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동기 경철아.
10년이 지났구나.
짧지 않은 시간인데 지금도 011-1710-1916으로 전화하면 네가 웃으며 받을 것 같다.
2007년 12월1일 새벽3시 무렵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데스크 벨소리는 늘 요란한 음악으로 지정해두어 몇 번 울리지 않아 받았다.
이 시간에 당장 회사로 오라는데 이유는 묻지 말라더라.
선배 말 어지간하면 다 들었던 것 같은데 그날은 그럴 수가 없더라.
이유를 알려 달라고 물었다.
그런데 제발 묻지 말고 와달라고 하더라.
갑자기 한 주 전에 꾸었던 꿈 생각이 났다.
너를 알게 된 2003년 9월부터 지금까지 너는 내 꿈에 딱 한 번 나왔다.
그 꿈에서 너는 동일한 문장을 네 번 반복해서 말했다.
처음엔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리고 점점 커져 마지막엔 소리를 질렀다.
“힘들어 죽겠다”고.
일주일 뒤 현실의 새벽.
전화기 너머로 짧은 시간에 전해진 경직된 시공간은 이렇게 털어놨다.
“경철이가 죽었어”.
회사로 차를 몰고 가는데 온몸이 부들거려 온힘을 꽉 주어 핸들을 잡아야 차가 직선으로 갈 수 있었다.
첫 비행기로 내려간 제주도.
병원 영안실엔 40여개 시신 보관 냉장고가 있었는데 너는 가장 왼쪽 아래에서 두 번째 칸에 누워있었다.
의사가 흰 천을 걷어 네 머리끝부터 쇄골 정도까지 볼 수 있었다.
무표정한 듯 보이기도 하고, 살짝 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몇 년간 본 너의 얼굴 중 가장 하얀 얼굴이었다.
평소보다 얼굴이 조금 작아보였고, 깨끗해 보였다.
어머님은 차마 못 들어오시고 아버님만 들어와서 확인하셨는데 “맞네, 맞아”하시곤 밖으로 나가셨다.
내가 기억하는 네 마지막 모습이다.
그리고 그 시간부터 네가 떠났다는 사실이 현실이 되었던 것 같다.
그 이후 장지인 경기도 광주 공원묘지에 너를 두고 올 때까지 내 기억은 불분명하다.
경찰서와 병원을 오갔고, 부검하는 방 옆에서 숨을 죽이고 크고, 작게 울었다.
김포공항으로 들어와 삼성병원으로 갔다.
누군가 너의 사진을 모아 큰 액자를 만들어 빈소 앞에 이미 두었더라.
그 웃고 있는 파란 사진들이 이 시간이 현실임을 다시 알게 해 주었다.
‘조사낭독’을 맡게 되어 빈소 옆 응접실에서 이틀을 작성했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눈물이 많은 편이긴 한데 지금까지 살면서 그날 가장 많이 울었던 것 같다.
기억하는 것부터 기억 해낼 수 있는 것들까지 너에 대한 모든 것을 그 날 생각해 내야 했다.
떠올릴수록 고맙고, 미안했다.
서럽게 춥던 날 병원에서 나와 여의도를 돌고나선 너의 새주소 ‘시안 거북69-1’로 떠났다.
너를 생각하면 십년이 길지 않은데, 네가 일하던 우리 일터를 생각하면 십년이 짧지만도 않네.
상상도 못한 많은 일들이 생겼다.
부서도 없어졌었고, 많은 동료들이 회사에서 쫓겨났었다.
지금도 중요한 일이 진행 중이다.
너는 네 일을 그리고 회사를 많이 좋아했던 것 같다.
네 많은 물건들에는 회사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카메라, 캠코더, 노트북, 헬리캠 조종기, 진주색 너의 스포츠카 기아 옵티마는 물론이었고, 비틀거리며 밤늦게 찾은 집 현관까지 붉은색 ‘MBC NEWS’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걷다가, 밥 먹다, 술 먹다가도 네 생각나지만 회사에서 무언가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꼭 생각이 난다.
그렇게 아끼던 네 일터에서 너는 어떤 결정을 했을까.
어떤 모습이었을까. 네 의견을 묻고 있었다.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해도 나 혼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지난 10년간 여러 차례의 파업 끝에 지금은 많은 것들이 순리대로 매듭지어지고 있는 것 같다.
너도 거기서 열심히 응원했지?
유달리 사람과 어울리고 즐기는 시간을 좋아했던 녀석이라 너 보낸 뒤 후배들 들어오면 데리고 인사시켜주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여태 한 번도 못 데려갔네.
그래봐야 너 떠난 지난 10년간 들어온 후배가 4명이니 언제든 승용차 한 대로 모두 태워 갈 수 있다.
곧 보자.
용현선배 후배로 왔다고 너무 장난치지 말고 옆에서 잘 지켜드려.
레쯔비 캔커피 하루 5개는 많으니 2개정도로 제한해서 드리고.
스타크래프트는 치트키에 익숙하시니 감안해서 1:1대결은 살살하고.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자면.. 미안하다. 다시 볼 때까지 잘 지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