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르겐 힌츠페터 기자를 도운 파울 슈나이스 목사

by TVNEWS posted Nov 04,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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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18 광주 민주항쟁>의 진상을 카메라에 담아 전 세계에 알린 당시 독일 제1공영방송사(ARD)의 도쿄 특파원, 위르겐 힌츠페터(2016년 1월 사망). 힌츠페터에게 광주의 소식을 처음 알린 사람은 당시 일본에서 동아시아 선교사로 활동한 독일인 파울 슈나이스(Paul Schneiss) 목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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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슈나이스 목사 / 사진= 한원상

 

 

필자는 일본에서 재일 한국인 인권문제와 한국 민주화운동에 관여한 가와사키 재일한국인교회 이인하 목사(2008년 사망)의 소개로 슈나이스 목사를 알게 됐다. 슈나이스 목사가 2003년 7월 ‘기독자 민주동지회 70∼80년대 해외활동 기자회견’ 참석차 서울을 방문했을 때  만났고, 이후 지금까지도 종종 연락을 하고 있다.

 

슈나이스 목사는 1958년 동아시아 선교사로 일본으로 파견돼 활동했다. 1970년대부터는 유신독재의 시작과 김대중 납치사건 등으로 정치 억압과 인권 탄압에 투쟁하는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KNCC)의 민주화운동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슈나이스 목사는 일본 여성과 결혼해 세 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다. 당시 독일인은 비자 없이 한국을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어서 그는  한국내 민주화운동 인사들, 해외에 체류하고 있는 한국 민주화운동 인사들 사이에서 정보 전달자 역할을 했다. 또 그는 한국 교회의 민주화와 인권운동을 독일 교회와 세계 교회에 알리고 지원하는 일도 했다.

 

1970년대부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의 민주화운동은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WCC)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 에큐메니컬 운동의 지원을 받았다. 독일, 영국, 스웨덴, 네덜란드, 미국, 캐나다, 일본의 교회도 한국교회의 인권운동을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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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7월, ‘기독자 민주동지회 70∼80년대 해외활동 기자회견’에 참석한 파울 슈나이스 목사(오른쪽에서 두 번째) / 사진=한원상

 

 

이들은 ‘한국민주화기독자동지회’(이하 민주동지회)를 결성해 한국 민주화운동에 중점을 두고 해외 운동세력과 연대해 ‘게릴라’식을 전개해 운동했다. 이들은 일본과 미국의 국회, 행정부, 언론기관, 교회기관, 각 사회단체들에게 구체적인 자료를 제공했다. 그리고 한국 민주화를 위한 협력을 요청하고 세계적으로 민주동지회를 확대해 나갔다.

 

일본에서는 1974년 1월에 민주화 투쟁에 나선 한국 기독인들을 후원하는 ‘한국문제 기독자 긴급회의’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슈나이스 목사도 이러한 조직에서 활동했다. 그는 국내외 네트워크를 이용해 한국에 들어와서 위장술을 써가며 카메라로 찍은 사진과 자료를 일본에 가져갔다. 그리고 그는 그동안 일본에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온 일본 주재 독일 특파원과 외국 특파원을 만나 정보를 제공하고 한국의 엄혹한 군사통치와 민주화 투쟁의 실상을 전 세계에 알리는 한편, 일본을 거점으로 국제적인 연대운동에 힘써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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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의 시사월간지 세카이(世界). 사진=한원상

 

 

특히 슈나이스 목사는 당시 지명관 도쿄여자 대학 교수(훗날 한림대학 석좌교수 역임)에게 한국에서 가져온 자료를 전달하고 지 교수의 집필을 돕기도 했다. 지 교수는 1970년대부터 일본에 체류하면서 일본의 시사월간지 세카이(世界)에 'TK생'이라는 필명으로 매월 한국정세와 민주화 투쟁을 알리는 '한국으로부터의 통신'(1972년 11월부터 1988년 3월까지)을 15년여 간 연재했다. TK생은 철저하게 비밀에 가려져 있다가 2003년 7월 그 정체가 지명관 교수라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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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7월, 지명관 전 한림대 교수가 일본의 시사월간지 세카이(世界)에 'TK생'이 자신이라고 필자에게 밝혔다. / 사진=한원상

 

 

필자는 2001년부터 국내와 일본을 오가면서 당시 TK생을 도왔던 사람들을 만나 취재했다. 2003년 7월 YTN에서 <TK생은 말한다>를 방송해 베일에 가려져 있던 TK생이 지명관 교수라는 것을 밝혔다.

 

지명관 교수가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에 연재할 수 있었던 것은 슈나이스 목사와 그의 가족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국을 넘나들면서 성명서, 유인물, 재판 기록, 구속자 가족회 편지, 음성 녹음 등의 자료를 과자 상자와 몸속 등에 숨겨서 일본으로 가져갔다.

 

슈나이스 목사는 한국의 정보 당국으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찍혀 추궁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 한국 정보 당국 요원들에게 “한국을 방문하기 싫지만 독일에서 자꾸 선교사로 가라고 해서 왔다” 고 변명했다. 

 

한국 정보 당국은 그를 조사했지만 아무런 혐의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만큼 슈나이스 목사는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서 한국을 방문했다. 그 과정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의 도움이 컸다.

 

하지만 결국 한국 정부는 1978년 12월 그를 홍콩으로 강제 출국시키고 입국 금지시켰다.

 

그는 거기서 그만두지 않았다. 부인인 기요코 여사가 한국을 오가며 슈나이스 목사의 역할을 대신했다. 이후에는 자녀들까지 나서서 서울과 도쿄를 200회 이상 오가며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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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슈나이스 목사와 부인 기요코 여사 / 사진= 한원상

 


1980년 5월 광주 민주항쟁 당시, 서울에 있던 부인 기요코 여사가 직접 목격한 군부대 이동 소식을 일본에 있는 슈나이스 목사에게 전했고, 이 소식을 들은 슈나이스 목사는 당시 도쿄 특파원이던 독일 기자 힌츠페터에게 전했다. 한국 상황을 전해 들은 힌츠페터는 이후 광주를 직접 찾아 광주민주항쟁의 학살을 취재해 전 세계에 보도했다.

 

당시 <5⋅18 광주 민주항쟁>에서 수많은 시민이 희생되었으나 국내 언론은 신군부의 언론 검열 강화 등의 조치로 자유롭게 보도할 수 없었다.

 

슈나이스 목사는 당시 독일 국영방송 도쿄 특파원이던 힌즈페터 기자를 광주로 파견해 한국의 군사정권의 만행을 생생하게 취재해 <5⋅18 광주 민주항쟁>을 보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5⋅18 광주 민주항쟁>은 1987년 6월 항쟁에 많은 영향을 미쳐 한국의 민주화를 앞당기는데 원동력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진 한원상

한원상 / Y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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