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진에 대한 폭력, 헌법이 보장한 언론자유 파괴 행위
탄핵 선고 등 대형 정치 이벤트 앞두고 현장 취재진 안전 위협 ‘심각’
윤석열 대통령의 극렬 지지자들이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난동을 부리며 취재진을 조직적으로 폭행하고 취재 장비 등을 탈취한 것을 두고 “심각한 언론자유 위협”이라며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피해를 입은 해당 방송사들도 법적 조치에 나서는 등 초유의 사태에 강하게 대응하고 나섰다.
윤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 실질심사가 진행되던 지난 18일, 일부 지지자들은 법원 앞에서 집회를 취재하던 MBC 기자와 오디오맨 등을 둘러싸고 지속적인 폭행과 폭언을 했다.
구속영장이 발부된 19일 새벽엔 지지자들의 행동이 더욱 극렬해졌다.
취재를 위해 법원에 온 기자와 취재 차량을 대상으로 폭력적으로 언론사 소속을 확인하고, 언론사를 가리지 않고 조직적으로 폭행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MBC 영상기자와 오디오맨은 집단 구타를 당했다.
조롱, 도발 넘어 부수고 빼앗고 때리고
MBC 영상기자 사회팀 데스크를 맡고 있는 현기택 기자는 “법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차를 대고 서부지법으로 가려는데 한쪽에서 ‘MBC다!’ 하고 소리치더니 군중들이 몰려와 취재진을 둘러싸고 욕설과 폭행을 가했다”며 “메모리카드를 빼앗고 트라이포트, 배터리, 오디오맨의 휴대전화 등이 사라지고 송출 장비 라인도 부서졌다”고 밝혔다.
현 기자는 이어 “KBS <추적 60분> 팀의 도움을 받아 현장 영상을 확보해 보니 폭행 정도가 심각하고 언론 자유를 위협하는 일이라고 판단해 방송을 결정했다”면서 “회사 차원에서 법무팀의 지원을 받아 가해자들에 대한 고소・고발을 진행했다”고 덧붙였다. 이날 취재진 폭행에 가담한 주 가해자들은 현재 구속기소된 상태다.
KBS・MBN 취재진도 시위대로부터 무차별 폭행을 당했다.
MBN 취재진은 지지자들에게 둘러싸여 메모리 카드를 빼앗기고 집단 구타를 당해 얼굴, 손목, 발목 부상과 전치 3주의 상해 진단을 받았다. 또, 시위대 10여 명은 카메라를 들고 취재 중인 KBS 영상기자와 오디오맨을 수차례 집단 폭행했다. 이 과정에서 KBS의 카메라 등 촬영 장비가 일부 파손됐다.
후발대로 현장에 간 KBS의 기자는 “시위대가 현장의 취재진을 무차별 폭행한다는 얘기를 듣고 갔는데, 도착하자마자 MBC 영상기자와 오디오맨이 폭행당하는 장면을 목격했다”며 “말리는 게 우선이라고 판단해 시위대의 일원인 척 하고 ‘폭행은 안 된다. 우리 이미지만 나빠진다’고 하면서 폭행을 말렸다”고 밝혔다.
이 기자는 이어 “흥분한 많은 사람들이 MBC ENG 카메라를 집어던지기도 하고 취재 장비와 메모리 카드를 뺏으려고 했다”며 “오디오맨은 시위대가 날린 주먹에 눈을 정통으로 맞아 많이 걱정됐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해당 방송사들은 즉각 강력 대응에 나섰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MBC는 이날 낸 입장문에서 이번 사태를 “단순히 한 언론사에 대한 폭력이 아니라 헌법적 핵심 가치인 언론자유를 유린한 폭거”라고 규정하고 “반헌법·반국가세력에 대해 폭동에 상응하는 법적 책임을 물을 것이며, 취재진 보호와 MBC의 보도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도 향후 모든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밝혔다.
KBS와 MBN도 20일 “헌법상 기본권인 국민의 알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현장을 누비는 취재진을 폭행한 것은 언론자유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자, 법치주의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며 사법당국의 엄정한 수사를 촉구하는 한편 폭행 가담자에 대해 법적 조치를 취하는 등 강력 대처하겠다고 밝혔다.
한국영상기자협회 등 9개 언론현업단체도 긴급 기자회견을 얼어 “대한민국 법치를 뒤흔든 폭도들에게 어설픈 관용이란 있을 수 없다”며 “언론자유를 위협하는 일체의 행위에 견결하게 맞서며 그 책임을 끝까지 물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협회와 방송기자연합회는 집회・시위 현장에서 취재진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권고안을 만들어 지난 22일 각 방송사와 회원들에게 고지했다. 권고안에는 ▲안전거리 유지와 유사시 현장 이탈 ▲취재진 보호할 추가 인력 배치 ▲집회·시위 참가자를 자극할 수 있는 취재·보도 지양 ▲취재진 안전을 우선한 취재 지시 및 폭력 상황 채증 위한 보조 촬영장비 부착 ▲언론 자유 억압하는 참가자들에 대한 흐림 처리 금지 ▲취재진 보호에 대한 경찰의 적극 협조 등 6개 사항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앞서 협회는 서부지법 난동 시위대의 모습을 각 방송사가 흐림처리해 보도하자 회원들에게 “시위 참가자는 초상권 보호 대상이 아니다. (그들을) 블러(흐림)처리하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불법행위의 주체를 보호하거나 옹호하는 느낌을 줄 수 있다”고 공지하기도 했다.
서부지법 폭동 사태는 ‘목격자 없는 폭동 만들기’
나준영 회장은 “언론인을 폭행하고 장비를 빼앗아서라도 목격자를 없애겠다는 그들의 행위는 헌법이 규정한 언론의 자유를 심각하게 위협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나 회장은 이어 “이런 행위가 헌재 선고, 조기 대선 등 이후에 이어질 현장에서 매번 나타날 경우 언론 자유를 넘어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가 크게 위협받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심각성을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한 영상기자는 “대통령 2차 체포 당일 관저 앞에 취재를 갔는데, 누군가 우리 회사 이름을 외치자 사람들이 몰려와 내 옷을 잡아끌고, 여러 명이 오디오맨을 잡아 끌어가기도 했다”면서 “헌재에 취재를 나갈 때도 카메라를 가져가지 못하고 휴대폰을 갖고 갔는데, 그만큼 취재가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한편, 채영길 한국외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지난 3일 민주언론시민연합 홈페이지에 ‘내란 극복을 위한 저널리즘 10원칙’을 제안해 눈길을 끌었다.
채 교수는 민주주의 수호가 저널리즘의 본질임을 상기할 때 반민주적 세력에게 카메라와 마이크를 제공하는 ‘기계적 중립’ 또는 ‘따옴표 저널리즘’을 당장 멈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헌법과 민주주의 질서를 부정하는 인물이나 발언은 전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극우 세력이 유포하는 허위 정보를 ‘양측 의견’으로 보도해 ‘거짓 균형’을 맞출 게 아니라 근거 없는 주장에 대해서는 단호히 거부하라고 제언했다.
채 교수는 “헌재 선고 이후 대선이 치러질 텐데, 경마식 보도는 극우적 행위와 메시지도 다른 후보와 동등한 차원에서 다루게 된다”며 “사회적으로 수용돼선 안되는 메시지나 세력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과정이 될 수 있고, 실제로 유럽 극우 정당이 제도권으로 들어온 방식인 만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현직에 있는 기자들과 시민사회, 학계가 머리를 맞대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상기자들을 향해서도 “영상은 굉장히 강한 메시지를 주는 힘이 있는 만큼 민주주의에 부정적이고 반사회적인 집단의 입장이 광범위하게 공유되어 (그 집단이) 세력화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부지법 침탈 사건처럼 민주주의의 제도를 흔드는 폭력에 대해 영상을 반복해 보여주기보다는 최소한의 보도로 덜 중요하게 취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채 교수는 “이번에 서부지법 침탈자의 초상권은 보호해야 할 대상자들이 아니므로 흐림 처리를 하지 않기로 한 것처럼 영상기자들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논의가 진행돼야 한다”며 “추상적 수준에서 ‘객관적・기계적 중립을 거부한다’가 아니라 민주주의 입장에서 어떤 영상과 오디오를 편집・가공할 것인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가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안경숙 기자 cat1006@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