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안지역안보포럼 출장이 일러준 방향
▲ 아세안지역안보포럼 회의장
휴가 마지막 날, 울려오는 전화를 받았다. 나의 첫 출장을 알려오는 전화였다. 일본의 화이트 리스트 배제와 관련된 언급이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아세안지역안보포럼(ASEAN Regional Forum)” 일정. 얼마 뒤 점점 늘어나는 카톡방에, 거기 올라오는 수많은 정보까지.
태국을 향해서
첫 출장. 설렘과 두려움이 함께 몰려왔다. 출장은 7월 30일부터였지만 가기 전부터 신경 쓸 문제가 많았다. HB그림 수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강경화 장관 출국과 태국 입성을 챙길 것인지. 협회사와 비협회사 간의 POOL 문제는? 출발 전부터 결정해야 할 것이 많았다. 우여곡절 끝에 출국길에 올랐다. 공항 게이트 앞에 풀단이 모였다.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먼저 강경화 장관의 수완나품 공항 입국 커버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드디어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와 강 장관이 같은 항공편을 이용하므로 현실적으로 입국은 챙길 수가 없다. 대신 우리 입국 시간 3시간 뒤에, 고노 다로 장관이 돈므앙 공항에 입국하고 오쿠라 호텔로 향할 것이라는 정보가 있음으로 운이 따른다면 고노 장관은 커버할 수 있다. 누가 갈 것인가는 도착해서 정한다. 우선 여기까지 정리한 뒤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드디어 도착한 태국 수완나품 공항. 도착하자마자 심 카드를 샀다. 개통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테스트를 거쳤다. 다행히 무사 연결이다. 한숨 돌릴 새도 없이 곧바로 숙소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POOL 책임감
우리의 숙소인 아난타라 호텔로 가는 버스는 조용했지만 카톡방에서는 쉴 새 없이 대화가 오갔다.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 취재 때문이었다. 이미 종편은 4시 버스를 신청해 오쿠라 호텔로 갈 예정이었다. 풀단 간사였던 KBS 윤성욱 선배가 지원하실 분, 하고 운을 떼자마자 범수 선배가 손을 들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그다음엔 어떻게 오쿠라 호텔까지 갈 것인지 말이 오갔다.
“가까운 데 내려만 주시면 됩니다!”
선배는 나에게 같이 내리자는 손짓을 하고 우리 둘은 하차했다. 아마도 나 혼자였다면 ‘누군가는 하겠지’ 하고 미뤘을지 모른다.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선배가 한없이 우러러 보이는 순간이기도 했다. 역시!! 오쿠라 호텔에 도착해 호텔 입구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가 가장 먼저 도착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일본 취재진이 하나둘 모였다. 일본 취재진은 풀을 구성하지 않은 상태였다. 예닐곱 명의 일본 취재진 무리, 그 사이에 우리가 홀로 서 있는 형국이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부쩍 승부욕이 발동했다. 드디어 고노 장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찰나라 부를 만한 짧은 시간, 아무 말 없이 휙 하고 입구를 지나 호텔로 들어가 버렸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상황이 종료됐다. 선배가 촬영한 영상 안에서 고노 장관이 유유히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 첫 번째 미션은 그렇게 완벽하게 마무리되었다.
MNG 속보 경쟁
8월 1일 오전 10시 반쯤 카톡이 울렸다. YTN 박재상 선배였다. “일본이 라이브 물고 들어가는데 이게 형평성에 맞는 건가요?” 한·일 양자회담 일정이었다. 화이트 리스트 배제 이슈로 우리에게는 중요한 회담이었다. 우리는 사전에 라이브 연결을 할 수 없다는 공지를 받고 들어간 상태였다. 그런 자리에 일본 취재진이 떡하니 MNG를 어깨에 메고 라이브 연결을 하려 하고 있으니 우리로서는 그냥 넘어가기 힘들었다. 일본 취재진은 공지를 무시하고 장비를 들고 들어간 듯했다. 좁디좁은 회견장에서의 치열한 경쟁. 한일 간의 역사 악연.
“외교부 관계자를 통해 장비를 꺼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시의적절하고 의미 있는 문제 제기였다. 다행히 박재상 선배 덕분에 일본 취재진의 부도덕한 행동에 일침을 가할 수 있었다.
ARF가 남긴 것
포럼 후 두 달이 지났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ARF는 큰 성과라곤 없는 회담이었을지도 모른다. 한미일 회담이 있었으나 미국은 한일 갈등 중재를 자처하지 않았고, 일본은 화이트 리스트 배제를 철회하지 않았으며, 결국 우리나라도 지소미아를 파기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ARF는 나에게 많은 것을 남겼다. 과감히 버스에서 내린 범수 선배, 일본 취재진의 MNG 연결을 제지한 박재상 선배, 그 누구도 방관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자원하는 모습. 낯선 곳에서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해 취재하던 선배들. 앞으로 내가 영상기자로서 가야 할 방향을 일러 주는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이다.
김영진 / MB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