쇄빙선 아라온호의 한계와 희망

by SBS 신동환 posted Apr 16,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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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빙선 아라온호의 한계와 희망

신동환/ SBS 영상취재팀

  아직 활동하고 있다는 눈 덮인 활화산인 멜버른 산과 희고 긴 얼음 협곡, 대륙의 산맥들,  빙하가 지나간 거대한 자리, 조그맣게 자리하고 있는 타국의 기지들. 남극 대륙에서의 취재 마지막 날 헬기를 타고 돌아본 테라노바 베이의 모습이다. 평생 다시보기 힘든 그 풍경들이 아직 눈앞에 선하다.

대한민국의 첫 쇄빙선 아라온 호는 두 가지 목적을 갖고 남극으로의 첫 항해를 했다. 세종기지 이후의 두 번째 남극기지 (실제 남극 대륙기지로는 첫 번째) 건설 후보지 선정과 배의 쇄빙능력 테스트가 그것이다.  극지 취재이다 보니 평소 출장과는 다르게 준비해야 할 품목들이 있었다. 일단 저온에서 취재를 해야 했기에 카메라를 한기로부터 보호할 방한 용품들과 핫 팩 등의 물품이 필요했고 다양한 영상을 위해서 망원렌즈, 와이드렌즈 등을 추가로 준비했다. 게다가 남극 대륙에 상륙했을 때 생길 수 있는 위험한 상황에 대비해 비상식량과 각종 개인 장비들도 필요했다. 취재 복장도 당연히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출발할 당시에는 대륙에서의 취재 가능한 일정과 정확한 기상상황을 알 수 없었고, 현지는 여름이라지만 날씨가 급변한다는 정보 때문에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다.

  배는 인천을 미리 출발했고 우리는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의 리틀턴 항에서 미처 챙기지 못한 물품들을 구입한 후 2-3일 간의 취재를 마치고 아라온 호에 승선했다. 크라이스트처치는 뉴질랜드 남섬에 위치한 항구 도시로 영화 ‘Eight Below'에 나오는 것처럼 남극으로 가는 관문의 하나이다.

1월 12일 출항한 배는 1월 22일 위도 70도 근처에서 러시아 쇄빙선 아카데믹 페도로프호를 만날 때까지 쉼 없이 남쪽으로 향했다. 아라온 호는 길이 120미터 정도의 6000천 톤 급 배라지만 큰 바다의 너울에는 상당히 흔들렸다. 배가 좌우로 흔들리는 롤링과 앞뒤로 흔들리는 피칭 모두 심했다. 멀미로 무척 고생하리라 예상했지만 다행히 무사히 넘어갔다. 임시로 만든 기자실 안에서 큰 짐들은 모두 끈으로 연결해 움직이지 못하게 했고, 책상과 테이블의 바닥에는 마찰력을 키우기 위해 투명 플라스틱을 깔았다. 가장 중요한 카메라가 안전하도록 항상 신경을 써야했다. 그럼에도 물건들이 수시로 떨어지고 굴러다녔다. 음료를 꺼내기 위해 냉장고를 열었다가 내용물이 모두 순식간에 쏟아져 애를 먹은 기억도 있다. 2층 침대에서 잠을 자다가 배의 흔들림 때문에 떨어질 뻔한 경험도 했다. 배가 흔들릴 때는 항상 깊은 잠을 잘 수 없기 때문에 쉽게 잠에서 깰 수 있어서 침대에서 굴러 떨어지는 화(?)를 면했다. 방의 문을 여닫을 때에도 주의가 필요했다. 배가 흔들리는 순간에 큰 힘을 받은 문이 갑자기 닫힐 경우 손이나 발이 문에 껴 다칠 수 있기 때문이다. 온돌방을 사용한 사람들은 배가 흔들릴 때 짐과 함께 방을 가로질러 굴러다닌 경험을 했다. 러시아 쇄빙선을 만날 즈음에는 이미 주변이 얼음으로 가득 찬 바다였기에 배는 더 이상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얼음들이 파도와 너울들을 막아준 덕분이었다. 아라온 호는 아직 스스로 쇄빙을 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첫 대륙 목표지인 케이프 벅스(Cape Burks)에 도착할 때까지는 러시아 쇄빙선 아카데믹 페도로프의 안내를 받아 뒤따라 가기로 했다. 양 측 배에서 인력 교환도 이뤄졌다.

  러시아 쇄빙선에 대한 필요한 취재가 끝나고부터는 남극에서만 볼 수 있는 자연과 생물상에 관한 취재를 했다. 배가 얼음 사이로 나아가는 모습들을 영상에 담기 위해 헬기를 탔고, 배의 갑판에서도 바다를 가득 채운 얼음들과 그 풍경을 영상 취재했다. 점차 펭귄들과 바다표범들이 얼음 위에 한 마리씩 나타남에 따라 그 모습들을 담기 위해 카메라에 망원렌즈를 장착하고 배의 난간 앞에서 이른바 ‘뻗치기’를 했다. 움직이고 있는 배 위에서 망원렌즈로 취재를 하는 일은 침착함과 인내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뻗치기를 하는 동안 배 위로 눈보라가 치고 세찬 바람이 불었지만, 남극이 아닌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새로운 풍경들을 카메라에 그리고 내 눈에 확실히 담았다. 낯설지만 아름다웠다.

  위도 70도 근처에서부터는 해가 지지 않았다. 배는 위도 선을 따라 횡으로 이동하는 일이 많아 그때마다 날짜와 시간을 바꿀 수가 없기에 처음에 사용하던 뉴질랜드 시간을 계속 사용했다. 어차피 항상 밝은 날이었기에 사용에 무리는 없었다. 다만 밤이 없는 날들은 그것을 처음 경험하는 우리들의 생체리듬과 생활패턴을 엉망으로 만들어줬다. 잠을 자는 일이 내게는 무엇보다 어려웠다. 어두운 밤이 그리웠다. 러시아 쇄빙선은 남아공에서 출발했고 그 곳의 시간을 사용했기에 우리와 같은 공간에 있었음에도 우리 배와 밤과 낮이 달랐다.

  1월 24일 마침내 남극대륙 첫 목적지 케이프 벅스에 상륙했다. 연구진은 그곳에서 며칠 머물면서 조사 및 연구활동을 할 계획이었지만 취재진에게는 하루의 상륙만이 허가되었다. 헬기를 타고 순차적으로 대륙에 내렸다. 하루의 기간이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비상식량과 장비를 충분히 챙겼다. 여름이라 그런지 케이프 벅스 곳곳은 메마른 암석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연구원들은 기지를 건설하기 좋은 장소 주위를 돌며 각자 맡은 조사를 벌였다. 근처에 있는 러시아의 루스까야기지에 임시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원거리에 있는 포스트에는 뒤늦게 이글루를 설치했다. 러시아기지와 인근의 담수호, 조사현장들을 취재하기 위해 몇 개의 봉우리를 넘어 내내 걸었다. 날씨가 나쁘지 않았음이 다행이었다. 하지만 꽤 좋던 날씨가 오후가 되면서 변했다. 기온이 급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배와 현지 베이스캠프에서 취재진 철수를 결정했다. 어느 정도 취재를 마치고 아쉽지만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장소인 테라노바 베이를 기대하며 헬기를 이용해 배에 복귀했다. 연구진들의 대륙에서의 생활에 대한 취재는 아쉬웠지만 남위 74도에 위치한 남극 대륙을 직접 밟아 봤음에 의미를 뒀다. 우리 취재진이 직접 대륙에 올라 그 모습을 시청자들에게 전할 수 있었던 것도 뜻 깊은 일이라 생각했다.

  연구원들이 케이프 벅스에서 조사를 진행하는 며칠 동안 배는 쇄빙테스트를 하기 위해 이동했다. 가장 큰 문제는 테스트에 맞는 얼음을 찾는 일이었다. 하지만 계절이 여름이다 보니 작은 얼음들은 모두 녹아버렸고 남아 있는 얼음들은 너무 두껍거나 다른 면에서 적합하지 못했다. 대륙기지 선정을 위한 조사단의 일정과 맞추다보니 쇄빙하기에는 그다지 적절하지 못한 계절을 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적합한 얼음을 찾기 위해 러시아에서 데려온 얼음 전문가들이 투입됐다. 며칠의 탐사 끝에 얼음을 찾았지만 두 번의 테스트는 실패하고 세 번째 테스트를 통과했다.

  케이프 벅스에서의 조사단들이 모두 배로 복귀하고 두 번째 목적지인 테라노바 베이로 향했다. 큰 얼음덩이들 때문에 항해시간은 당초보다 길어졌다. 2월 6일 테라노바 베이 앞바다에 도착했다. 도착 다음 날 상륙할 예정이었지만 현지 날씨가 좋지 않아 일정이 하루 연기됐다. 기상이 계속 안 좋다면 언제까지 기다려야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다음날인 2월 8일 오전에 상황이 좋아져 상륙하기로 했다. 테라노바 베이는 케이프 벅스 보다 조금은 더 남극다운 풍광을 보여줬다. 커다란 빙하가 대륙에서 흘러 내려오고 있었고 너른 공간이 있었고 멀리 활화산도 보였다. 산들 뒤 쪽으로는 거대한 협곡도 자리하고 있었다. 케이프 벅스에서와는 달리 테라노바 베이에는 망원렌즈를 갖고 상륙했다. 기본적인 연구모습과 자연풍광을 취재한 후 망원렌즈를 이용해 대륙에 인접해 있는 얼음덩어리 위에 모여 있는 바다표범들을 취재했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을 한참을 걸었다. 눈 아래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걷는 일 자체가 어려웠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처음 발자국을 내주는 남극 대륙의 눈 위로 걷는 다는 생각에 힘을 냈다. 무사히 바다표범 취재를 마치고 조사활동 베이스캠프로 복귀했다. 다른 조사활동을 취재하려 준비 중이었는데 뒤쪽에 있던 산 위로 눈보라가 넘어오고 있는 모습들이 보였다. 처음에는 그저 산 위쪽에 바람이 좀 세게 분다고 생각했던 것이 상황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었다. 역시 철수가 결정되고 헬기를 이용해 배로 복귀했다. 배에 오르고 한참이 지나자 곧 대륙 쪽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듣던 대로 급변하는 남극의 날씨였다. 위험 요소는 항상 존재하고 있었다. 다음 날까지 기상이 좋지 않아 대륙기지 조사단원들도 접근을 못했다. 시간이 지나고 밝긴 하지만 밤이 되고서야 연구진들이 다시 대륙에 상륙해 못 다한 조사를 마쳤다. 그리고 다음날 마지막으로 헬기취재를 마치고 대륙에서의 일정을 끝냈다. 2월 10일 해가 지지 않는 남극 대륙을 뒤로 하고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항으로 향했다.

  배에서의 송출은 인터넷을 이용했다. 속도는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위도 60도 정도까지는 안정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좋은 화질로 충분한 양의 그림을 보내기는 힘들었지만 현지에서의 소식을 전할 수 있기에 다행이었다. 하지만 위도가 높아질수록 인터넷은 불안정해지더니 70도 근처에서는 완전히 끊겨버렸다. 이후에는 배의 선교에 있던 위성전화를 이용한 이메일에 첨부파일 형식으로 그림을 보내야 했다. 당연히 용량은 아주 작아질 수밖에 없어서 그림의 질과 양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이메일 사용도 독점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언론사들과 공유해야했기에 시간이 부족했고 선교에서 이런 일련의 작업을 하는 것에 대해 매우 비호의적이었던 선장도 설득해야했다.

  이번 남극 행은 대륙에서의 충분하지 못했던 취재 등에 아쉬움이 남지만, 내가 겪었던 그리고 앞으로 경험하게 될 그 어떤 출장보다 많이 기억에 남는 출장이 될 것 같다. 단지 눈으로 봤던 모습들만 해도 그러기에 충분하리라 생각된다. 자연이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움에는 한계가 없는 것 같다. 아라온 호가 생긴 이상 남극 대륙에 가게 될 취재진이 점점 더 많아지겠지만 역시 처음이라는 단어는 그 시간과 공간을 공유한 사람들에게 자부심을 주기엔 충분하다. 이번에 얻은 귀중한 경험이 나뿐만아니라 동행한 모든 사람들의 인생에 훌륭한 자양분이 되리라 확신한다.

※ <미디어아이> 제71호에서 이 기사를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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