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기자 입사 6년 차. 짧은 기간이지만 다양한 현장을 다니며 쉼없이 뉴스를 제작했다. 업무가 손에 익고 제작에 루틴이 생기면서 조금 업무가 지루해질 때쯤 선배가 제안을 하나 했다. 2부작 역사 아이템인데 한번 해보라는 것이었다. 항상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보고 싶은 꿈이 있었는데 좋은 기회가 온 것이다. 하지만 막상 시작해 보니 쉽지가 않았다. 촬영 부터 회의가 많았다. 항상 현장으로 달려가면서 로고 박힌 차 안에 앉아 그날 아이템을 이야기하고 뉴스를 제작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우선 100년도 더 넘은 사건을 영상으로 정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은 명품 쇼핑몰로 변해 버린 독립운동가의 집, 대형 호텔이 들어선 역사적 장소. 특히 독립운동가로 둔갑하고 밀정 행위를 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 현장은 역사적으로도 제대로 정리되지 않고 여전히 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선배와 상의를 많이 했다. 이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우리가 어떠한 시각을 가져야 할지, 어떤 영상 이미지, 앵글이 필요한지 등에 대해. 수많은 다큐 영상을 보고 또 수많은 아이디어 회의를 거쳤다.
우린 일본으로 날아갔다. 현장에 답이 있으리라, 하는 믿음을 갖고. 다행스럽게도 일본 특유의 치밀한 기록 문화 덕분에 당시 밀정비의 집행 내역서, 영수증, 예산 지원 요청서 등의 사료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일본 방위연구소에서 발견한 파노라마 사진 한 장. 바스락거리며 부서질 것 같은 100년 전 작성된 일본군 기밀 보고서 속에서였다. 당시 중국 상해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과 그들의 가족 등 200여 명이 한곳에 모여 촬영한 흑백 사진이다. 일본군 보고서에는 ‘상인 곽윤수 집에 걸려 있었으며, 밀정이 그의 처남을 시켜 사진을 몰래 가져오게 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일본은 독립운동가들의 얼굴을 이 사진을 통해 확인했으리라. 독립운동가에게는 그야말로 기밀 중에 기밀로 부쳐야 할 사진이었던 것이다.
원본은 없다. 하지만 100년 전 밀정이 빼돌려 일본에 준 이 낡고 빛바랜 흑백사진 그리고 또박 또박 정성들여 쓴 일본군의 보고서 등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조국을 배신한 밀정, 밀정을 활용한 일본군. 늦었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에라도 밀정에 얽힌 사실을 알릴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귀중한 자료 덕분에 영상은 수월하게 모아졌다. 삼각대도 쓰지 못하고, 형광등 불빛 만으로 촬영했지만 조명을 치고 특수 장비로 촬영한 그 어떤 문서보다 가치가 있었다.
취재팀은 일본의 정보를 토대로 중국으로 갔다. 상하이, 하얼빈을 다니며 모호한 주소 하나만 가지고 높은 빌딩들 사이에서 암흑의 역사를 어렵게 찾아다녔다. 이러한 모호성 속에서 100년 전 느낌을 찾고, 당시의 분위기를 담아내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어두운 역사. 친일보다 못한 밀정들이 숨 쉬던 곳.
나는 이것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시적인 영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캔버스에 물감을 뿌리기도 하고 파스텔 가루를 비벼 흐릿하게 칠하기도 하고. 비디오아트 작법도 차용해 영상을 그려 나갔다. 이렇게 하는 것이 의미 전달이 될지 의문을 가지면서, 그 의문을 고스란히 품고 계속 그려 나갔다. 기존의 역사 다큐멘터리와는 다른 느낌을 주고 싶었다. 물론 그 작업은 어려운 도전이었다.
옛날이야기를 재연 없이 영상으로 보여주고 표현하는 것. 지금까지도 이 고민은 계속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이정태 / K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