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교수’ 적응기
<베테랑 영상기자에서 새내기교수로>
때는 바야흐로 다니던 회사의 명퇴 신청이 막 마감됐고 최악의 대학 신입생 충원율을 기록하게 될 2021년 봄, 나는 이직을 했다.
장면 #1
“학교 홍보차 나왔습니다. 3학년 주임 선생님과는 통화했습니다.” “이건 학교 홍보 책자고요.” / “저기다 놓고 가요.” 경비원은 말을 끊었다. “먹고 사는 게 참 힘들어.” 그의 혼잣말이 등에 꽂혀 따라왔다. 얼마 전 다친 발목은 더욱 욱신거렸다. ‘그렇구나. 학교를 홍보할 때 절룩거리니 슬프구나.’
장면 #2
국립대 교수인 지인과 통화. “채교수, 임용 축하해! (중략)이 바닥에 들어왔으니 하는 말인데…. 대한민국 대부분의 교수 다 비정규직이야. 근데 쉽게 자르지는 못해.” 서로 측은했지만, 안위(安危)의 바람도 불었다. “그래? 고마워” (중략) “근데 이런 얘기 왜 미리 안 해줬어?” / “야~ 이런 말 외부인에게 어떻게 해. 교수 모양(가오) 떨어지게.” “앞으로 무시 안 당하려면 자네 몸집부터 키워!”
‘그렇구나. 교수는 다 자란 어른도 더 커져야 하는구나.’
장면 #3
야간 실습을 마친 학생들은 도심 한복판에서 후각만으로 메뉴를 전광석화처럼 찾아냈다. 다행히 무한리필집이다. 식당은 코로나 시대 첫 대통령 순방 소식에 TV 모니터가 시끌시끌하다. 몇 달 전까지 청와대 출입 기자였고 그 기자단의 간사였던 나는 지금 교수가 되어 내 앞에 앉아 있는 이 짐승처럼 굶주린 가여운 자취생들에게 아직 남아 있는 프로의 실력으로 폭탄주를 만들어 주고 있다.
“애들아! 맛이 어떠냐?” / “맛이 최곱니다!”
‘그렇구나. 폭탄주는 교수도 춤추게 하는구나.’
교수로 앞으로의 멋진 꿈이나 포부 정도를 기대했을 선후배들께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신파극’과 같은 마중의 글로 시작해 송구스럽다. 하지만 다른 조직문화에 적응하기 쉽지 않은 것이 지금의 솔직한 심정이다. 그동안 밖에서 무엇을 했든 이곳에 온 이상 나는 막내 초보 교수니까.
올해 2월 28일 OBS에서 퇴직했고 3월 1일 세종시에 있는 ‘한국영상대’ 촬영조명과 전임교수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전임교수이긴 하지만 조교수 신분이고 산학협력단 소속이다. 학교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한국영상대’는 전임교수 사이에 큰 차별을 두는 것 같지 않아 다행이다. 지난 학기에 나는 3학년들에는 ‘보도 다큐멘터리’를, 4학년들엔 ‘ENG 심화 과정’을 가르쳤다.
누구의 말처럼 사랑이나 시(詩)나 음악처럼 ‘과정’이 ‘목적’인 것들이 있다. 한 학기 동안 내 ‘연구실’은 많이 안다고 생각했던 내가 결국 아는 것이라고는 ‘나는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았던 ‘나’’라는 허위의 ‘나‘를 발견하는 성찰의 ‘실험실’이 되었다. 글 쓰다 보니 진짜 교수가 돼야 할 분들께 염치없이 미안해진다.
아무튼 반년의 몸앓이 끝에 나는 나의 시간을 살기로 다짐하게 됐다. 학교에 처음 가기로 정했을 때의 초심은 ‘폐 끼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조급히 생각하지 말고 묵묵히 해야 할 것들을 찾다 보면 오히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림이 되든 안 되든 역사의 현장에서 늘 목도되는 영상 기자들의 ‘뻗치기’처럼 말이다.
채종윤 / 한국영상대학교 교수(前OBS영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