경우 ‘파견’이 아닌 ‘도급’ 형태로 가겠다는 주장이다. 파견직은 설명할 것도 없이 이른바 ‘비정규직’이다. 그에 비해 ‘도급’은 회사의 책임성이 커 처우와 고용안정성의 자율성도 크다는 주장일 것이다. 그러나 도급이라 할지라도 직접고용이 아닌 이상 모기업인 종편이 계약을 해지하면 그만이다. 이른바 ‘저널리스트’로써 카메라기자에게 고용의 안정성은 비단 근로조건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바로 ‘기자’의 자존심에 관한 문제이다. 어찌 보면 급여의 많고 적음보다 더 중요한 사항이다. 그런데 소위 ‘도급회사‘가 모기업인 종편과의 계약과 무관하게 이들의 고용, 더 나아가서는 기자로써의 자존심을 보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낙관이다.
셋째, 3년이 지나면 외부에 둔 카메라기자 조직을 종편 안으로 편입시키라고 권고했다는 부분이다. 이건 더 어처구니가 없다. 세상에 어떤 사주가 3년 동안 별 탈 없이 굴러가는 도급회사를 조직 안으로 들이겠는가? 이 제안의 진정성과 선의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현실성 없는 ‘선의’는 ‘악의’의 과대포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당장 굶어죽을 거지에게 정작 동냥은 하지 않으면서 열심히 노력하면 몇 년 후에 부자가 될 것 이란 말만 늘어 놓는다면 이런 ‘선량한 말’은 거지에게 상한 밥을 던져주는 것보다 못하다.
‘이런 시도를 우리가 하지 않아도 다른 누군가는 하게 될 것’이라고 반문할 수 있다. 맞는 말이다. 작금의 ‘방송 판’에서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분노하고 허탈해하는 이유의 요체는 이런 ‘볼썽사나운 시도’를 카메라기자 출신 원로선배들이 굳이 해야 하는지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돈 때문도 명예 때문도 아니라고 한다. 그럼,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진정 미래의 후배 카메라기자들을 위한 충정 때문이라면 그것을 증명하는 길은 간단하다. 본인들이 카메라 기자로써 누렸던 모든 것, 그대로를 후배들도 누리게 하려는 노력!
그 ‘노력’이 ‘선의’와 ‘해명’보다 먼저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