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전쟁터는 가지 못하는 한국언론의 전쟁보도
‘우크라이나전쟁’ 현장취재 기자들 “여행금지국가 취재제한 ‘여권법’ 개정해야”
지난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 미사일 공습 뒤 지상군을 동원해 침공하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했다. 지난 2년여 간 세계적인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으로 해외취재에 소극적이었던 국내의 주요 방송사와 언론사들은 이 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대규모 취재진을 파견했다. 전쟁 초기 공중파 방송사, 뉴스전문채널, 종편방송사들은 폴란드, 루마니아, 몰도바 등 우크라이나 국경과 인접한 지역에서 전쟁을 피해 탈출하는 우크라이나 피난민들을 취재해 전쟁의 참상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하지만, 국내 방송사들의 전쟁보도는 딱 여기까지였다. 우리 방송과 언론사 취재진은 우크라이나의 국경선 안으로는 한 발짝도 들어가 보지 못한 채, 인접국가의 국경지대에서 연일 비슷한 내용의 피난민 취재와, 외신들이 우크라이나 현지에서 발신하는 전쟁보도에 의존해 뉴스를 전달해야 했다. 우크라이나 전쟁터로는 들어가지 못하니 전쟁의 긴장감을 보여주기 위해 방탄조끼와 헬멧을 쓰고, 폴란드의 국경과 거리에서 스탠드업과 라이브중계에 집중하는 국내 방송과 언론인들에 대해 시청자들은 불만과 비아냥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이렇게 방송사 취재진들이 대거 우크라이나 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현장에 달려갔음에도, 진짜 전쟁취재를 하지 못한 이유는 뭘까.
전쟁터 아닌 안전지역에서 방탄조끼 입고 전쟁분위기 연출…현장기자들, 외신에 의존해야 하는 현실에 자괴감 토로
우리나라 여권법은 전쟁이나 재난, 재해가 발생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받는 지역을 여행경보 4단계인 여행금지국가로 지정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만약 외교부의 허가 없이 이들 지역에 방문, 체류할 경우 1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하지만, 여권법의 ‘예외적 여권 사용’ 조항은 여행금지국가라도 외교부 장관의 허가를 받아 생업을 위해 해당 국가에 머물러야 하는 영주권자와 공익적 목적의 취재와 보도를 해야 하는 언론인 등에 대해서는 방문·체류를 예외적으로 허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외교부는 지난 2월 22일 전운이 감돌던 우크라이나를 여행금지 국가로 지정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국민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전 세계 언론인들이 우크라이나 현장취재에 나서는 상황에서도 외교부는 우크라이나 현지취재 요청을 허용하지 않아왔다. 그러다 국내 여론과 언론인들의 비판이 계속되자, 지난 3월 18일 언론인의 우크라이나 방문 제한을 일부 풀었다. 현지에서 취재 중인 국내방송사들의 취재진과 유럽특파원들은 이 조치를 통해 폴란드 국경지역과 가까운 우크라이나의 리비우(Lviv) 지역이나 수도인 키이우(Kyiv)로 들어가 취재할 수 있기를 기대했지만, 외교부가 입국허용한 지역은 우크라이나 전선과는 먼 서남부 체르니우치주 지역(수도 키이우 기준 약 5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우크라이나 국경 도시)였고, 취재를 위한 체류기간도 단 2박3일로 한정했다.
BBC와 CNN, NYT 등 세계 유수의 언론사들은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우리언론인들이 가장 많이 취재활동을 벌였던 폴란드 프세미실 지역과 가까운 우크라이나 서부 도시 리비우에 베이스캠프를 차린 뒤, 수도 키이우는 물론이고,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동남부 도시들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전했다. 하지만, 우리 언론의 취재지역은 전쟁터와는 한참 떨어진 곳들로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우리 방송사 취재진과 한국 언론인들은 비싼 경비를 들여 전쟁취재를 와서도, ‘진짜 전쟁터’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생생하게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 외신보도에 의존해 전쟁리포트와 기사를 현지 제작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크라이나 현장취재를 다녀온 언론인들은 외교부가 전쟁 등 위험지역에서 한국언론의 취재를 임의로 제한하고 있고, 이 때문에 국내 시청자와 독자들, 다른 나라의 언론인들에게 비난과 비웃음을 받는 상황이 생겨나고 있는데 대해 깊은 자괴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신문사나 통신사 사진기자들의 경우, 전세계 포토저널리스트들이 현장취재를 위해 우크라이나로 들어가고 있지만, 외교부의 취재제한으로 우크라이나 내로는 접근조차 할 수 없어 현장취재를 애초에 포기하는 상황도 발생하고 있다.
지난 4월 21일 저녁, 한국영상기자협회 회의실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전쟁 현장취재 언론인 간담회‘에 함께한 참석자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취재 현장에서 느낀 문제점들을 토로하며 우리 언론인들의 전쟁·위험지역 취재를 제한하는 현재의 여권법과 외교부의 제한적 취재허용조치가 헌법이 보장한 언론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국제뉴스에 대해 커지는 한국 시민들의 관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국내언론의 취재활동을 제한함으로써, 국민의 알권리도 훼손당하고 있다며 빠른 법개정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에 앞서, 지난 4월15일에는 유럽주재한국특파원단이 외교부의 우크라이나 취재제한조치를 비판하는 성명서를 내기도 했다.
전쟁 등 위험지역 취재 위한 안전장비, 보험, 의료, 법률 지원 시스템도 ‘구멍’
.국제 분쟁·전쟁·재난·재해 취재와 관련한 국내 언론의 노하우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전수되지 않고, 실제 현장에서 꼭 필요한 사전보험가입, 취재가이드라인과 취재필수품목에 대한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는 지적도 나왔다.
30년 가까이 된 구형방탄조끼가 지급되고, 전쟁취재 현장에서 국제관행으로 정착된 파란색 ‘프레스완장’에 대한 정보가 없어, 우리 언론인들은 전혀 다른 색깔의 프레스완장을 차고 전쟁취재를 다녀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해외 전쟁·분쟁 지역에서는 언론인임을 증명하는 인증서의 의미로 소속된 기자단체나 협회가 발급한 ‘프레스카드’를 요구받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준비하지 않아 낭패를 본 경우도 있었다. 실제로 협회에는 우크라이나 전쟁 취재를 간 소속 회원이 협회가 발급했던 파란색 프레스완장을 추가제작해 보내 달라거나, 협회프레스카드 사진파일을 메일로 보내달라는 등의 요청들이 들어오기도 했다. 해외 언론사들의 경우 여러 번의 현장취재 경험을 쌓은 전쟁전문기자들이 현장을 지휘하고, 전쟁·위험지역 취재에 대한 노하우를 전수하는데, 우리 방송과 언론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는 자성의 목소리들이 나왔다.
협회, 여권법개정·전쟁취재 보도가이드라인 개정·필수장비 권고안 제정 등 활동 예정
협회는 우리 시민들이 국제뉴스에 대한 관심이 커져가고, 우리 시각의 언론보도를 갈망하는 시대적 흐름을 반영하고, 우크라이나 전쟁취재에서 드러난 문제점들을 현실적으로 개선해 나가기 위한 구체적 활동을 벌여나갈 예정이다.
먼저, 다른 언론단체들과 연대하여 이번에 문제가 부각된 여권법의 취재제한조항을 현실에 맞게 개정하는 노력을 벌여 나갈 예정이다. 또한, 올 하반기로 예정된 영상보도가이드라인 개정 작업에 국제관행에 맞는 전쟁취재보도가이드라인 조항을 추가하고, 전쟁위험지역 취재를 위한 필수장비 권고안도 마련할 계획이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한국 언론의 국제취재 활성화 강조…새정부 여권법 개정으로 ‘진정성’ 보여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지난 4월 4일 열린 한국보도사진전에 참석해 “(우리 언론인들이) 국내문제만이 아니라 세계보도현장에 뛰어들어서, 종군기자로서 또, 해외의 많은 사회·경제·인권현장에 가서 우리 국민들에게 좋은 철학이 담긴 작품을 선사해주시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윤 당선자의 바람처럼 국민들이 우리 시각과 취재진의 역량으로 생산한 국제뉴스 보도를 접하기 위해서는 이를 가로막고 있는 여권법을 하루 빨리 개정해야 한다. 또, 한국 언론의 국제이슈 취재·보도 시스템을 국제기준에 맞게 개선해 나갈 수 있도록 새정부의 정책적 지원과 관심이 필요한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