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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직업 폴리널리스트
관대한 주인에 예속된 노예는 일정한 자유를 부여받고 스스로 자유인이라 느끼며 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혹독한 주인에 예속된 노예는 참혹한 환경에서 스스로 인간이 누려야 할 자유를 모르면서 주인의 관용만으로 여생을 보내야 한다.
해묵은 노예이론을 들고나온 이유는 스스로 종노릇하며, 권한을 대리하는 마름(지주를 대신하여 소작농을 관리하는 자)에 충성하는 사람이 다시 주목받고 있기 때문이다.
‘폴리널리스트(polinalist)’, “정치(politics)와 언론인(journalist)이 결합한 신용어로, 중립적인 자세를 버리고 정ㆍ관계에 진출한 언론인”을 말한다. “그들은 정치권에 진출하기 위해 언론인으로서의 경력을 팔아넘기는 정ㆍ언 유착의 상징적 표본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또, 언론인 또는 전직언론인으로서 언론사 내 주요 보직을 맡으면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사람이 되겠다.
현직기자로서 정당에 가입하는 것은 1993년 정당법 개정으로 가능해졌다. 하지만 언론인의 정치활동에 관해서 헌재는 “정치적 중립성이 요구되지 않고, 정당가입이 허용되는 언론인에게 언론매체를 이용하지 않고, 업무 외적으로 개인적인 판단에 따라 선거운동을 하는 것까지 금지할 필요가 없다”고 함으로써 소속된 언론매체 내에서의 정치 활동을 제한하고 있다.
언론사 주요직책에 합당한 유능한 인사이고, 언론사 내부의 공정방송 보도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다면, 폴리널리스트의 언론사 내부 기용이 불가능한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시작된 엽관제(獵官制)를 표방하고 있는 한국에서 정치권력에 줄을 대는데 우선 목표를 가진 사람이 방송의 근간인 공정방송을 지켜낼 리 난무하고, 이는 곧 언론사의 존립기반을 흔들 수 있다.
다가올 대선에서 각 당의 대통령 후보들은 과거와는 달리 언론정책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정책이 없다. 그런 후보들을 찾아 이런저런 언론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여러 단체가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과거 그것에 동조했던 사람을 솎아내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잘못된 정책과 인사는 바로잡아야 한다. 그러나 다음 정권에서도 보은 인사와 정치성향에 따라서 사장과 보도국장, 부장이 임명된다면 악순환의 고리는 끊을 수 없다. 스스로 노예의 길을 선택하는 폴리널리스트가 존재하는 한 그다음 정권에서 우리는 또 잃어버린 몇 년을 계산하게 될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언론의 주인은 국민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언론 문제에 대한 이상적인 해답은 시청자인 국민에게 물어야 한다. 그러나 주인인 국민에게 문제 해결을 기대는 것이 이제는 어려워 보인다. 그 징표는 추락하는 시청률 표에 명확히 나타나고 있다. 다음에 기댈 곳은 언론사 내부의 공정방송 시스템이 될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