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하면 영웅이 되는 나라
서울 구로구에 위치한 모텔에서 종업원으로 근무하고 있던 장대호(38)라는 사람이 투숙객 A씨와의 다툼 끝에 살인을 했다. 범행 동기에 대해서 그는 추호도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으면서 “반말을 했고, 숙박비 4만 원을 주지 않아 범행을 저질렀다”라고 방송사 기자들 앞에서 주장하면서 “이 사건은 흉악 범이 양아치를 죽인 사건”이라고 뻔뻔 당당하게 대꾸했다.
언론의 보도에도 법과 도덕이 따라야 한다. 여기서 법과 도덕이란 정당성을 의미한다. 이를 쉬운 말로 다시 하자면 ‘올바 른 것’ 혹은 ‘지당한 것’을 의미한다.
살인범 장대호는 고려시대 정중부를 언급하며 “고려 때 김부식의 아들이 정중부의 수염을 태운 사건이 있었는데 정중부가 잊지 않고 복수했다"라며 살인범의 살인동기를 에둘러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살인범의 살인동기를 인터뷰하고 방송하는 이 땅의 언론은 과연 제 정신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살인이란 지구상의 어느 국가에서도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극악무도한 죄이다. 어찌 그 죄에 대하여 변명이 필요하며 궤변을 대중 앞에 방송한단 말인가? 이런 살인궤변을 한 번도 아니고 반복하여 방송하는 것은 시청자의 시청권에 대한 도전이자 고인과 유족에 대한 능멸이 아닌가?
왜 국민이 그런 살인범의 누추한 변명을 여과 없이 들어야 하나? 한두 번도 아니고 시시때때로 반복하여. 그럼 강간범에게 강간의 추억(?)을 인터뷰해서 그걸 방송이라고 해도 좋단 말인가? 그 흉측한 저승사자의 혐오스런 얼굴을 클로즈업(close-up)하여 방영해야 한단 말인가? 누가 그 흉상을 보고 싶다고 했나? 저승사자가 흉악한 얼굴을 번쩍 들고 뻔뻔 당당한 어조로 고인에게 (저승에서 또 만나서 또 그렇게 하면 다시 살해하겠다고) 협박하는 모습은 꿈에 나타날까 무서웠다.
살인자가 얼굴 들고 살인동기를 인터뷰하겠다고 동의했다면 언론이 살인범의 초상권을 침해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묻고 싶은 것은 방송이 언제부터 살인범에게 그렇게 호의적이고 관대했는가? 살인범에게도 살인동기를 말하도록 ‘언론의 접근권’을 공공연히 허여하자는 게 공공의 질서를 강조하는 수사기관과 언론기관의 진정한 사명이고 임무란 말인가?
하늘에서 살인범의 그 궤변을 듣고 있을 고인의 영혼과 유족의 심정을 언론은 헤아려보기라도 했는가? 가뜩이나 억울하고 분한 유족이 그런 보도에 어떤 정신적 고통을 이기지 못해 극단적인 행동이라도 하거나 분개한 시청자가 수사기관과 언론기관을 고발하여 이른바 ‘징벌적 배상’(punitive damage)이라도 청구한다면 속이 시원할까?
그런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상습도박과 외국환거래법위반의 알려진 연예계 공인들에 대해 수사기관이 ‘포토라인’의 생략을 검토 중이라는 뉴스가 조금 전에 보도되었다.
이는 이른바 ‘초상권’에 대한 돌연변이성 신종 증후군으로서 공인의 범법행위는 국민의 알 권리의 대상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다수 시청자들을 냉소케 하고 있다.
수사 중인 사안이라서 아직 공개소환의 계획이 없다는 것까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살인범의 살인의 추억(?)을 공공연히 방영하던 언론과 수사기관이 정작 공인에게는 ‘피의사실공표’ 를 우려해서(?) 포토라인을 설치하지 않겠다는 새빠진 궤변으로서 ‘눈 가리고 아웅’하는 괴물의 엉덩이에 빨간 뿔이 달린 (?) 도깨비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굳이 ‘법의 지반이 자유의지로서 정신적인 것’이라는 헤겔의 법철학을 들추어내지 않더라도, 대한민국의 언론인들은 이런 방송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겠다는 것인지, 그렇다면 어찌 그들이 국민의 세금으로 녹을 받는 공인으로서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지 의아스럽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언론의 사명은 제4부로서 입법 사법 행정을 감시하고 견제함으로써 균형 잡힌 민주적 권리구조를 견고히 하여 모든 국민에게 그런 권익의 혜택을 부여하는 것이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기 때문이다.
류종현 / 전 부산대학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