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 젖은 금강산

by 이동형 posted Nov 20,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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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 실험그 후, 북한을 가다>

비에 젖은 금강산

 ‘풍악산, 가을 단풍이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풍악이라는 별칭을 붙였을까? 곱디고운 풍악의 단풍은 어떠할까? 그 모습을 영상에 담으면 어떨까?’ 카메라기자라면 가을 금강산, 그러니까 풍악산을 영상에 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쯤은 해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올 가을 들어 문득문득 그런 생각이 들던 중 마침내 기회가 왔다. 그것도 아주 묘한 시기에.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는 발표를 하고 전 세계가 북핵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시점. 일부 사람들은 금강산 관광을 예약했다가 포기를 하고, 학생들의 수학여행 행선지 역시 다른 곳으로 옮기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개성공단과 더불어 금강산관광이 계속될 수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일고, 과연 그렇다면 현지 사정은 어떤지에 대한 사람들의 궁금증이 늘어났다.

 10월 17일 새벽, 여명이 밝아오는 시간.

 취재팀이 남측 CIQ에 도착했을 때, 이미 많은 관광객들은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소 두려운 듯 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 기대감과 긴장감에 얼굴이 상기된 사람,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의 표정 속에서도 가장 많이 볼 수 있었던 것은 기대감과 긴장감에 약간 상기된 얼굴들이었다. 그 때 내 얼굴도 역시 그들과 같았던 것 같다.

 버스에 오르고 남측 통문을 통과한 버스가 북한 땅, 그리운 금강산을 향해 가고 있을 때 관광 안내원이 간단한 주의사항과 함께 남북을 가르는 155마일의 휴전선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휴전선 철책은 과연 어떠한 모습일까요?”

 안내원이 질문을 던졌다. 사람들은 당연히 휴전선을 TV에서 많이 나왔던 굳건히 세워진 철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가 보아온 것은 남방한계선에 세워진 우리 측 철책이었다. 우리는 새로 개통된 동해선 철로를 따라 버스를 타고 달리며, 진짜 휴전선을 보았다. 다 쓰러져 가는 나무 말뚝들, 그것이 휴전선의 표식이었다. 동에서 서로 1280여개의 나무 말뚝이  남북을 가르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덧 버스는 북측에 들어서고, 북측 초소를 지나 너른 들판을 달리고 있었다. 창밖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사람들은 허리를 굽히고 뭔가 농작물을 가꾸는 듯 보이기도 하고, 도로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지나가는 버스 행렬을 바라보기도 했다. 이런 날은 특히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다는 것이 안내원의 설명이었다.

 마침내 버스는 금강산 관광의 시작점인 온정리에 도착했다. 그런데 우려했던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예보보다 빨리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화려한 단풍의 꿈이 빗물에 젖는 순간이었다. 어쨌든 온정리에서 바라본 금강산은 시커먼 먹구름에 휩싸여 마치 폭풍전야 같은 느낌을 주었다. 가슴 한 쪽이 무언가에 막혀있는 듯한 답답함이 느껴졌다.

 “땅콩 드시라요. 맛있는 북한 땅콩 맛 좀 보시라요.”

 온정리 기념품 판매소에서 나온 흰 셔츠에 말끔한 남자가 접시에 든 땅콩을 관광객들에게 내밀었다. 조청과 함께 버무린 과자 같은 땅콩이었다. 그 맛을 보는 관광객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금강산의 먹구름 때문에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은 나아지는 듯 했다.

 후두둑, 후두둑, 만물상으로 가는 버스가 산을 오르는 동안 빗줄기는 더욱 세차게 몰아쳤다. 이윽고 만물상 입구에 내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빗줄기가 더욱 굵어졌고, 이 상태로 관광을 계속 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마저 생겼다. 그러나 관광객들은 우비를 입고, 우산을 들고, 삼삼오오 만물상을 오르기 시작했다. 모처럼의 금강산 여행에 왠 비란 말인가. 날씨까지도 도와주지 않는다고 푸념을 할만도 한데, 산행을 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자못 밝았다. 드디어 금강산을 오르게 되었다는 마음에 모든 시름이 사라진 모양이었다. 관광객들은 어느새 수려한 단풍에 빠지고 가을비 우수에 젖어 금강산에 동화돼 버렸다.

 한 관광객은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는 소식에 걱정이 된 나머지 금강산 관광예약을 취소했다가, 관광이 계속된다는 소식에 다시금 신청하여 금강산에 오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걱정은 됐지만 오기를 잘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와서 보니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고 우리 남한과 별로 다를 바 없다”, “너무나 평온하기만 해서 오히려 이상하다”, “금강산 이름만큼 너무 아름답다” 등 등 대체로 오지 않았으면 후회했을 것 같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정작 궁금한 것은 북측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그들은 과연 이번 사태를 어떻게 보는 것일까? 그들의 대답은 거의 비슷했다. 금강산 관광과 핵실험은 별개의 것이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일부 북한사람들은 이번 일로 관광 사업이 피해를 입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는 듯 했다.  

 나는 비오는 산을 오르며 관광객과 함께 어우러지는 단풍을 영상에 담느라 이리저리 헤매다 보니 렌즈에 뽀얀 습기도 차고 보통의 산행취재보다 배는 힘이 들었다. 하지만 빗물에 젖어 물기를 머금은 단풍은 햇살에 빛나는 단풍 못지않게 아름다웠다.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관광객들 역시 금강산에 푹 빠져있는 듯이 보였고, 즐거워 보였다. 여행이란 그곳이 어디든 즐거운 것인가 보다.

YTN 영상취재팀 기자 이동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