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촬영기

by 영상포럼17 posted Feb 24, 2003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No Attached Image

브라질 촬영기

-신영토의 꿈을 좇아...-

이양한/iTV 경인방송 영상제작부


아시아의 끝자락에 매달린 일각의 돌출, 작지만 끝을 모르고 향하는 화살촉 모양으로 반도의 땅 한국은 자리잡고 있다. 그 지리적 생김새와도 같은 한국인의 기상. 극심한 역사의 아픔을 떨치고 꿈을 향해, 행복을 향해 새로운 곳, 더 넓은 땅으로 한국인들은 어김없이 뻗어갔다. 그리고 지금도 그들은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며 살고 있다. 글로벌 21세기를 맞이하며 새로운 개방의 신영토 확장 경쟁이 치열하다. 이 치열한 경쟁 속에 조그마한 반도의 땅덩어리에서 벗어나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하여 밖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과거 그들의 행보를 통해 세계 속에 우리민족의 삶과 이억만리 타향살이의 현장을 담기 위하여 우리 촬영팀은 브라질, 쌍파울루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1999년 10월 22일, 프로그램 담당 백승창PD와 촬영을 맡았던 필자 자신… 단촐히 두 식구만이 멀고도 긴 여정의 동반자였다. 김포공항 출발에서부터 두 사람 힘으로는 버거운 장비와의 힘겨운 싸움이 시작됐다. 22시간… 지구상에서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항공기가 가장 멀리 갈 수 있다는 곳. 그곳이 쌍파울루였다. 장시간의 비행 경험이 많았던 필자로써도 이번 비행만큼은 굉장히 지루하고 피곤하게 느껴졌다. 잠을 청해보지만 약간의 긴장 때문인지 애꿎은 몸만 뒤척인다. 어느덧 쌍파울루에 도착했다. 뒤늦은 오전이었다. 몸이 피곤할 때 느껴지는 금속성의 귀곡성이 멍한 뇌리를 강타했다. 우리를 처음 반겨 준 것은 사람 좋게 생긴 현지 한국인 코디의 환한 미소였다. 포르투갈인들이 브라질을 발견했을 때 처음 마주한 인디언의 기분 좋은 웃음, 그것과도 같았다. ‘그들은 붉은 빛을 띤 채로... 자연환경과 완전히 조화를 이루고 있는 아이들과 나풀대는 검은 머리의 상냥하고 매력적인 젊은 여자였다… 비옥한 땅과 풍부한 강우 그리고 온화한 열대기후…’(포르투갈 연감)

1998년 4월 어름치의 산란과정을 촬영하기 위해 동강으로 출발했다. 물고일주일 내내 이상기후로 비가 내렸는데 우리 촬영팀이 오기 전날 저녁부터 비가 그쳐 이번 촬영팀은 행운이 따르는 것 같다며 사람 좋은 코디는 은연중에 스케쥴 강행을 내비쳤다. 벌써부터 정신력과의 한판이 시작된 것이다. 어느새 우리는 비행기 안에서의 다짐 -도착한 오늘만은 반드시 숙소에서 잠만 잘 것이라는- 은 뒤로한 채 한국산 승합차에 익숙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마음을 굳게 먹어도 봤지만 눈꺼풀은 이미 감겨 졌고 어느새 잠에 빠졌다. “다 왔어요”라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 주섬주섬 장비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쌍파울루 외곽의 드라이브 샷을 빼먹은 내 자신을 힐책하며 재 브라질 한국학교 교장선생님과 교직원들께 인사를 드렸다. 한국학교의 수업은 주말수업제로 이루어진다. 더군다나 지금은 방학중이었다. 하지만 우리 촬영팀을 위하여 학생들이 기꺼이 등교하여 주었고, 나 자신도 그들의 성의에 답하기라도 하듯 열심히 촬영에 임했다. 웅장한 건물과 구조물 그리고 넓은 운동장. 역시 한국인들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교육열에서도 뛰어났다. 브라질 땅에서도 다름이 없다. 2세에 대한 기대와 희망 그리고 그 열정이 마치 못 배운 자신들의 한과도 같았고 그들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오기 같기도 했다. 그 교육열은 브라질 현지의 원주민들에게도 자극이 되었고, 그곳의 원주민 자녀들도 한국인 학교에 입학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이국의 땅에서 근면 하나만으로 버텨온 한인들. 그 후예들은 건강했다. 교육받지 못한 이민족, 그들의 정착이 힘겨웠던 것만큼 한인학교는 더 각별한 의미로 기억된다.

다음 날 일찍 우리는 한인들이 가장 많이 종사하고 있다는 의류업에 관한 촬영을 위해 쌍파울루 시내의 봉해찌로(Bom Reitro) 한인 상가 지역으로 향했다. 그 번화한 도심내의 상가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한인들은 그 명성에 걸맞게 상점 간판을 한국말과 포르투갈말로 장식해 놓았고, 그것들은 끝없이 도로를 따라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브라질 내의 의류상가의 70% 이상을 한인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말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나라 산업의 특정 분야에서 한 소수 이민계가 70% 이상을 장악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1960년대 박정희 군사정권시절 농업정책 이민의 일환으로 이곳에 온 농업이민 1세대들이 어떻게 30여년 내에 이러한 엄청난 변화를 이룰 수 있었을까? 그 이유를 현지에 있던 이민 1세대, 지금은 아들에게 의류상가를 물려 준 한 할머니에게서 그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30여년 전 부산에서 배를 타고 한 달 남짓 항해를 한 끝에 처음 발을 내디딘 곳은 싼토스항이었다. 그곳에서 다시 최종 목적지인 싼타마리아 농장으로 옮겨졌고 대농의 부호를 꿈꾸며 희망에 부풀어 있던 그들은 현지에 도착해서 쓰디쓴 좌절을 맛봐야 했고 혹독한 시련을 치르게 된다. 온갖 풍토병과 말라리아 등으로 커다란 희생을 치르며 그들은 무조건 쌍파울루로 향했고, 걸어서 도착한 그곳 쌍파울루에서 당장 민생고를 해결할 방법이 없어 할 수 없이 한국에서 떠나올 때 가져왔던 옷가지를 내다 팔기 시작했다. 점차 원주민들의 호응이 높자 이젠 한국에서 옷을 사다가 값싸고 질 좋은 옷들을 내다 팔기 시작했고, 그것이 밑거름이 되어 브라질 내의 의류산업을 감히 그 어느 이민족도 넘볼 수 없는 핵심산업으로 이루어 놓았던 것이다. 인터뷰 도중 흐르던 할머니의 눈물… 고향에서 고생하시던 평범한 우리네 할머니의 눈물과는 새삼 다른 느낌을 갖게 하였다. 우리는 곧 농업이민 1세대가 처음으로 브라질 땅을 밟았다는 싼토스항으로 이동하였다. 차창 밖으로 광활하고 드넓은 브라질 대륙이 스쳐지나 간다. 우리 나라에서는 느껴볼 수 없는 거대한 풍요로움이다. 이 풍요를 얻기 위함이었을까. 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가 쉽지 않았던 이민족들… 풍요로움 뒤로 다시금 그들의 힘겹게 늙어버린 얼굴이 지나갔다. 붉고 거친 브라질의 이미지에 상반되게 오버랩 되는 영화에서나 봤음직한 지중해풍의 세련되고 고풍스러운 전경, 그 아름다운 싼토스항에서 농업이민 1세대의 입항 흔적을 찾기란 매우 어려웠다. 대신 우리는 싼토스항의 아름다운 시가지를 스케치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백PD의 얼굴이 사색되어 나에게 말을 건넨다. 아까부터 웬 흑인이 우리 일행을 계속 따라다닌다는 것이다.

현지 코디 조차도 놀란 기색이다. 옆에 있는 상가에 들어가 원주민들에게 그 수상한 사람에 대해 얘기를 늘어놓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더 이상은 쫓아오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이곳 브라질을 다녀간 촬영팀들의 분실사건이 잦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던 터라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쫓기듯 장비를 챙기고 다시 쌍파울루에 있는 숙소로 향했다. 잠시의 두려움으로 인해 도망치듯 떠나왔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다 놀란다는 속담이 생각난다. 우리는 이후 며칠을 쌍파울루 근교의 원주민과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커피농장을 스케치하고, 농업이민 1세대 한국인이 아직도 경작한다는 커피농장을 찾아서 브라질인들이 가장 살고 싶어한다는 도시 론드리나(Rondrina)로 출발했다.


론드리나의 날씨는 작렬하는 태양 아래 습도까지 높아 숨이 막힐 듯 했다. 반가운 마음으로 마중까지 나오신 농업이민 1세대인 송흥채 할아버지를 따라 따뜻한 점심을 대접받은 후 차를 타고 커피농장으로 이동했다. 1시간 남짓을 달렸을까, 눈앞엔 나지막한 둔덕과 그 옆에 끝없이 펼쳐진 평야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곳은 온통 커피나무 숲이었다. 늙은 노부부와 원주민 일꾼 몇 명만의 일손으로 꾸려나가 진다는 것이 믿을 수가 없었다. 1차, 2차, 3차… 계속되는 이민… 그들이 접했던 것은 판잣집 수용소였고 농장이라 해도 그것은 불모지 폐허의 땅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그러한 말과 비교한다면 지금은 이곳은 천국이었다. 잘 정돈된 가지런하고 즐비하게 들어선 커피나무숲, 비옥해 보이는 붉은 토양. 이러한 모든 것들을 지금은 주름이 깊게 패인 노부부가 만들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을 흘렸을까? 촬영을 하기 시작했다. 농장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스케치하고 있는데 오늘 여정의 호사다마. 갑자기 카메라 경고램프가 깜박이며 들어오기 시작했다. 무슨 이유일까. 나를 몹시 불안하게 한다. 카메라가 몹시 뜨거워져 있었다. DVW-700 디지털 카메라인데 기후에 무척 민감하다는 얘기가 머리에 스쳐지나 갔다. 농장의 뜨거운 직사광선과 복사열 때문인 듯 했다. 잠시 나와 카메라는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잠시 후 다시 촬영을 재개하였고 몇 번인가 경고표시가 반복되더니 잠잠해 졌다. 다행이었다. 만약 카메라에 계속적으로 이상이 생겨 촬영을 할 수 없었다면… 아찔하다. 생각하기도 싫다. 다시 싼타마리아의 커피농장으로 이동. 다시 론드리나로 또 다시 쌍파울루로. 이동도 잦고 촬영해야 할 분량도 많았다. 반복되는 빡빡한 일정이 서서히 내 마음속에 잠자고 있던 매너리즘을 자극하기 시작한다. 촬영조수가 있었다면 정신적인 여유가 조금이라도 있었으리라. 버거운 장비의 이동, 촬영을 위한 세팅 등의 소소한 일들이 부담이었고, 촬영 중에 간간이 장비가 모두 제자리에 있는지 분실에 대한 우려로 몇 번씩 뒤돌아보며 오직 나 자신만이 믿을 수 있다는 강박관념에 스스로를 제어할 힘마저 잃게 한다. 담당 PD는 촬영현장에 도착하면 관계자들과 미팅하느라 미처 장비이동을 도와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그러한 일들을 혼자서 해결해야 하는데 너무 벅찬 것만은 사실이다. 해외촬영 중에는 특히 불협화음이 생길 소지가 많다.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로 하는 것이 너무나 많다. 입안에선 세치도 안 되는 혀가 독사처럼 날름거리며 치명적인 독을 내뿜으려 하고 원망의 눈빛으로 동행했던 이들의 얼굴을 쳐다본다. … 그들 역시 너무나 지친 표정이다. 그도 그럴 것이 기후 탓에 벅찬 작업량까지. 식은땀까지 흘리며 피곤해 하던 어젯밤 백PD의 안쓰러운 얼굴이 생각나 미안한 웃음을 진다. 잠시의 이기적인 생각을 자책하며 이내 뿜었던 독을 스스로 삼켜버리고 이 모든 일은 그 누구도 해 줄 수 없는 나의 일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달랜다. 내 스스로 편협한 마음을 털어 내며 다시 그들에게 미소를 건넨다. 차라리 위안과 격려의 말로 따뜻하게 대해 주었더라면 하는 후회와 함께. 어언 3주간의 브라질 촬영 중에 필자는 이민 1세대의 한이 어린 뜨거운 눈물도 보았고, 성공한 이민 2세대의 넉넉함도 느낄 수 있었으며, 희망에 찬 이민 3세대의 또렷한 눈망울도 보았다. 이들의 삶이 여유롭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자신의 노력과 브라질 특유의 포용, 많은 인종간의 혼혈로 인한 차별 없는 인종적인 관용 덕이라 할 수 있다. 2억의 인구, 포르투갈계, 이탈리아계, 독일계, 아프리카계, 일본계등의 동양인들로 구성된 그들의 인종분포처럼 다양한 문화. 원주민의 민족성을 그대로 이은 듯 밝은 미소와 친절한 사람들. 많은 해외촬영을 해보았지만 브라질이라는 이 나라만큼 정감 넘치는 곳은 없었던 것 같다.


이제 브라질 촬영을 접고 쌍파울루로 다시 향한다. 다음 목적지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아르헨티나 촬영을 위해 출발이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또 어떤 역사를 만나 그들을 이해하고 우리 민족의 어떤 모습을 만나게 될까. 브라질의 힘겨운 이민사는 비단 그곳만의 것이 아니었다. 당시 이민 대상국들이 겪었던 어려움을 현재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극복을 했을까하는 궁금증이 피곤한 필자의 촬영을 흥미롭게 한 것도 사실이다. 어느 곳에 있건 어떤 상황에 처하건, 끝내 살아남고야 마는 한국인 특유의 근면성, 동포들이 보여주는 그 근면성은 늘 우리를 자랑스럽게 한다. 그러나 이들의 자랑스러운 삶을 아무리 강조해도 이들이 겪은 상처를 다 씻어줄 수는 없을 것이다. 화려한 농업이민을 꿈꾸며 고국을 떠나왔던 이들, 이들의 사라진 꿈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을까.

슬픔은 끝을 모른다...

행복. 그래!!!

가난한 이들의 행복은

카니발의 거대한 환상

사람들은 일년 내내 일을 한다.

이 짧은 순간의 환상을 위하여

그들은 환상 속에서

왕이 되고 해적이 되고 정원사가 되고...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수요일에 끝이 나게 된다.

아직도 필자의 집에서는 브라질 커피의 은은한 향이 풍긴다. 그 향기만큼 브라질 촬영은 오래 기억에 남아 있다. 붉은 빛 광활한 대지, 커피나무 숲… 뮬라토 여인을 찬양하는 이 시에서 필자는 아이러닉하게도 그들의 고통과 아픔의 역사를 느낀다. 아름다운 영토와 인종적인 민주주의 뒤에는 그들의 힘겨운 삶이 숨쉬고 있다. 어쩌면 우리의 정서와도 같은 그들 속에서 오늘도 우리 민족은 힘차게 내일을 준비한다. 환상뿐일지도 모르지만 지금 그들에게는 삶을 지탱하는 큰 힘이 될 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우리의 기상을 자랑하듯 열심히 살아가는 그들을 다시 한번 기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