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2003” 취재기/그곳에 “북한 가려면...

by 이재영 posted Jul 15,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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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영 기자는 2003년 2월 17일부터 25일까지 "남북공동 일제 강제징용에 대한 전시회와 세미나" 취재차 중국의 북경을 거쳐 평양을 다녀왔다. 취재기는 젊은(?)기자가 바라 본 또 다른 북녘의 모습을 흥미있게 적어가고 있다.



르포 2003” 취재기/그곳에 “북한 가려면...

그곳에 가려면...

“♬♬ 서울에서 평양까지 택시요금 이 만원. 소련도 가고 달나라도 가고 못 가는 곳 없는데.....” 대학생 때 이 노래를 즐겨 부른 기억이 있다. 그런데 나는 평양은커녕 중국 비자 만드는데 벌써 이 만원을 다 써버렸으니 이거 뭔가 문제도 한참 문제다.
평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육로, 직항로등 몇 가지 방법이 있지만 흔히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는 노선이 중국을 경유하는 방법이다. 보통 하루 전에 중국에서 1박하면서, 주중 북한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아 다음날 고려항공을 타고 평양에 들어가게 된다. 중국비자는 나중에 평양에서 나올 때도 중국을 통해야 하기 때문에 -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고려항공과 중국공항은 연계가 되어있지 않아서 공항 내에서 TRANSIT이 안됨 - 꼭 복수비자를 받아야한다. 중국은 (내가 알기론) 취재비자 받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공항에서 ENG카메라를 갖고 나가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설령 무사히 공항을 빠져 나간다 하더라도 나중에 또 갖고 나갈 것을 생각하면 애초에 공항에서 신고를 하는 편이 낫다.
내가 들어간 곳은 북경공항이었는데, 1층 도착하는 곳 가운데쯤에 보면 “신보”라고 써있는 곳에 가서 내가 이러이러한 장비를 들고 왔다고 신고하면 된다. 중국공항 직원들은 대부분 영어가 잘 안되기 때문에 중국말이 안되면 손짓 발짓을 동원해야 한다. 카메라와 부수 장비를 서울에서 준비해간 장비 리스트와 함께 넘겨 주면 그쪽에서 뭔가를 열심히 써서 얇은 종이한장을 찢어서 준다. 나중에 2층 출발하는 곳 가운데쯤 가면 비슷한 곳(중국인들이 세관신고하는곳)이 있는데 그곳에서 받았던 종이를 건네주면 직접 갖다준다.

주중 북조선대사관에 가면 비자를 만들어주는데 다른 나라와 달리 비자를 여권에 직접 찍어주는게 아니라 따로 사증을 한 장 만들어준다. 때문에 잃어버리기가 쉬워서 특별히 관리를 잘해야한다. 그 사증은 나중에 평양을 떠날 때 북쪽에서 가지기 때문에 결국 내여권에는 북쪽에 갖다온 흔적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

그곳에 가면...

배단물 한잔 마시고 잠시 눈을 부쳤다 떼니 고려항공은 이미 북쪽상공을 낮게 날고있었다.
“평양공항” 멀리 보이는 김일성 주석의 사진아래 드디어 나는 평양에 난생 처음 첫발을 디뎠다. 이렇게 쉬운 것을, 이까짓 별것도 아닌 것을... 뭐가 그리도 힘들고, 뭐가 그렇게 어려웠는지...

평양은 생각보다 활기가 넘쳤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로 넘쳤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웃는 얼굴로 나를 반겼다. 상점 판매원동무들은 남쪽의 백화점직원들보다 더더욱 매상 올리기에(환율을 현실화한 작년 경제개혁이후로 성과급제도 또한 도입했다 한다.) 열심이었고, 식당 의례원 동무들은 우리의 짓궂은 농담에도 수줍게 웃으면서 받아넘겼다. 거리의 아이들은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남쪽아이들과 다르게, 바위며 풀밭이며 할 것 없이 개구지게 놀고있었다. 하지만 최근 어려워진 전력상황때문인지 밤이 되면 도시는 적막에 빠졌다. 가로등하나 안 켜져 깜깜한 인도위로 뜨문뜨문 사람들이 무언가 한 짐씩 지고 들고 소리 없이 걸어다녔다.

음식은 대체로 정갈하고 담백했다. 특히 김치는 한 공장에서 만드는 것이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로 식당마다 비슷했다. 한겨울에 냉면을 네끼 연속으로 먹고 거기에 얼음 보숭이(요즘엔 에스키모라고도 한다)를 디저트로 먹으니 아무리 옥류관냉면 이라고 해도 고개가 절로 흔들어질 수밖에... 나중엔 다들 온반으로 메뉴를 바꾸었다. 묘향산의 칠색송어, 대동강의 숭어, 개성의 십첩반상, 평양의 단고기정식, 털게요리등등 맛난 음식들은 많았으나 먹을 때까지 뜨거움을 유지시켜주지 못하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었다.

평양에서 남북공동 일제 강제징용에 대한 전시회와 세미나가 있었다. 애초에 그 행사때문에 북쪽에 왔던지라 송출을 해야했다. 송출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위성청약을 해야하는데 Intelpax로부터 확정서가 도착해야 한다. PAL카메라를 휴대하고 갔기에 편집기 사용여부를 계속 타진했고, 잠깐은 사용해도 좋다는 말을 전해듣고는 위성시간을 10분간만 잡았다. 6시에 송출시간을 잡아놓고, 오디오 2개와 밑그림을 송출해줘야 했다. 그런데 데스크를 보고 스탠딩을 하고 조선중앙TV에 도착한 시간이 5시 40분이었다.
“내가 평양까지 와서 초치기를 해야하다니(투덜투덜)...” 겨우겨우 오디오편집 2개를 하고 나니 6시, 바로 송출, 오디오2개 4분, 밑그림 겨우겨우 6분...그나마 조선중앙TV에는 남쪽으로 바로 국제전화를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더군다나 눈에 불을 켜고 “저 그림은 빼라우”를 외치는 안내원 동무의 방해공작을 조선중앙TV에서 근무하는 리광철 동무가 “그림 고를 시간이 없어, 그냥 보내게 하라우”하며 겨우겨우 막아주는 덕분에 무사히 송출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어찌나 고맙던지... 조선중앙TV에 내야하는 송출료는 1분에 40달러, 10분에 400달러였다. 편집기 사용료는 받지 않는걸 보니 역시 한민족은 한민족인가보다.

그 날 저녁에 손가락이 탈골됐다. 손가락이 빠진 사연이야 기구하나 여기서는 열심히 일하다가 다친 걸로 넘어가기로 하고, 어쨌거나 처음으로 전혀 교육받지 않은 북쪽사람들을 병원에서 만나게 되었다. 밤 10시쯤이라서 그랬는지 외래환자는 전혀 없었고, 응급실도 없어 보였다. 병원에 도착해서 뢴크겐사진(우리말로 X-Ray)을 찍는 데까지 1시간이 걸렸다. 뢴트겐 기사를 집으로 부르러갔으니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말만 들으면서... 어쨌든 환자 1명에 모인 의사가 5명, 간호사가 2명, 이렇게 황송할 데가...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아서 치료는 금방 끝났지만, 그 후가 더 유쾌했다. 김창학 외과과장은 치료비가 너무 비싸게 나와서(나는 그곳에서 외국인적용대상 치료비로 40유로를 냈다.) 어떻게든 깍아줄려고 내앞에서 고민하고 있었고, 담당의는 환자기록부 국적란에 어떻게 써야될지 몰라 고민 고민하다 결국 조심스럽게 “남조선이라고 적으면 되갔지요?”라고 물었으며, 간호사는 혈압을 재고 올라간 내셔츠를 조심스럽게 내려주고 심지어 단추까지 채워주고 있었다. 어쨌든 평양친선병원 개원이래 환자기록부에 이름을 올린 첫 남쪽사람이라하니 이일을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개성은 평양보다 한층 더 인간적인 도시였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우리 나라 1970년대 말에서 딱 멈춰버린듯했다. 하지만 문화재는 아무래도 사람 손이 덜타서 그런지 원형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송악산을 보았다. 날씨 좋은날 남산에 오르면 개성 송악산이 보인다. 나도 2번 정도 촬영한 기억이 나는데 바로 그 송악산이 눈앞에서 펼쳐지니 감개가 무량... 송악산은 여인네가 누운 모습같이 선이 참 고왔다. 앞으로 개성공단이 들어설 자리에 가보니 그곳에서 판문점이 불과 4Km이었다. 개성에서는 날 좋은 밤이면 일산 신도시의 불빛이 한눈에 들어온다고 한다. 또다시 북경공항을 경유해서 가느니 그냥 이대로 이길 따라 버스 타고 집에 가고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그곳에서 나오며>

떠나는 날 아침엔 안개가 심했다.
보통강변의 나뭇가지들은 하얀 서리꽃을 피웠고, 그 아래 봇짐을 지고 걷는 이는 내누이 같았다. 모든 것이 똑같았고,,, 모든 이가 똑같았다...

“그곳엔 사람이 살고있었다...”

자료출처: http://www.sbsnewstech.co.kr/kor/k-main.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