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은 어디서 부터 시작됐을까?
철인 3종 최숙현 선수 사망 사건
▲ 고 최숙현 선수의 아버지 최영희 씨가 제42회 전국소년체육대회에서 수상한 최우수선수상 트로피를 두고 기자에게 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사진/최대웅>
“그 사람들 죄를 밝혀줘”
짧고도 슬픈 스물 두 해를 보낸 최숙현 선수는 마지막 바람을 메시지로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최 선수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서울에서 4시간 가까이를 차로 달려 경북 칠곡에 도착했다. 자택에서 만난 아버지 최영희 씨의 눈가는 이미 벌겋게 젖어 있었다. 그는 인터뷰에 앞서 우리 앞에 주인 없는 메달과 상장 꾸러미를 내보였다. 모두 최숙현 선수의 피와 땀, 눈물이 서린 결과물이었다. 카메라를 설치하고 마이크를 채우는 동안에도 아버지는 딸이 그간 얼마나 열심히 운동했고, 그런 모습이 자랑스러웠는지를 담담하게 말했다.
“이렇게 갈 줄 알았더라면...”
깊은 한숨을 몇 차례 내쉰 아버지는 녹취록 이야기를 꺼냈다. 폭력의 실체는 상상 이상이었다.
“이빨 깨물어, 이리 와, 뒤로 돌아”
“나한테 두 번 맞았지? 넌 매일 맞아야 해”
모두 지난해 3월 뉴질랜드 전지훈련에서 최 선수가 녹음한 파일 속 ‘팀 닥터’가 한 말이다. 이따금씩 들리는 ‘퍽, 퍽, 퍽’소리는 듣는 사람마저 눈을 질끈 감게 만들 만큼 공포스러웠다.
‘그 사람들’의 가혹행위는 33장 분량의 녹취록에 적나라하게 기록돼 있었다. 가족은 최 선수가 평소 감독과 팀 닥터, 선배의 폭력에 힘겨워하자 녹음을 권했다고 했다.
수많은 상장과 메달 사이에 최 선수가 썼다는 작은 다이어리가 눈에 띄었다. 아버지께 양해를 구하고 열어 본 일기장엔 새벽부터 늦은 오후까지 하루를 꽉 채운 훈련 내용이 빼곡했다. 2시간 넘게 수영· 사이클·마라톤을 이어하는 극한의 경기. 조금이라도 기록을 앞당긴 날엔 스스로를 다잡고 응원하는 문구도 몇 마디 적혀 있었다. 하지만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길수록 괴로운 심경이 반복적으로 적혀 있었다.
‘제발 숨 쉬게 해 줘.’
‘그만하고 싶다.’
인터뷰를 마치며 아버지는 최 선수와 같은 바람을 우리에게 전했다.
“그 사람들 죄를 밝혀서 우리 딸 억울 함을 꼭 좀 풀어 주세요.”
팀 닥터의 행방을 찾고, 경주시청팀 추가 취재를 위해 대구, 경산을 며칠간 오 갔다. 하지만 관련자들은 만날 수 없었다. 어렵사리 접촉이 돼도 사전에 말을 맞춘 듯했다. 같은 팀이었던 일부 동료들조차 감독을 두둔하며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답을 피했다. 최 선수가 죄를 밝혀달라고 언급한 ‘그 사람들’의 실체는 다이어리 밖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경주시청팀을 거쳐간 선수들은 2013년부터 따져도 고작 27명. 전국 실업팀 선수를 다 세어 봐도 철인 3종 선수는 대한민국에 100명이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작고 공 고한 세계다. 며칠 전 최 선수 동료들의 국회 회견문이 머리에 맴돌았다.
“감독과 특정 선수만의 왕국이었다.”
“그것이 운동선수들의 세상이고 사회인 줄 알았다.”
관련 단체나 기관에서도 마찬가지로 카메라 앞에 나서지 않았고, 모두 책임을 피하려 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용기를 낸 익명 제보, 종일 설득해 얻은 주변 선수들의 몇 마디 증언이 있을 뿐이었다.
지난 7월 9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스포츠 인권 전문가들이 모여 긴급 토론회를 열었다. 1년 반 전, 쇼트트랙 조재범 코치의 성폭력 사건 후 체육계의 문제점을 짚어본 바로 그 자리다. 체육계에서 폭력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숱하게 지적된 성적 제일주의, 절대복종해야만 하는 사제 관계, 선수의 미래를 담보로 진실을 덮으려는 폐쇄적 관행 등에 대해 반복적 성찰과 반성이다. 이제 아예 연례행사가 되어버린 듯이 말이다. 메달과 성적이 아닌, 선수의 인권과 행복을 우선 추구하는 근본적 변화가 절실하다.
최대웅 / S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