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광주 우리의 광주’ 취재를 마치고

by TVNEWS posted Jul 21,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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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광주 우리의 광주취재를 마치고


5.18은 왜 발생했을까.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고 전두환 신군부가 집권을 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도 발포 명령자가 밝혀지지 않은 현실 속에서 광주MBC1980518일부터 시작해 10일간의 항쟁이 어떻게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적 사건이 될 수 있었는지를 추적했다. 5.18을 알리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전국의 젊은이들이 그 답이었다.

2016년 광주 5.18 36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그들의 광주 우리의 광주는 그들의 삶과 죽음을 조명한 프로그램이다.


광주 1.jpg



경북 영주 출신의 서강대 학생이었던 김의기 씨는 5.18이 끝난 지 사흘 만인 530일 서울기독회관 6층에서 광주학살을 알리는 전단지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뿌리면서 몸을 바쳤다

또 부산이 고향인 22살의 노동자 김종태 씨는 광주시민과 학생들의 의로운 넋을 위로하며라는 전단지를 뿌리고 이화여대 앞에서 몸에 휘발유를 뿌려 분신했다. 5.18이 진압된 지 불과 13일 만이었다.

그리고 이들뿐만이 아니었다. 5.18기념 1주기 추모집회가 열렸던 1981527일 서울대에서 전두환 물러가라3번 외치며 스스로 몸을 던진 김태훈 씨의 삶은 당시 서울대생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김태훈 씨가 죽은 1년 후, 5.18기념 2주기 추모집회를 계획했던 서울대생 4명이 붙잡혀 옥고를 치르고 나온 후, 젊은 청년들의 삶은 처절하게 되었다. 4명 중 3명이 정신질환이 되었다. 그 중 두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지만 이들의 희생은 그 어떤 기록에서도 찾을 수 없다. 당연히 광주시민들도 그들의 이름을 몰랐다.

충북 청주 출신의 장이기 씨의 삶과 죽음도 마찬가지였다. 198635일 경기도 안양시 박달예비군 훈련장에서 전두환 찬양 시국 훈화를 듣다가 광주시민 학살한 전두환을 처단하자라고 외쳤던 장이기 씨. 그는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수사와 재판 한 번 받아보지 못하고 고문을 당해 열흘 만에 숨졌다.

그리고 이외에 사람들이 광주학살 진상 규명을 외치며 스스로 희생한 이들도 있다. 19805.18이 진압된 이후 19876월 항쟁이 있기 전까지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취재 과정은 정말 어려웠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사람을 무엇 때문에 왔느냐며 인터뷰를 거절하는 유족들. 그리고 다시 끊임없이 유족들을 설득했다.

사망자에 대한 기록도 부실했다. 김종태 열사의 경우 분신 장소에 대한 기록이 정확하지 않아 취재를 세 번이나 했다. 그러나 그들의 희생을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은 1시간짜리 다큐멘터리와 3~4분짜리 뉴스 리포트 10꼭지를 보도함으로써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고 광주가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렸을 때 마음이 뿌듯했다.

올해 5.18 37주년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기념사를 통해 광주를 알리다가 희생된 열사들도 함께 기리고 싶다며 박래전, 표정두 열사의 이름을 호명했을 때 그 감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동안의 고생이 보상받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방송기자연합회가 수여하는 제93회 이달의 방송기자상과 5.18 기념재단이 시상하는 5.18 언론상, 그리고 전 세계 다큐멘터리 감독들과 경쟁한 미국 휴스턴국제영화제 국제정치부문에서 최고의 상인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다.

광주MBC는 해마다 5.18 특집을 제작하고 있다. 이것은 19805월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던 잘못을 광주시민들에게 갚는 길이기도 하다. 그것은 앞으로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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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범 부국장/ 광주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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