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오늘은 어디 갔었어?"

by 박진수 posted May 17, 2007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인쇄

"아빠, 오늘은 어디 갔었어?"

 작년 가을 우리 집에 새 식구가 하나 늘었다. 나를 무척이나 빼 닮은 아들이다. 둘째 낳기 전 난 아내에게 말했다. “둘째가 태어나면 가사의 절반을 도와주겠소”하고. 하지만 뒤돌아보면 내가 했던 그 말은 허언이 돼버린 것 같다. (뭐, 당연히 안 돼는 일 아니겠어. 하지만 마음만은 최선을 다한다는 것, 이게 중요하다.)

 큰딸은 휴일에 내가 출근하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놀기 좋은 친구 하나가 없어지니 그 심심함은 가히 알만하다. 작년 아내가 둘째 때문에 몸조리 할 땐 더 그랬다. 하루는 휴일 출근인데 때를 쓴다. 아빠를 따라가겠다는 것이다. 할머니와 있는 것보단 아빠하고 가는 게 더 좋겠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나는 할 수 없이 몇 가지 당부와 주의를 준 후 (혼자 놀아야 한다는 것, 아빠는 바쁘기 때문에 귀찮게 하거나 떼를 쓰면 안 된다는 것 등) 간단히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그 날 일은 야외 가을 들녘의 휴일 스케치다. 시골에서 느끼는 체험 스토리인데 잘 되었다 싶었다. 경기도 시골 마을의 농촌 체험스토리는 딸아이에게도 좋은 경험이 되겠지만, 아빠가 큰 카메라를 메고 취재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혼자 노는 것이 심심하기도 했으련만, 딸아이는 출발 할 때의 약속을 아주 잘 지켜주었다. 여러 가지 신기한 볼거리들에 마음이 팔려서 그랬는지, 아니면 다음에도 또 오기 위한 작전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여하튼 우리 딸은 매우 협조적이었다. 그리고 집에 와서는 조잘조잘 인터뷰하는 흉내도 내고, 6미리 카메라를 들고 찍는 모습을 하며 뉴스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엄마에게 해준다. 마치 자기가 카메라기자가 된 것처럼… 그리고 다음에 자기를 또 데려가 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한번은 딸이 정해년 돼지해를 맞아 돼지를 안고 “정해년 돼지해 행복하세요”라는 말을 하는 것을 녹취 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 후, 딸아이는 한 달 내내 “정해년 돼지해 행복하세요”를 외치며 다니는 것이 웃기기도하고 정말 행복해 지는 것 같아 기분마저 좋아졌다. 영상뉴스를 담당했던 본인에게는 소재의 빈곤과 아이들의 표정 등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힐 때, 한두 번 정말 그 어려움을 딸이 해결해 주기도 했다. 간혹 선배들이 눈치를 채고 "어 영상에 진수랑 똑같은 애가 있던데"하면 한편으론 시치미와 또 한편으로는 너그러움을 구하기도 했다.

 한두 번의 아빠 직업 체험 현장은 우리 딸이 뉴스를 보면서 새로운 질문을 하게 만들어 줬다. “아빠, 오늘 어디 갔었어?” 그 질문에 답해주면, 또 뉴스를 보고 있다가 “와, 저기군. 인터뷰는 사람들이 잘 해줬어?”, “저 높은 곳에 아빠가 올라갔어?” 하는 등 아는 체와 신기한 말들을 하곤 한다. 그리고는 집에서 엄마, 아빠를 상대로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인터뷰도 하고 동생을 촬영해 주기도 하며 "웃어 보세요" "기분이 어때요" 하며 조잘 거린다. 그런 딸의 모습이 그리 싫지 않다. 아이의 눈에 비치는 모습이 어떠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빠가 무슨 일을 한다는 것, 어리지만 아빠의 말을 듣고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편집을 하고 있는데,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이 울린다. 딸아이다. 전화기 저편에서 “아빠, 언제 와. 지금 올 거지?”하는 협박 반, 아양 반의 딸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아빠 일이 아직 안 끝났어."하고 대답했다. 거기에 또 딸은 “오늘 또 늦는다고? 술 마시는 거 아냐?”하고 묻는다. 나는 "아니야, 지금 편집하고 있단 말이야." "그럼 사장님한테 내일 한다고 해"

"안 돼, 내일 새벽부터 방송이야" "진짜지 빨리하고 와야 돼? 그런데 어디 갔다 왔어?"

"그건 집에 가서 얘기 할게" 나에겐 또 다른 데스크가 생겼다. (기분 좋은)

 쉼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카메라와 몸을 섞은 지 어언 십 이년. 홀홀단신 촌놈이 가정을 이뤘고 딸을 낳았고 아들도 낳았다. 그것도 나와 무척이나 빼닮은… 이 모든 것이 카메라와 같이 한 기쁨이며 환희다. 난 카메라의 파인더를 보는 내 모습을 사랑한다. 그 파인더 속에는 한총련 연대사태의 최루탄 냄새도, 씨랜드 화재 현장의 오열도, 한 어린 아이 유괴 사건의 절규도, 아름답고 따뜻함을 전해주는 영상뉴스도 그리고 소중한 또 한 가지,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소중한 생각들을 안주삼아 소주 한잔 빨리 먹고 집에 가련다. 기다리는 가족에게는 미안하지만… “한 잔 하자고! 세상 뭐 그런 거 아니겠어.”

박진수 / YTN 보도국 영상취재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