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정신을 더럽히는 욱일기
2019년 11월 17일 일본 도쿄돔에서 프리미어 프로 12 결승전이 열렸다. 그것도 한일전! 일본 최초의 이 돔야구장은 수용인원 4만 6천 명 규모로, 전일 슈퍼라운드 한일전에 이어 결승전이 열리는 것이었다. 당연히 매진. 시합 두 시간 전부터 관중들의 입장이 시작됐다. 사방 출입문에서 줄지어 내려오는 팬들은 마치 용암이 흘러내려 낮은 곳에 고이는 광경을 연상케 했다. 그라운드 안전망 아래까지 내려온 팬들이 좋아하는 선수들을 찾아 사진을 찍었다. 아마 그 얇은 안전망이 없었다면 이 팬들의 용암은 그라운드 밑까지 흘러 내려갔을지도 모른다.
2015년 초대 대회에서 우승한 한국은 이번 결승에서도 이변 없이 일본에게 멋진 KO를 날려야 했다. 취재진들 사이에서도 대회 2연패에 대한 열망이 끌어올랐다. 나는 이날, 중계 카메라를 대신해 결승 오프닝을 직접 촬영하는 미션을 받았다. 이승엽 해설위원 뒤로 관중이 이미 꽉 차 있었고, 이어폰 없이는 바로 옆에서 외치는 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얼마나 흥분되는 순간인가? 도쿄돔 현장에서 결승 오프닝을 직접 취재할 수 있는 기회를 갖다니!
여담 하나. 중계 주관사인 SBS의 ENG 포지션은 3루수 쪽 중계카메라 옆자리였다. (오른손 타자가 나올 때 뒤편에 있는 내 모습이 포커스 아웃으로 중계 화면에 보였노라고 귀국 후에 선후배들에게 얘기를 들었다.) 당시 나는 현장에서 내 모습이 중계 화면에 잡힐 수 있다는 건 안중에도 없었다. 파울볼이 운 좋게 날아와 프리미어 12 문구가 박힌 공을 하나 받았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통상 일본의 응원 문화는 한국 못지않게 시끄럽고 열정적이다. 그날 역시 외야수에 밀집된 응원군은 대형 깃발과 북을 이용해 일괄적으로 “NIPPON” 구호와 함성을 지르며 일어났다 앉았다 하며 열띤 응원전을 펼쳤다. 응원 규모, 열기 면에서 일본 쪽은 압도적이었다. 1회 초 김하성, 김현수 선수가 홈런을 쳤을 때 잠시의 정적이 흐른 것을 제외하면 일본의 응원 구호는 경기가 끝날 때까지 도쿄돔을 들었다 놨다 하기에 충분했다.
내가 자리 잡은 3루 쪽 위치에서는 외야 관중을 정면으로 볼 수 있었다. 카메라 익스트림 줌을 이용해 그들의 표정까지 담을 수 있는 위치였다. 전날 슈퍼라운드 마지막 한일전에서 욱일기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일본 관중이 잡혔고 KBO는 주최 측인 세계 야구 소프트볼 총 연맹(WBSC)에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WBSC는 욱일기 영상이 나가지 않도록 중계 방송사와 협의하겠다는 소극적 태도를 보였을 뿐이다. 결승전 시작 전 욱일기 관련 검사와 같은 대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연히 취재진들은 KBO가 WBSC에 문제 제기를 한 지 하루 만에 또다시 욱일기가 나타나지는 않을지 예의 주시했다.
내가 SBS “영상토크”에 올렸듯이 3회 초반 외야 뒤편 출입구 1번 기둥에서 욱일기를 망토처럼 두른 노인을 발견하게 되었다. 앞모습은 일반 옷차림으로 평범해 보였으나, 뒤를 돌 때마다 대형 욱일기가 카메라에 잡혔다. 본인도 떳떳하지 않은지 지정된 응원석이 아닌 계단 뒷줄에서 마스크를 쓴 채 출입문을 들락거리며 응원을 하고 있었다. 경기가 끝난 후에는 입고 있던 망토를 벗어 들고 흔들다 결국 경찰의 제지로 퇴장을 당했다. 시상식이 이뤄지는 마지막까지 그 노인은 욱일기로 무슨 메시지를 주려 했던 것일까.
도쿄돔 입구 안내판에는 응원 깃발 및 현수막은 특정 국가나 지역을 비방하는 내용, 어떤 정치적·종교적 내용도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게다가 욱일기는 우리나라를 침략한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이며 전범기다. 특히, 태평양 전쟁으로 일본이 아시아 각국을 침략할 때 육군과 해군에서 군기로 사용된 이 욱일기를 한일전이 열리는 경기장에서 망토처럼 두르고 나타난 저의가 무엇인가? 더욱이 내년 자국에서 열리는 도쿄올림픽에서도 욱일기를 제한하지 않겠다고 말한 일본 외무성은 ‘욱일기는 일본 문화의 일부이고 국제적으로 폭 넓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내가 취재한 영상의 그 욱일기 노인은 결코 떳떳하게 자기네 문화의 일부로서 응원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성숙한 응원문화라고 볼 수 없다. 일본의 한국 침략 등 전쟁 범죄를 저지른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스포츠 경기 응원에서 욱일기를 사용한다는 것은 스포츠 정신에 어긋난 행동이다. 공명정대하고 순수해야 할 국제 스포츠 이벤트가 프로파간다와 비상식적인 수사로 흠집을 입는다면 이는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에 상처를 되새기는 일이 될 뿐이다.
김흥기 / S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