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싫어한 종군기자 로버트 카파 100주년 기념 사진전 - 전시기획자 조대연 교수 인터뷰

by TVNEWS posted Oct 07, 2013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No Attached Image





1. 전쟁을 싫어한 종군기자 로버트카파 100주년 기념 사진전
1.1. 전시기획자 조대연 교수 인터뷰

프랑스 통신원 최효진

올해에는 한국전쟁 정전 60주년을 기념해 국내외에서 많은 행사가 열렸다. 스페인 내전을 비롯해 20세기 세계 각지에서 일어난 전쟁을 취재했던 종군기자 “로버트카파 100주년 기념전”도 그 중 하나이다. 비록 로버트 카파가 한국전쟁을 취재하지는 않았지만, 전쟁이 남긴 상처를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그 누구보다 생생하게 보여준 종군기자의 흔적은 정전 60주년이 우리에게 남긴 것을 되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지난달 2일부터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 전시회는 개막 2주 만에 관람객 만 명을 넘기는 등 큰 화제를 모았다. 이번 전시 기획 총 감독을 맡은 조대연 교수 (광주대 사진영상학과)를 만나봤다.

뉴욕 국제사진센터(International Center of Photography, ICP) 소장 작품이 직접 한국에 왔다는 점이 특별한 것 같은데, 이번 전시를 어떻게 기획하게 됐나?

사실, 이번 전시가 국내 최초의 ICP작품 소장전이라는 점은 기존 사진전과 차별성을 갖는 부분이다. 사진 작품에서는 최종 인화를 누가 하느냐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ICP에는 로버트 카파의 동생인 코넬 카파가 직접 선택하고 프린트한 작품들이 900여 점이 넘는다. 이 중 160점이 우리 전시에 선정된 것이니 특별한 것은 맞다. 하지만, ICP측과 기획 단계에서 우여곡절이 많았다. 처음 우리가 ICP측에 카파 탄생 100주년을 맞아서 한국에도 전시를 하고 싶다고 연락했을 때, ICP측은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왜 우리 작품을 전시하려고 하느냐, 보통 사진전시나 출판 등을 하려면 매그넘(MAGNUM: 로버트 카파 등이 주축이 되어 만든 국제 보도사진 작가 그룹) 에이전트에 연락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회의적인 반응이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매그넘보다는 ICP측이 더 많은, 더 좋은 카파 작품들을 보유하고 있어 작품 선택의 폭이 넓었고, 어떤 의미에서 매그넘보다는 더 전통성을 가진 파트너 같았다. 작품 대여 등 비용 면에서도 ICP와 작업하는 쪽이 더 많은 예산을 필요로 했지만, 전시될 작품 수준을 고려해서 ICP측과 작업하도록 노력했다. ICP 수석 큐레이터였던 크리스토퍼 필립스도 이번 전시를 직접 보고는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고 했다. 자기네들이 직접 핸들링해서 진행하는 기획이 아니어서 그랬는지  처음부터 한국 전시에 대해 걱정이 많았는데, 개막이 되고 보니 일본 등 다른 나라에서 개최했던 사진전보다 더 훌륭한 것 같다고 했다. 로버트 카파 사진이 실렸던 라이프 잡지라든지, 카파의 일대기를 소개한 다큐멘터리 영상, 그가 사용했던 카메라 등 다양한 소재를 활용한 전시 구성이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뉴욕 국제사진센터(International Center of Photography, ICP)
미국 뉴욕 맨해튼 중심부에 위치한 사진박물관, 학교, 연구센터. 1974년 로버트 카파의 동생이자 보도사진의 선구자인 코넬 카파가 설립했다. 뉴욕 국제사진센터는 보도사진을 주로 전시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특별히 강조한 점은 어떤 부분인가?

1913년생인 로버트 카파는 스페인 내전(1936), 2차 세계대전 (1941-1945), 제1차 중동전쟁 (1948), 인도차이나 전쟁 (1954) 등을 취재하며 어떻게 보면 전쟁 사진의 역사를 만든 인물이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 종군기자로서의 로버트 카파를 넘어, 스무 해가 넘는 시간을 사진가로 살다 간 카파의 일대기를 보여주고 싶었다. 물론 로버트 카파가 전쟁사진가였기 때문에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사진들도 적지 않지만, 그와 함께 그가 사진기 셔터를 누르면서 보여주고자 했던 휴머니즘이 담겨있는 따뜻하고 인간적인 작품들도 많다. 또, 로버트 카파는 친화력이 굉장히 좋았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 사람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카페에서 우연히 만나 술 한잔 같이 마셔보면, 누구든 그를 좋은 친구로 생각하게 될 정도란다. 보통 카파와 같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글을 쓰던 작가나 화가, 기자들을 친구로 두곤 했다. 이번 전시에도 피카소, 마티스, 잉그리드 버그만, 헤밍웨이, 존 스타인벡 등 카파와 친하게 지냈던 역사적 인물들의 사진들도 많다. 잘생긴 외모와 친화력덕분인지 여자들한테도 인기가 좋았다고.. 특히, 카파의 첫 사랑이자 스페인 내전을 함께 취재한 게르다 타로와의 러브스토리라든지, 본인은 사진기자로서 가족을 만들면 안 되는 운명이라며 당대 최고 배우였던 잉그리드 버그만의 청혼을 뿌리친 보헤미안으로서의 로버트 카파의 모습도 보여주고 싶었다.

전시된 작품 중 전쟁 중에 촬영한 피난민 사진 등을 보면, 로버트 카파가 그들하고 어느 정도 친해진 다음에 사진기 셔터를 눌렀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30~50년대 그가 활동했던 시대를 생생하게 전하는 사진들이 꽤 있다. 어떻게 보면 그의 친화력이 현장에서는 취재원들과 가까워지는 큰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물론이다. 촬영기자들도 그렇고, 사진가로서 그런 태도는 기본이다. 카파처럼 취재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게 정서적으로 다가가고자 하는 마음, 그들과 친해지고자 하는 노력, 또 취재 현장에 대한 배경지식을 갖추면 더 깊이 있는 취재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뉴스란 것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사실 그대로를 왜곡 없이 카메라에 담고, 보도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만 그 사건을 이슈화시키고, 보도사진/영상을 보는 사람들에게 어떤 리액션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감성을 담는 것도 중요하다. 솔직히, 카파가 남겨놓은 사진을 보면, 일단 흑백이기도 하고 그다지 화려한 사진들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같은 대상을 지금 찍으면 기술도 더 좋고, 기계가 더 좋아져서 훨씬 더 잘 찍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파의 사진들을 통해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감동은 그 사람이 활동한 지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다.

이번 전시를 통해 촬영기자들이 후배로서 특별히 배울 점이 있을지?

사실 로버트 카파가 활동하던 시대에는 사진과 영상의 구분이 특별히 없었다. 영화 산업이 한창이던 시대였고 카파도 사진가로 알려져 있지만, 영화를 찍기도 했다. 카파가 활동했던 시대에 사진 매체는 오늘날의 SNS와 같은 것이었다. 사진 기술이 급격히 발전하면서 전쟁 현장에서 사람이 총 맞아 죽는 현장을 말 그대로 생생히 보여주게 됐다. 라이프 등 각종 잡지를 통해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참상을 바로 업데이트 할 수 있었고, 현장에 있던 카파 같은 사진가들이 들었던 사진기는 잡지 구독자들의 눈을 대신해서 현장을 먼저 본 것이다. 그런 게 저널리즘 아닌가? 오늘날과 같이 사진 저널리즘이 위기인 시대에 40여 년 전 카파가 남긴 보도사진들을 보며, 지금 우리가 남기는 사진과 영상이 수십 년 후 어떻게 바뀔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다.


(로버트 카파 약력)
1913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생. (본명 : 앙드레 프리드만)
1932 독일 베를린 사진 에이전시 데포트의 암실 조수로 취직.
레옹 트로츠키 연설을 촬영하며 사진기자로서 데뷔.
1933 히틀러 독재 정치가 시작되면서 유대인 박해를 피해 파리로 이동.
1935 ‘로버트 카파’라는 이름으로 사진 판매하기 시작.
1937 스페인 내전 취재 중 연인 게르다 타로 사망 이후 본격적으로 종군기자 활동 시작.
     당시 신생잡지였던 라이프 지의 프리랜서로 활동.
     헤밍웨이 등과 함께 스페인 내전 취재.
1938 중일전쟁 취재. “400만”이라는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네덜란드 영화제작자
요리스 이벤스와 함께 작업.  
1941-1945 제2차 세계대전 유럽전선 취재.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미군 부대 동행 취재. 당시 촬영에 쓰인 100여 장의 필름들 중 암실 조수의 실수로 단 열 장만 건짐.
1947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데이빗 시무어, 조지 로저, 윌리엄 벤디버트 등 동료 사진가들
과 연합 에이전시 매그넘 설립.
1948 제1차 중동전쟁. 텔 아비브에서 이스라엘의 독립선언 취재.
1954 일본 신생잡지 ‘카메라 마이니치’ 초청으로 3주간 일본 체류 중 ‘라이프’지 의뢰에 따라 프랑스에 대항하는 베트남 독립운동 취재 차 인도차이나로 이동.
남딘에서 타이빈으로 향하는 수송차량이 잠시 멈췄을 때 지뢰 밟고 사망.
1955 라이프 지와 미국 전쟁기자단체가 ‘로버트카파상’ 제정
1974 동생 코넬 카파, 형의 기록과 추억을 보존하기 위해 뉴욕에 ICP 건립.


전시작품 설명

첨부 사진 설명 :
① 공습경보가 울릴 때, 피난처를 향해 달리는 엄마와 딸, 스페인 빌바오.
② 카파의 <어느 공화파 병사의 죽음>은 포토저널리즘의 역사상 가장 논란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③ 1944년 6월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 중에 카파가 촬영한 가장 유명한 사진. 포커스도 맞지 않고 상당히 흔들린 상태이지만, 오히려 당시의 절박했던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어서 제2차 세계대전의 보도사진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④ 이스라엘의 항구도시 하이파에는 매일같이 유럽 각지로부터 수천명씩 유대인들이 도착 했다. 1949년 5~6월 하이파.
⑤ 연합군이 입성하기 전, 독일군과 전쟁을 했던 20명의 10대 전사자들의 장례식장에서 우는 여성들. 이탈리아 나폴리.
⑥ 1938년 12월호 <픽쳐 포스터>에 실린 카파의 모습.
⑦ 다른 스페인 피난민 강제 수용소로 이동되는 스페인 난민들. 프랑스 바르까레.

Articles

1 2 3 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