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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VNEWS posted Apr 28,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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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주화운동의 국제네트워크와 조직적 연대


한원상 / 25·26대 한국영상기자협회장




역사는 권력 편이 아니고 정의의 편이다

부끄러움과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 역사는 미래에 더 가혹하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정의의 편에서 세계의 시민과 연대한 운동이다



한원상사진1.jpg

70~80년대 한국기독자민주동지회2003729일 서울시에 있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T·K의 필명을 밝히기 위해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 왼쪽부터 오재식(전 아시아기독교협의회 도시산업선교부 간사, 전 월드비젼 한국 총재), 이한영, 강문규(전 세계학생기독교연맹 아시아 사무총장, YMCA 전국연맹 사무총장, 전 한국기독학생총연맹 이사장), 박형규(전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 위원장, 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장, 당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박상증(전 세계기독교협의회 선교위원회 간사, 전 아시아기독교협의회 총무, 전 민주동지회 사무국장, 당시 참여연대 대표), 지명관(당시 한림대 석좌 교수), 이인하(전 재일대한기독교회 가와사키교회 목사 및 재일대한기독교회 의장, 전 일본교회협의회 의장 역임), 쇼지 츠도무(東海林勤, 전 일본기독교협의회 총간사), 폴 슈나이스(Paul Schneiss, 전 독일 동방(東方)선교회 선교사), 페리스 하비(Pharis Harver, 전 퀘이커 선교사) <사진 촬영=한원상>


해외에서 한국민주화운동의 배경

 

 1960년대의 한·일협정 비준 반대 운동, 동백림 사건,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 반대 운동 등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한 비판으로 등장했다. 해외에 있는 한국의 민주 인사들은 군사정권에 대한 위기감에 침묵을 지킬 수 없었다. 그 인식은 이미 60년대부터 시작됐지만, 구체적 행동을 계획하고 실천한 것은 70년대 이후이다.

 19714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에 공화당 박정희와 신민당 김대중이 각각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 기독교 성직자들은 선거일 며칠 전부터 투표함을 지키기 위해 성직자 선거인단이 결성되었다. 하지만 박정희 후보가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박정희는 대통령에 취임한 후 19721017일 유신헌법을 공포했다, 국회는 해산되고 정당 활동도 금지되었다. 긴급조치와 계엄령이 선포되어 군사 독재 정권하에 국내 언론은 거의 정권의 강압에 숨을 죽이고 있었다. 박정희의 3선 개헌에 의한 장기 정권에 각계각층이 저항했다. 이에 감리교 소속 김정락 목사, 수도권도시선교회 김진홍 전도사, 서울 한빛교회 이해동 목사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한국NCC)에 모여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해 11월 말 성직자들은 한국NCC에 모여 금식 기도회를 가졌다. 이것이 1970년대 들어와서 첫 비공식적인 한국 민주화운동의 시작이었다.

 국내 기독교 지도자들은 유신 체제하에서 권력으로부터 억압받는 것을 가만히 지켜 볼 수 없어 기독교인은 침묵을 깨고 행동해야 한다1973422일 남산 야외 음악당에서 열린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유신 체제를 반대하는 항의 메시지가 담긴 전단지를 배포했다(이하, 남산부활절 연합예배 사건). 남산부활절연합예배는 1947년 시작한 이후 서울에서 한국NCC와 대한기독교연합회(이하, 예총회)17년 만에 처음으로 진보와 보수가 함께한 연합예배이다.

 이 사건으로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 위원장 겸 서울 제일교회 목사 박형규(2023년 사망), 동 교회 전도사 권호경(전 한국NCC 총무, 전 기독교방송 사장), 전 신민당 조직국 제2부 차장 남상우 등, 15명이 국가내란예비음모혐의로 기소되었다. 이로써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orea Student Christian Federation, 이하 KSCF) 회원, 빈민선교 활동가, 전 신민당 당원 등이 구속되었다. 1심 판결에서 박형규와 권호경은 각각 징역 2, 남상우는 징역 16개월을 선고받았다. 남산부활절연합예배 사건은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공식적인 한국 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교회 대학생의 기도회와 가두시위가 등장하고 마침내 102일에는 서울대 문리대 학생 250여 명이 4·19기념 탑 앞에서 자유민주체제의 확립을 요구하는 시위로 번졌다. 이로써 남산 부활절 사건과 102시위 이후 대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교회의 인권운동이 조직화되기 시작하여 19744월 한국NCC 산하에 인권위원회가 신설되었다.

 당시 한국 민주화운동은 학생운동, 노동운동, 기독교운동이 중심이었다. 그중에 국제 네트워크를 조직적으로 구성해서 활동할 수 있었던 단체는 기독교밖에 없었다. 박정희 정권은 기독교만은 빨갱이라고 꼬리표를 붙일 수 없었다. 이외 다른 단체들은 조금만 움직여도 빨갱이라는 꼬리표를 붙일 수 있어 활동하는 데 한계가 이었다. 기독교는 세계를 연대하는 조직과 자금이 있어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는 지하 비밀 조직의 국제 네트워크를 조직할 수 있었다.

 

한국 민주화운동의 첫 서막을 알리는 선전포고 …‥ 한국기독자선언발표

 

 1973년 초, 한국NCC 총무 김관석(CBS방송 사장, 전 새누리신문 사장, 2002년 사망) 목사는 도쿄에 있는 아시아기독교협의회도시산업선교회(CCA-URM) 간사 오재식(전 월드비젼 한국 총재, 2013년 사망), 동경여자대학교 객원교수 지명관(전 한림대학교 석좌교수, 2022년 사망), 민중신학 연구자 김용복 목사(전 한일장신대학 초대 총장, 2022년 사망)에게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라며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 세 사람은 도쿄에서 민주화운동의 사상적 핵심을 세우고 세계교회로부터 관심과 지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한국어, 영어, 일본어 3개 외국어로 한국기독자선언’(일명 신학선언’)의 초안을 비밀리 작성했다. 동시에 이들은 2000달러를 모금해 한국NCC에 보냈다.

 도쿄, 서울을 왕복하며 만들어진 한국기독자선언은 유신헌법 체제에서 침묵을 깨는 지하선언으로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한국NCC)’ 총무 김관석 목사,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 위원장 박형규 목사, 에큐메니컬사회선교협의회 사무총장 조승혁 목사 등의 동의를 얻어 인쇄되었다. 1973520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에서 한국기독교유지교역자일동의 이름으로 한국기독자선언이 발표되었다.

 이 선언은 당시 학생과 시민, 그리고 언론까지도 침묵을 강요받는 상황에서 발표되었다. 그 기초자는 미국 프린스턴신학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후일 민중 신학자가 된 김용복 목사다.

 신학선언은 신학적인 설득력이 있어 일본 및 세계의 기독교인과 시민들을 움직였다. 이는 일제 식민지 지배에 저항했던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전통을 계승해 그리스도가 항상 곁에 있다는 것을 알고 소외된 동포들과 함께 정치적 억압에 저항하고 역사의 변혁에 관여하는 것이야말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된다는 확신이 가득 찬 메시지였다.

 이 선언은 박정희 정권의 유신 체제를 국민에 대한 반역으로 규정하고 기독자의 사회 참여는 하나님의 명령이며 국민의 요청이자 교회의 역사적 전통이다 정의했다. 한국의 민주화 투쟁이 정치적 투쟁이 아닌 기독교적 투쟁이다 주장하고 한국의 민주화 투쟁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동시에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와 연대해서 유신 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첫 서막을 알리는 선전 포고였다.

 이 선언은 1934, 나치 정권에 저항한 기독교 신학자들이 교회의 본질과 신앙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 세계 에큐메니컬(Ecumenical) 운동에서 2의 바르멘 선언(Barmen Declaration)’으로 평가될 만큼 오늘날 기독교 민주화·인권운동을 신학적으로 뒷받침하는 토대가 시작된 중요한 문서로 평가되고 있다.

 유산 체제 이후 한국 민주화운동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독재 권력을 쥔 군사정권이 야당, 노동운동, 학생운동뿐만 아니라 언론, 문학자, 종교인 등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을 엄단함으로써 유혈 사건이 자주 일어났다.

 이 상황에서 지명관, 오재식, 김용복은 한국기독자선언이 익명으로 발표되는 것은 오히려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있다며 세계교회협의회(WCC),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 미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미국NCC)의 보증을 받아 도쿄에 있는 각국 언론들에게 한국의 정치적 상황이 억압적이다고 호소했다. 선언문은 197379일에 미국의 기독교 잡지 크리스찬크리시스(Christianity and Crisis)에 게재되었다.

 이 선언은 익명으로 유포돼 국내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국 기독교의 투쟁과 신앙적 각오를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와 세계교회협의회(WCC)에서도 한국기독자의 투쟁에 큰 관심을 가졌다.

 19735월 싱가포르에서 개최된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 총회에서 한국기독자선언이 배포되었다. 한국NCC에서 파견 된 WCC선교위원회 간사 박상증(훗날 아시아기독교협의회총무) 목사는 아시아기독교협의회 총회에서 발표한 한국기독자선언WCC에 가져가서 미국, 유럽의 교회 기관과 한국에 관심 있는 인권단체에 배포해 한국 민주화에 대한 세계교회의 협력과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으로 세계교회협의회(WCC) 관계자와 미국, 독일, 호주의 선교사들은 한국의 정세와 한국기독자선언을 해외에 알리는 데 노력했다. 한국민주화운동 기독자들은 한국NCC에 이어서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 세계교회협의회(WCC)와 연대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한국민주화운동의 국제네트워크 구축

한국문제기독자긴급회의결성

 

 ‘한국기독자선언(신학선언)’은 그 행동에 대한 신학적 의미의 부여를 담고 있어 일본기독교협의회(일본NCC)한국기독자선언에 감명을 받아 한국민주화운동의 지원에 적극 나섰다.

  이전까지 일본NCC1965년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과 한국인의 배상 문제와 관련하여 한국의 기독교가 한일협정에 강하게 반대하고 저항하는 것에 충격을 받아 65, 66년에 이어 한국 교회의 교류와 사과를 위한 방문에 힘썼다. 이어서 1967년 부활절에는 일본기독교단 의장의 명의로 2차 세계대전 중 일본기독교단의 죄책 고백을 발표했다.

 이 와중에 중앙정보부(KCIA, 현 국정원)19713월 재일 동포 2세인 서승, 서준식 형제를 간첩 혐의로 체포했다. 일명 서승(徐勝) 서준식(徐俊植) 형제 학내 침투 스파이단 사건이다. 서승은 고문당하다 거짓 자백을 피하기 위해 난로를 뒤집어쓰고 분신을 시도하였고, 동생 준식은 51일간 단식 농성을 벌이다가 화상을 입었다. 이로써 서 씨 형제 간첩사건은 한일 간 외교 문제로 비화되었다.

 197388일 한국의 야당 지도자 김대중은 일본 도쿄의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서 한국 중앙정보부(KCIA)에 의해 납치되었다.

 1972년 신병 치료를 위해 일본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은 유신 체제가 선포되자 국내로 들어오는 것을 포기하고 19737월 재미동포 반체제 단체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이하, 한민통)’를 결성하는 등 해외에서 반 유신 활동을 벌여오던 중이었다.

 이 무렵 일본에서는 서군 형제를 구하는 모임’, ‘김대중 구출운동과 독재 정권에 저항하다가 옥고를 치른 시인 김지하 구명운동이 전개되면서 갑자기 이웃 나라의 상황에 대해서 관심이 높아졌다.

 일본NCC한국기독자선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고 한국의 민주화 세력과 접촉하기 위해 한국NCC와 연대가 필요했다. 일본NCC 총 간사 나카지마 마사아키(中嶋正昭, 96년 사망) 목사는 한국 내부의 구체적인 정보를 얻기 위해 한국NCC 총무 김관석 목사를 만나기 시작했다. 이것으로 양국 교회의 신뢰 관계 속에 1970년대 이후의 한국민주화운동을 지원하는 연대가 마련되었다.

 한일협정(1965)로부터 8년이 되는 1973년에 일본NCC는 비로소 일본과 한국의 시민이 불행한 상태에서 만나 군사 정권에 저항하고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는 한국의 정치인, 종교인, 문학 작가, 언론, 학생,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1974115, 일본기독교단 시나노마치교회(信濃町教会)160여명의 일본인 기독자가 모여 한국 민주화 투쟁을 지지하고 지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한국문제기독자긴급회의(이하, 긴급회의)’를 결성했다.

 ‘긴급회의실행위원은 7인으로 구성하고 긴급회의의 대표는 일본NCC 총 간사인 나카지마 마사아키 목사를 대표로 했다. 사무소는 도쿄 니시와세다(西早稲田)일본기독교회관에 있는 일본NCC 안에 두기로 했다.

 긴급회의는 한국의 민주화 투쟁을 세계에 호소하기 위한 일본 내 자발적 연대 조직이다. 이들은 서로 연대하면서 네트워크를 통해 일본에 체류하는 한국인 기독자 멤버들과 함께 한국의 정보를 세계에 발신하는 정보매체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한국기독자선언’, 뉴욕타임스에 전면 광고 게재

 

 일본 기독자들은 한국기독자선언의 행동 제안을 실천하기 위해 197455일 뉴욕타임스에 한국기독자선언을 지지하는 전면 광고를 게재했다.

 이 광고에는 일본인 기독자 5명이 실명으로 발표해 신뢰를 주었으며 광고료 모금은 즉시 모여 목표치를 넘을 정도였다.

 발표자는 교토대학 조교수 이이누마 지로(飯沼二郎, 2005년 사망), 도시샤대학 신학부 교수 다케나카 마사오(竹中正夫, 2006년 사망), 마쓰모토(松本)그리스도교회 목사 와다 다다시 (和田正, 1993년 사망), 기타시라카와(北白川, 1995년 사망) 교회 목사 오쿠다 나리타카(奥田成孝, 2007년 사망), 일본 가톨릭교회 보좌 주교(나중에 주교) 하마오 후미오(濱尾文郎, 2007년 사망)이다. 이 다섯 명이 1973‘<한국기독자선언>을 지지하는 일본위원회의 이름으로 44개의 교단과 다수의 서명을 대표해 미국 기독교인들에게 보내는 호소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이들은 우리는 일본 정부가 더 이상 한국 정부를 지지하지 않도록 요구 한다미국의 기독교인 형제자매들도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에 대한 지지와 금융 지원을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고 호소했다.

 일본의 긴급회의의 결성은 한국 민주화운동을 더욱 조직화 하였으며 국제적인 여론을 형성하는 데 큰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긴급회의활동과 일본의 조직적인 연대운동

 

 ‘긴급회의는 당시 한국 내의 계엄령과 대통령 긴급조치로 인해 민주화 투쟁의 상항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다양한 경로를 통해 극비리로 전달되는 정보를 일본 및 전 세계에 발신하는 역할을 맡았다.

  긴급회의는 한국 내에서 발생한 주요 사건과 성명서 등을 기자회견에서 발표하기도 하고 긴급회의 기관지 월간 한국통신에 한국의 상황을 일본에 알렸다. 그리고 영문판 한국 소식(Korea Communique)을 매월 정기적으로 발간하여 한국의 상황을 해외에 알렸다. 또 가톨릭과 개신교 합동으로 전국 각지에 시민 모임 등을 추진하여 한국의 군사 정권을 비판하고 민주화세력을 지지하였다.


한원상사진2.jpg

긴급회의에서 모은 기부금을 1975526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위원장 권영자에게 전달한 영수증(사진 제공= 한원상). 동아투위는 1975년 박정희 군사정권의 언론 통제와 동아일보사의 경영진에 의해 해직된 기자들이 복직과 언론의 민주화 및 자유언론을 실천하기 위해 결성한 조직이다.

 

 이로써 긴급회의는 일본 지식인들과 시민들을 조직적으로 연대하고 협력하여 한국민주화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또 긴급회의는 자체에서 모은 기부금과 일본의 시민단체 동아일보를 지원하는 모임의 쿠라츠카 히라(倉塚平, 당시 메이지대학 교수, 2011년 사망) 도쿄 대표와 이이누마 지로(飯沼二郎, 당시 교토대학 교수, 2005년 사망)교토 대표가 모은 기부금을 모아 지속적으로 한국에 보냈다.

 그리고 일한연대연락회의 사무국장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당시 도쿄대학 교수, 현 도쿄대학 명예교수), 시미즈 토시히사(清水知久, 일본여자대학 교수, 2010년 사망)와 나카노 요시오(中野好夫, 당시 도쿄대학 교수, 무당파 시민운동 대표, 1985 사망),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 일본의 소설가, 후에 노벨문학상 수상, 2023 사망), 나카야마 치나츠(中山千夏, 일본의 배우, 가수, 소설가, 당시 참의원 의원) 등 많은 일본 지식인들이 긴급회의의 중심에서 조언을 하거나 협력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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