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아 내전 취재기-이승주

by TVNEWS posted Nov 02,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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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순회특파원  첫 번째 Mission 완료




드디어, 순회특파원 첫 번째 Mission, 시리아내전을 취재하라는 출장명령이 떨어졌다.
취재지역은, 시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터키 ‘안타키아’ 라는 도시였다.
6월29일 유럽, 중동, 아프리카지역 순회특파원 인사명령이 난지 딱 1달만이다.

순회특파원이 된 후, 시리아내전 상황을 계속 모니터링을 하고 있었지만, 런던올림픽
기간에 출장을 갈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일단 회사로부터 명령을 받은 이상, 망설이지 않고 신속히 출장준비를 했다.
터키, 시리아국경에서 라이브중계를 위해, 처음 사용해보는 Began이라는 위성장비를
밤12시까지 배우고, 비상식량, 약품, 카메라, 방탄조끼, 위성전화 등 장비를 챙기니 일반 해외출장 보다 2배나 더 무거웠다.(당연히 Over Charge는 기본)

7월28일 10시 인천공항을 출발, 11시간을 날아 터키이스탄불에 도착, 국내선 터키쉬에어라인
으로 갈아타고 2시간을 또 날아 29일 새벽2시 종착지 터키 ‘안타키아’ 에 무사히 도착했다.

‘안타키아’는 터키남동부에 위치하고 있다, 인구 20만 명이 살고 있는 작은 도시로 기독교 성서에는 ‘안디옥’ 으로 나온다.(실피우스산 중턱 동굴에서 베드로가 예배를 드렸던 세계 최초의 동굴교회가 있다)
2000년 전에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과 더불어 카톨릭 5대교구 중 하나로 인구50만 명이 살았던 꽤 번성한 도시였다.

BC330년경, 알렉산더대왕이 동방원정 때 이곳에서 물을 마시고 반해 도시를 건설하려 했을
정도로 물맛이 좋다. 그의 사후 부장 셀레우코스1세가 이곳에 도시를 건설하여 아버지 이름을 따서 ‘안티오키아’ 라고 명명하고 셀레우코스왕조 시대를 열었다.
그 후 로마의 지배를 받았고(시이저와 클레오파트라도 이곳에 왔다) 사라센, 셀주크투르크의 지배도 받았으며, 그 후 십자군에 의해 다시 점령당했고, 16세기이후는 오스만투르크가
지배했다.(역사적으로 ‘안타키아’는 다민족, 다인종, 다종교의 땅 이다)
현재는 이슬람교가 대다수를 차지하는데 그중에서도 수니파와 사이가 좋지 않은 시아파의 분파인 알라위파가 45%를 차지한다.(알라위파는 내전중인 시리아 대통령 ‘바샤르 알 아사드’가 속해있는 종파이다)
세계1차대전 후 오스만제국의 패배로 프랑스자치령이 되었다가 1939년 주민들의 국민투표에 의해 터키공화국에 편입되었다.

우리는, ‘안타키아’에 머물면서, 국경을 통해 시리아로 들어가 그곳 상황을 취재 하려고 했다. 그러나 터키, 시리아 국경이 폐쇄되면서 시리아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 했다.(물론 돈을 주면
국경을 넘어 시리아 땅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런 제안을 했던 자유시리아군이 국경을 넘어
시리아로 들어가다가 폭격을 맞고 동료4명과 함께 죽었다. 우리는 장례식이 끝난 후 자유시리아군 5명이 나란히 묻힌 ‘야일라다그’ 공동묘지에서 취재를 해야 했다.

이곳은 지중해성기후로 한낮에는 40도를 육박한다.(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른다.)
또 허허벌판에서 터키경찰과 군인들의 눈을 피해 난민들을 취재 하는 것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시리아난민들은 아랍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아랍어를 말할 수 있는 현지코디가 아랍어로 질문 하고 그 대답을 한국선교사에게 터키어로 설명하면 그분이 한국말로 설명해 주는 방법으로 취재했다. 나중에는 선교사가 사정상 동행을 못하게 되자 영어가 가능한 코디를 구해 아랍어를 터키어로 터키어를 영어로 번역해주는 다원통역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현장에서 어렵게 취재한 영상을 송출하는 것과 현장 위성중계였다.

'안타키아‘에서 40km떨어진 ’레이한느‘라는 국경검문소에서 터키로 넘어오는 가족을 운 좋게 취재했는데, 출장전날 밤12시까지 배운 위성장비 Began이 위성과 접속을 못하는 것이 아닌가!
이글거리는 태양아래서 땀은 비 오듯 흘러내리고 아스팔트, 자동차지붕, 나중에는 검문소옥상에
올라가 Began을 양손으로 들고 ‘독도는 우리 땅’ 이라고 만세를 불러 봐도 실패 또 실패...
전임 순회특파원이 Began을 설치하려다 사고가 난 것도 아! 이러다가 사고가 났구나 라고 생각이 들었다. 성질 같아서는 Began을 걷어차 내다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고, 중계방송
시간은 다가오고 미치고 환장할 노릇..... 결국 국경에서 Began위성중계는 실패....
한국시간22시 현장중계는 펑크가 났다.(두사람 모두 침묵모드, 분위기 썰렁~)

이제 믿을 것은 IP Cast뿐, 부랴부랴 1시간을 이동해 호텔로 돌아와 중계 밑그림을 송출했다. 인터넷 속도는 200~300Kbps 용량90Mbyte를 송출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1시간정도(그나마 터키는 인터넷속도가 양호한 편) 중계방송 시간은 1시간10분 뒤, 웹하드로 보내다가 중간에 멈추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되는 상황. 등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고 입술은 바싹바싹 말랐다.
무사히 영상송출을 마치자, 김지선기자가 호텔베란다에 끝에 서서 중계방송준비를 했다.
그런데 뒷 배경은 좋은 데 얼굴이 까맣게 나오는 게 아닌가!
뒤로 조금만 뒤로... 햇볕을 받을 수 있는 곳 까지 간신히 뒤로 물러났는데, 이번에는 뒤 배경이 베란다 난간에 걸린다.(사방이 지뢰밭이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그때 보인 것이 호텔방 테이블과 의자였다.
테이블위에 의자를 올려놓고 거기에다 벼개를 2개 올려 놓았다. 완벽했다.(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는지 나 자신이 너무 대견했다)
이렇게 첫날 방송은 혹독한 신고식을 치른 후 마무리 됐다.

시리아는 지난해 3월19일 아사드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대5명이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공식집계로만 2만여명이 사망하는 내전을 겪고 있다.

우리는 세 곳의 난민촌(‘야일라다그’ ‘알트느즈’ ‘아파이든’)과 ‘예테폐’ 국경을 취재했다. 모두 ‘안타키아’에서 차량으로 1~2시간이내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난민촌은 지난해 4월 들어선 후 난민 수가 꾸준히 늘어 현재는 2만 여명이 생활 하고 있다.
난민들은 내전을 피해 가족단위로 온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시리아 반정부 세력인 ‘자유시리아’ 소속 군인들도 포함되어 있다.
터키정부는 난민들에게 1인당 100리라 우리 돈으로 7만5천원 상당을 지원하고 있다.

‘안타키아’ 주민들 중 상당수는 국경에서 40Km거리에 있는 시리아 제2의 경제도시 알레포나 시리아 북부지역에 친인척을 두고 있어 난민들에게 무척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난민들의 각종범죄가 늘어나고, 이슬람 종파갈등까지 번져 사회적 갈등이 심각하다.(알라위파는 아사드정권편을, 수니파는 반군과 난민을 옹호)

취재를 간 어떤 동네에서는, 시리아난민에게 집을 세놓은 주인이 이웃 주민들에게 폭행당했고,  코디 ‘오잔’이 집 앞 공원에서 아사드를 지지한다고 말했다가, 수니파청년들과 주먹다짐할 뻔 한 일도 있었다. 또 자유시리아군이 전투 동영상을 제공한다고 해 만났는데 자유시리아군이
같이간 ‘오잔’ 친구에게 악수를 청하자 자기는 Communist고 ‘아사드’를 좋아하기 때문에 당신과 악수할 수 없다고 말해 우리를 당황케 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난민들은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외출도 할 수 있고 어린이들은 코란을 옆구리에 끼고 학교도 다닌다. 찢어진 텐트사이로 낮선 이방인을 신기한 듯 바라보는 어린이들의 눈 에서는 전쟁의 참혹함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유독 ‘아파이든’ 난민촌만 분위기가 달랐다. 접근이 통제되어 있고, 여성과 아이들은 찾아볼 수 없다. 시리아 사람들도 신분증검사를 받은 뒤 출입이 가능했다.
그리고 난민촌 가장 높은 곳에 ‘자유시라아’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이곳 사람들은 여기가 ‘자유시리아’군 훈련기지라고 했다)
1달 전에는 터키기자가 이곳을 몰래 촬영하려다 2틀 동안 감금당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이 아닌가?
먼저 자동차로 달리면서 영상을 담고 차안에서 스탠드업까지 마친 후, 취재할 때는 두려움을 모르는 김지선기자가 ‘오잔’ 과 함께 경비에게 다가가 한국에서 온 YTN기자인데 이곳을 취재할 수 있느냐고 취재요청을 했다. 나는 차 안에서 이 모습을 촬영했다.(제발 터키기자처럼 감금 되는 일이 생기지 말기를 바라며....) 다행히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곳 경비
에게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얘기는 ‘아무것도 묻지 말고 당장 떠나라’는 말 뿐 이었다. 그나마 ‘떠나라’는 그 말이라도 우리에겐 얼마나 고마웠던지! (녹취라도 리포트에 담을 수 있으니...)
이렇듯 날마다 살얼음판을 걷듯이 취재하여 10시, 15시중계 24시리포트를 제작해야 하는 압박 감에 아침에 눈을 뜨기가 싫었다.

마지막으로 이번 취재기간동안 최대의 시련, 설사와, 장염....

모처럼 김기자와 밖에서 터키음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식사 전 아이란(터키 요구르트) 를 마셨는데 식사도중 김기자가 ‘선배 배 아프지 않으세요’ 라고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맛있게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아랫배가 살살 아팠다.
그날 새벽 나는 화장실과 침대를 번갈아 다녀야만 했다. 김기자는 나보다 상황이 더 나빴다
다음날 힘들게 취재를 마치고 각자 방에서 방송준비를 하고 있는데 평소에 내방으로 들어올 때 조용히 노크를 2번했는데 갑자기 쾅쾅쾅 문을 두드리며 ‘선배 문 좀 열어주세요’ 라고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큰일이 생긴 것 같아 문을 열어보니 김기자가 배를 움켜잡고 쪼그리고 앉아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배가 칼로 베는 것처럼 너무 아프니 약을 좀 사달라고 내게 쪽지를 내밀었다. (‘약국’과 ‘배가 아프다’는 터키말을 한국발음으로 적어 놓은 메모였다) 다행히 취재기간 우리를 도와준 선교사에게 도움을 청하니 코디‘오잔’을 통해 매실차와 약을 보내줘 조금 진정 됐다. 그런데 문제는 배가아파 허리도 펴지 못하는 상태로 중계방송을 매일2번 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지선’ 그녀가 누구던가? 투철한 기자정신으로 똘똘 뭉친 똑 소리 나는 ‘차도녀’ 다.
중계방송 시간 이 되면 굽었던 허리가 곧게 펴지고 내가 언제 아팠냐는 듯 표정관리를 하며 또박또박 멘트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멘트 ‘터키,시리아국경 안타키아에서 YTN김지선입니다.’ 라는 멘트가 끝난 후 배를 움켜잡고 곧바로 침대에 쓰러진다.
그 이후로, 나는 매일아침 후배의 빠른 회복을 위해 호텔종업원 몰래, 삶은 계란2개와 냅킨에 소금을 가득 뿌려(소금이 적으면 짜증냄) 후배에게 전해 주어야 했다.

YTN 영상취재1부 이승주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