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8회 이달의 영상기자상 지역기획보도부문
‘“제주4ㆍ3사건”이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제주4.3사건특별법이 규정한 제주4.3사건(이하4.3)의 정의다.
4.3사건은 이렇듯 유족과 학계, 시민사회단체, 정치권 등 제주 사회가 합심해 특별법을 만들어내고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이뤄 온 제주 현대사의 비극이다. 특별법상 정의에서도 보듯 ‘무력충돌’과 ‘진압’, ‘주민들이 희생’은 4.3사건의 비극을 함축적으로 나타낸다. 제주지역 방송과 신문 등 다양한 매체도 지금껏 ‘비극’에 주목했다. 4.3사건으로 희생자 유족들과 도민들이 얼마나 고통을 겪었는지, 어떤 트라우마가 남았는지, 피해회복을 위한 노력은 어떻게 되고 있는지 등등.
뉴스멘터리 ‘땅의 기억’은 이러한 경향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고통과 아픔, 비극은 오랜 보도와 진상규명 노력을 통해 어느 정도 알려져 있으니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보고자 했다. 그래서 ‘땅의 기억“은 4.3 재산권 피해 실태와 회복노력에 초점을 맞췄다.
1948년 제주지역 계엄사령부에 의해 군경 초토화 작전이 실시됐고 마을을 떠나라는 소개령으로 제주 중산간 마을 90%가 전소됐다. 4.3사건 중에 진행 된 군경의 초토화 작전의 결과, 14년이 지난 1962년까지 전체 피해 가구의 40%인 7천여 세대, 당시 제주도 인구의 13%인 4만여 명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결국 4.3초토화 작전 과정에서 피해를 입은 마을 300곳 가운데 122곳은 잃어버린 마을이 됐다.
이렇게 잊힌 터전은 군사정권이 들어선 1960년대 특별조치법에 의해 또다시 혼란을 겪는다. 4.3사건과 한국전이 가져온 근현대사 비극으로 주인을 찾지 못한 미등기 토지 문제를 정리하기 위해 특별조치법이 시행됐지만, 이를 악용한 사건들이 적지 않게 발생했기 때문이다. 4.3사건으로 혼란스런 시기에, 생사도 모르는 이들의 인적사항을 도용해 부동산을 착취하는 일들이 발생했다, 뒤늦게 이 같은 사실을 안 4.3유족들은 조치법 피해를 규명하기 위한 소송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의 소유로 되어 있는 등기를 바꾸기 위해서는 결절적인 증거나 증언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세월이 워낙 지난 탓에 한계를 보이고 있다. 어느새 당시의 상황을 증언할 이도 점점 사라지고 있고 기억도 점점 사라져 개인 스스로 감당하기엔 벅찰 수밖에 없다.
이런 가운데 한편에서는 새로운 법적 대응 움직임도 시작되고 있다. 4.3사건 당시 군사 재판의 불법성을 70년이 지나 재심을 통해 밝혀낸 것처럼, 토지 조치법 문제와 관련한 특별 재심이 4.3 유족들이 중심되어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제주에는 전체 토지 면적의 10% 가량인 7만여 필지의 미등기 토지가 남아있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4.3 사건과 직간접으로 연관돼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치법 분쟁은 제주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고 끈끈했던 가족 공동체마저 허물고 있다. 잊혀 가는 땅의 기억 속에서 후손들은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갈등과 법의 장벽에 부딪혀 고통 받고 있다.
사람들이 살고 공동체가 살아 숨 쉬었던 땅...
제주의 비극 4.3사건으로 단절된 땅의 기억을 되찾고 규명하는 노력에 정부가 함께 나서는 것이 공동체 회복의 첫 걸음이 될 것이다.
김용민 / KCTV 제주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