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뉴스 역사의 산 증인으로서 후배들에게 우리나라 초기 뉴스취재현장은 어떠했는지 직접 전해주고 싶다는 정인걸 국장
한국 보도영상史의 산 증인
시대가 변해도 매순간 한 컷에 올인하는 ‘카메라 기자정신’은 지켜가야 할 것
정인걸 국장 프로필
1962. 01 서울텔레비죤방송국 (現 한국방송 KBS) 입사
1973. 04 KBS 보도국 카메라취재부 차장
1977. 07 KBS 카메라취재부 부장
1984. 07 KBS 카메라취재부 총감독
1986. 12 KBS 카메라취재부 부국장
1989. 01 관리직급 승진
1990. 02 KBS 영상제작국 국장
1997. 03 정년 퇴임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1961년 말, KBS 개국과 함께 카메라기자 생활을 시작하면서 정년퇴임 하기까지 약 35년간 취재와 편집 때문에 밤샘작업과 외박이 잦은 생활을 하다 보니, 사실 가정에는 매우 소홀했습니다. 아내나 자녀들과 대화할 수 있는 시간도 별로 없었고, 그러다보니 자연히 가족들과 서먹하게 지내게 되었지요. 퇴임 직후, 이러한 공백이 가장 먼저 보여서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스스로 반성하게 되더군요. 그래서 가족들하고, 특히 아내하고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합니다. 카메라기자로 활동할 당시에는 해외취재는 참 많이 다녔지만, 가족들하고 같이 여행갈 기회는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퇴임 직후에는 2~3년 동안 부부동반으로 해외여행을 주로 다니곤 했습니다. 참 재밌는 점은 아내와 함께 관광으로 해외에 나갈 때는 같은 곳에 취재 목적으로 갔을 때와는 다른 새로운 감흥으로 여행지에서 시간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 후, 경기도 용인으로 이사 가고 나서는 용인복지회관에서 영어∙일본어 등 외국어, 컴퓨터, 스포츠 댄스 등을 배우면서 아내와 이웃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덕분에 새로운 사회생활을 하게 되었고, 주말에는 손자∙손녀들 재롱도 보면서 몸도 마음도 건강하고 더욱 젊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방송카메라기자 1세대이신데, 어떻게 카메라기자 생활을 시작하셨고 활동 당시 잊지 못할 에피소드는 어떤 것이 있으신지요?
우리나라 보도영상 취재는 1961년 12월 31일, KBS-TV가 개국하면서“KBS 뉴스촬영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뉴스촬영반은 편성제작부 산하에 있었는데, 신입사원인 저와 국내에 있는 외신사 촬영 활동을 하시다 KBS에 들어오신 세 분의 선배님, 이렇게 총 4명이 사건현장을 뛰어다녔지요. KBS(당시는 서울텔레비죤방송국)에 입사하기 전에는 공군 사진병에 복무하였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스틸 사진 을 죽 해왔었는데, 물론 무비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군 사진병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지금은 고인이 되신 유인목 실장(본부장격)이 KBS-TV가 개국하면서 제게 스카웃 제의를 해서 촬영기자로 일하게 된 것입니다.
62년 1월 입사 후, 처음으로 나간 취재는 6월 6일 현충일, 오전 10시에 명동 거리에서 시민들이 일제히 묵념을 하는 현장을 영상으로 담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저는 참 순진하게도 시민들이 모두 묵념을 할 줄 알았지요. 그런데 사이렌이 울리는 데도 거리를 걷던 사람들 아무도 묵념을 하지 않아서 저는 매우 당황스러웠습니다. 결국 그 때는 촬영을 못하고 회사로 들어왔는데, 다른 선배님들은 다 영상으로 찍어와 편집을 하고 계셨던 겁니다. 다들 어떻게 촬영을 하신건지 영상을 살펴봤더니, 시민들이 엄숙하게 묵념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담기 위해 시민 몇 명에게 부탁해서, 원 샷 혹은 투샷 등을 잡아 로우앵글로 일종의‘연출’을 하셨던 겁니다. 그때 선배님들 말씀이“보도영상은 사실을 절대로 조작하면 안 되지만, ‘선의의 조작’은 필요할 때도 있다”고 하시더군요. 저도 그 후 후배들이 찍어온 영상들 중에서‘선의의 조작’이 담긴 것들을 보면 그냥 눈감고 넘어가곤 했습니다.
또 저는 박정희 대통령이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설치 이후 대통령 취임, 그리고 1979년 서거할 때까지 대통령 내외분의 동정을 만 17년간 수행 취재했습니다. 그 시간 동안 단 한번의 NG사고도 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돌이켜보면, 촬영기자로서 제가 참 운이 좋았던 것 같단 생각이 듭니다. 당시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았는데,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아있는 일은 1966년 박 대통령 내외의 동남아 4개국 순방 취재 당시의 일입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TV수상기 보급이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시청자들의 TV뉴스에 대한 관심은 별로 크지 않았습니다. 뉴스라고 하면, 극장에서 상영되던‘대한늬우스’가 더 많은 인지도를 갖고 있었을 때입니다. 그런데 제가 66년, 박 대통령 내외의 동남아 4개국(자유중국, 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순방을 수행취재한 후 귀국과 동시에 TV역사상 처음으로 시도된 50분짜리 특집 생방송이 성공리에 방영되었습니다. 그 후 TV뉴스에 대한 관심도 매우 높아지기 시작했고, 그 이듬해에는 대통령 동남아 4개국 순방활동에 크게 이바지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습니다(1967.6)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예전에 어떤 후배가 강원도 산골에 산천어 서식과 관련하여 취재를 갔던 일이 생각납니다. 그 때 그 후배는 취재기자와 함께 촬영을 갔는데 산천어가 물에서 놀고 있는 영상을 담아 리포트 할 계획이었나 봅니다. 그런데 막상 취재를 갔더니 날이 질 때까지 놀고 있는 산천어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어 결국 허탕을 치고 하루 자고 다음날 돌아오기로 했답니다. 그런데 당시 촬영 갔던 촬영기자는 잠을 못 이루고 한밤중에 다시 카메라를 들고 나와 재촬영을 시도했다고 합니다. 낮엔 안보이던 산천어가 한밤중에 물속에서 놀고있는 물고기들을 조명을 치고 순간 포착, 결국 영상으로 그 모습을 담아냈다고 합니다. “카메라기자 정신”이란 이런 것 같습니다. 한 순간, 한 컷의 영상을 위해 잠도 못 자고, 꾸준히 현장에‘올인’하는 정신, 취재하는 그 순간과 현장성을 중요시하고, 당시의 모습을 한 치도 놓치지 않고 영상으로 기록하려는 정신, 그렇게 하여 국민의 눈과 귀가 되려는 정신. 이러한 도전정신과 책임감을 후배 카메라기자들은 꼭 잊지않고 취재에 임해주었으면 합니다.
카메라기자협회에 바라는 점은?
제가 일하던 ‘필름카메라시대’가 벌써 오래 전에 지나가고, ENG 카메라가 도입되고, 컬러방송 시대, 디지털방송, 특히 HD방송 시대로 오면서 이 엄청난 시대적 변화 앞에서 한 편으로는 그 발전적인 모습을 환영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걱정이 앞서기도 합니다. 예전의 아날로그 시대에는 모든 카메라가 수동으로 조작되고, 장비 가격도 엄청나고, 누구나 쉽게 우리 카메라기자들의 영역을 넘보기는 어려웠습니다. 오히려 오랜 훈련과 경험이 토대가 되어, 영상 한 컷 한 컷이 하나의‘예술’로 만들어내는 우리 카메라기자들의 특별한 능력은 독보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로 오면서, 누구나 갖고 다니는 소형 디지털 카메라로도 과거에 우리가 하던 영상기록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카메라기자의 역할과 그 역량이 더 작아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프로 카메라기자들에겐‘위기의 시대’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런 변화 앞에서 후배들은 이제 피사체를 단순히 찍어주는 기술자, 속칭‘찍돌이’가 되지 않도록 부지런히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널리즘 정신을 잃지 않으며, 현장 취재의 중요성을 늘 염두에 두고 끊임없이 프로정신을 개발하여 멀티플레이어가 되십시오. 카메라기자협회는 이러한 기록 매체의 급속한 변화에 앞서, 후배들이 이와 같이 성장해 가도록 재교육 등 많은 도움을 주는 사업들을 지속했으면 좋겠습니다.
대담 : 양용철 협회장
정리 : 최효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