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 그 날의 감동 - 각본 없는 드라마

by 김경배 posted Jun 25,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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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  그 날의 감동

- 각본 없는 드라마

 얼마 전 남북철도 시험운행이 있었다. 철마가 그토록 달리고 싶어 했던 그 길을 달린 것이다. 하늘 길, 뱃길 ,육로에 이어 마지막으로 철길이 열린 것이다. 이번 시험운행이 일회성이라는 비난을 피할 순 없겠지만, 56년 만에 민족의 혈맥이 이어진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뉴스특보로 생방송되는 남북철도기념식을 보면서 나는 어느새 그 날의 감동을 느끼며 2000년 6월 13일로 돌아가 평양행 특별기에 오르고 있었다. 2000년 6월 13일 오전 9시 30분, 서울공항을 이륙 한지 10분이 채 안됐을 때 기장의 기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우리는 이미 북한영공으로 넘어왔습니다. 2시 방향을 보십시오. 저 멀리 보이는 곳이 북녘 땅인 웅진반도의 장산곶입니다“

 반세기 만에 남북의 하늘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아 이제 북한이구나!”

 우리는 창가에 몰려 북녘의 산하를 내려 보면서 잠시 감회에 젖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일 뿐, 잠시 뒤에 있을 감격적이고 놀라운 장면들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채 특별기는 순안공항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나는 공항 활주로에 임시로 마련된 검색대에서 예상보다 간단하게 입국절차를 마치고 공항취재지역으로 이동했다. 취재 준비를 하고 있는데 동원된 군중들이 “와” 하는 함성을 질렀다. 카메라 앵글을 뒤로 돌려 군중 쪽으로 줌 인한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카메라 파인더에 잡힌 인물은 다름 아닌 김정일 위원장이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사실 그 당시 우리는 남북정상회담 취재에 대해 어떠한 정보도 갖고 있지 못했다. 대통령 순방 취재는 출발 전에 공식 일정이 기자단에 전달돼 취재 계획을 짜고 취재팀을 나누는 게 관례인데 청와대측에서 공식적으로 기자단에 통보한 대통령의 일정이 전혀 없었다. 남북정상회담조차도 공개로 해야 할지 비공개로 해야 할지 결정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방북에 참여한 합동취재단 카메라기자들은 딜레마에 빠졌었다. 과연 우리가 어떤 그림을 얼마나 찍어서 서울로 보낼 수 있을까?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고민은 김정일 위원장의 등장으로 기우에 그치게 됐다. 드디어 비행기 문이 열리고 김대중 대통령이 모습을 나타냈다. 김 대통령은 잠시 감회어린 눈으로 북녘 땅을 바라보다가 손을 흔들었고 김 위원장과 북한 동포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이윽고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뜨거운 악수. 각본 없는 드라마의 두 주인공이 속된 말로 그림을 만들어주기 시작했다. 내 바로 앞에서 남과 북의 두 정상이 분단 50년 만에 얼굴을 맞대고 뜨겁게 악수하는 장면을 담으면서 이러한 역사의 현장을 기록하고 목격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놀라운 장면은 계속 이어졌다. 김 대통령이 북한의 인민군 의장대를 사열한 것이다. 김 위원장은 사열 내내 보행이 불편한 김 대통령의 보조를 맞춰가며 몇 발자국 뒤에서 걸으며 연장자에 대한 예의를 갖춰 눈길을 끌었다. 김 대통령이 적국의 의장대를 사열한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다음 장면은 사열을 마치고 공항에서 떠나면서 만들어 졌다. 두 정상이 함께 같은 차에 동승한 것이다. 이런 모습은 공항에서 김일성대학까지 40km에 이르는 연도에 늘어선 수많은 환영인파를 가로지르며 감동으로 이어졌다. 손에 진분홍색 조화를 든 환영인파는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 같았다. 평양시민 전체가 도로에 나온 것 같았다. 동원된 모습에 씁쓸하기도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순박한 모습도 느낄 수 있었다. 남북정상회담 첫날 북측의 이러한 파격적인 의전은 앞으로 있을 회담의 성공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드디어 프레스센터가 있는 고려호텔에 도착했다. 제일 먼저 할 일은 공항에서부터 취재한 그림을 송출하는 것이었다. 나는 테이프를 걸어놓고 서울로 연락했다 “평양입니다. 그림 잘 들어갑니까” “잘 들어옵니다” 서울과의 직접적인 전화 통화가 금지되어 있어 자세한 얘기는 할 수 없었지만 서울의 환호하는 분위기는 알 수 있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1인 1실로 배정된 방으로 올라간 시간은 새벽 2시. 호텔에 들어서자 환영한다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고 오래 사용하지 않아서인지 곰팡이 냄새가 났지만 혼자쓰기엔 넓었고 깨끗했다. 나는 담배 한 대를 피워 물고 평양의 야경을 보고 싶어 커튼을 열어보았다. 멀리 화력발전소의 불빛만 희미하게 비칠 뿐 거리에 가로등 하나 켜있지 않은 적막의 도시 그 자체였다. 북한의 전력난이 얼마나 심각한 지 알 수 있었다.

 담배연기 속에 흥분과 감동의 열기를 뒤로 한 채 평양의 첫 날밤은 깊어만 갔다. 6월 14일. 아침방송을 위해 프레스센터에 내려와 보니 나를 맞이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나를 담당하는 안내원으로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과 출신인 홍우식이라는 30살의 청년이었다. 민화협에서 일하는 그는 나를 항상 친절하게 안내했다. 나는 그와 어제 감동적인 두 정상의 만남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웠고 서로 이념이나 체제에 관한 질문 따위는 하지 않았다. 서로에 대해 신뢰가 쌓인 탓인지 이동 중에 거리스케치는 아무런 제재 없이 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 이튿날 일정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2차에 걸친 정상회담에서도 김정일 위원장은 거침없고 괄괄한 말투, 호방하지만 때로는 겸손한 모습을 보이면서 회담을 이끌어나가 그동안 괴팍하고, 소심하고, 충동적인 인간형으로만 인식했던 나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예정시간을 훨씬 넘긴 마라톤협상 끝에 합의문이 만들어졌다.

 이어서 열린 김 대통령이 주최한 만찬장에서는 남과 북의  두 정상이 합의를 이루어냈다는 것에 고무되어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김 위원장은 이희호 여사가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여기까지 와서 이산가족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이 여사를 김 대통령 옆자리로 옮기게 하고는 “두 분이 떨어져 계셔서 김 대통령이 이산가족 문제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말해 좌중의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밤이 깊어가면서 축배가 이어지면서 남북정상회담도 절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드디어 두 정상의 남북공동합의문 서명이 이어졌고 날짜를 넘겨 15일 새벽에 공식발표가 있었다.

 6월 15일. 어제의 성공적인 회담결과 때문인지 아침부터 프레스센터는 술렁거렸다. 북측 안내원들 역시 합의문 기사로 전면을 가득채운 노동신문을 보면서 남과 북의 미래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백화원에서 정상회담 성공을 자축하는 오찬장은 두 정상의 덕담이 오가면서 웃음꽃이 만발했고 손에 손을 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며 이별의 아쉬움을 달랬다. 김 대통령이 성공적인 남북정상회담을 마치고 순안공항으로 가는 길에도 평양시민들은 또다시 진분홍색 꽃을 흔들며 환송해 주었다. 길고도 짧았던 2박3일간의 각본 없는 드라마의 두 주인공인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은 서로를 힘차게 끌어안았다. 순안공항에는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김 위원장은 특별기가 이륙할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2000년 6월. 전 세계에 시선이 한반도를 바라보고 있을 때, 남북정상회담 합동취재단 카메라기자들은 그 중심에서 역사의 소명을 갖고 최선을 다해 가감 없이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영상을 취재해 베일에 싸인 김정일의 다른 모습과 50년간 상상 속에만 그려지던 북한의 모습을 전달했다. 이렇게 카메라기자의 눈으로 전달된 영상들이 세계가 한반도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함은 물론, 남북 간의 이질감을 해소하고 우리가 하나임을 확인시켜 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김경배 / MBC 보도국 영상취재1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