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 평양공연 지켜지지 않은 합의서

by TVNEWS posted Apr 0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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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 평양공연 지켜지지 않은 합의서 



1달러짜리 커피의 맛

2005818일 오후 255, ‘조용필공연선발대 69명이 드디어 평양 땅을 밟았다. 평양 순안비행장에는 이미 가을을 재촉하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선발대는 서둘러 숙고인 고려호텔로 달려갔다. 공연 팀은 공연 팀 대로, 생방송 제작 팀은 생방송 제작 팀 대로 마음이 급했다. 일년간 준비해 온 공연이지만, 남북관련 사업이 의례히 그렇듯이 일정이 빡빡했다. 완벽히 준비하지 않으면 어디서 사고가 터질지 알 수 없었다.

우리보다 먼저 도착하기로 되어있던 화물선이 선적이 늦어져 19일 새벽에나 남포항에 도착한다고 연락이 왔다. 게다가 하역작업 마저 늦어져 장비가 언제 공연장에 도착할지도 알 수 없었다. 남포항에 크레인이 갖춰지지 않아서 장비를 일일이 밧줄로 묶어서 내리는 중이라고 했다. 무대설치에 필요한 최소 시간이 적어도 72시간인데, 장비하역과 수송상황에 따라서 공연에 심각한 지장을 받을 수도 있었다. 일년이 넘은 준비기간이 무색했다. 마치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남북관계를 보는 것 같았다.


20일 새벽 1, 장비가 곧 정주영체육관에 도착할 것이라는 전갈이 왔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선발대는 곧바로 류경정주영체육관으로 달려갔다. 공사가 중단된 채 처연히 써 있던 103층 류경호텔이, 달 빛 아래에서는 마치 평양을 지키는 수호신 마냥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체육관 사무실 한 쪽에서는 우리보다 한 발 앞서 나온 여직원들이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분주히 움직였다. 남한 손님들에게 팔려는 커피를 끓이는 중이었다. 한 잔에 1달러짜리 커피! 우리는 돈벌이에 눈을 뜬 평양시민들의 모습을 기꺼워하며, 평소 빈속에는 잘 마시지 않던 새벽커피를 사 마셨다. 속은 좀 쓰렸으나 수요공급의 원칙에 따라 시장이 형성된 남북경제협력의 작은 현장을 확인한 셈이다.


기다림에 지친 대부분의 사람들이 긴 하품을 하며 졸음을 좇을 즈음, 엄청난 굉음이 평양 하늘에 울려 퍼졌다. 공연장비를 실은 40대의 트럭과 방송차량이 줄지어 체육관 마당으로 들어왔다. 짐칸에 실은 장비들이 힘에 부쳐 트럭이 내려앉을 지경이었다. 어떤 짐은 조금 더 달리면 뒤로 빠져버릴 듯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다. 물질적 한계 속에서도 고난의 행군정신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는 북한의 생존방식을 보는 것 같았다. 통관시간 단축을 위해 남포항에 있어야 할 세관이 정주영체육관 후문 앞에 임시로 차려졌다. 북한세관측의 신속한 작업으로 세관검사는 2시간 만에 끝이 났다. 하지만 결국 전자오르간 한 대가 운송과정에서 고장 났고, 하역 장비가 없어서 밧줄에 묶여 배에서 내려졌던 4억짜리 중계차는 운전석 양옆 부분이 찌그러졌다.


쉴 틈도 없이 곧바로 무대 설치작업이 시작되었다. 조용필 도착시간까지 58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 무대 설치팀은 수면시간을 반으로 줄이고 도시락을 먹으며 작업에 매달렸다. 북한 인력을 20명 지원받았다. 한 사람당 하루 일당을 150달러 요구했으나 결국 30달러로 합의했다. 길이가 총 170m나 되는 공연 무대는 체육관의 폭에 맞춰 60m로 압축했다. 류경정주영체육관은 모두 7,000명의 관객이 관람할 수 있는 공연장으로 탈바꿈되고 있었다.

 

세부합의서 11

공연진과는 별도로 8시 종합뉴스, 출발 모닝와이드, 세븐데이즈, TV연예, 한수진의 선데이클릭 등을 방송하기 위해 취재진이 7팀 동행했다. 취재를 협조하기로 한 북한측과 합의내용에 따른 것이었다. 당장 19일 저녁 8시 뉴스가 편성되어 있어서 북한측과 협의가 필요했다. 북한측 파트너인 민화협의 리00부장을 찾았다. 리부장은 부하직원을 통해서 우리의 취재 요구사항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면, 일정을 잡아 답을 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조용필 가요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평가’, ‘북 측의 어려운 전력사정’, ‘7.1경제개혁개선조치 이후 나타난 북한의 변화모습-도매시장, 야외매대’, ‘핸드폰 사용현황’, ‘용천역 폭발사고 복구현장등의 섭외를 요구했다.

다음날 이른 아침식사를 하고 취재진이 모두 로비에 대기했다. 민화협 참사 두 사람이 취재일정표를 들고 왔다. 첫 날은 만경대 김일성 주석 생가, 주체사상탑, 개선문 등이었고, 20일에는 김정숙탁아소, 평양지하철, 고려호텔 안에 있는 수영장과 이용원, 21일은 만경대유희장, 대동강변, 백화점, 조선중앙TV 등에 가는 것으로 잡혀있었다. 우리가 요구한 20여 곳 가운데 조선중앙TV’만 들어가 있고, 나머지는 이른바 체제 선전용이거나, 매우 무성의한 아이템 이었다.


우리는 지금 북에서 제시한 장소는 남한에 이미 여러 번 소개되었으므로, 이번에는 우리가 요구한 내용을 취재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아울러 북한체제를 비난하거나 정치적인 문제를 제기할 의사가 없으며, 평양의 어려운 전력 사정을 취재하는 것은 북한의 에너지난을 남한에 알려 남한 측의 지원을 끌어내보자는 의도가 있음을 충실히 설명했다. 그러나 안내원들은 오늘 예정된 장소는 이미 섭외가 된 곳이어서 바꿀 수 없으니 일단 출발하자고 재촉했다. 우리의 의사를 지휘부에 전달한 뒤 오후 일정부터 바꾸겠다고 했다. 고민하던 우리는 이들 안내를 맡은 참사들의 체면을 세워주어야 다음 취재가 원활할 것으로 판단하고 일단 오전 일정은 북 측의 요구대로 움직였다.


그런데 처음 방문지인 만경대에서부터 갈등이 빚어졌다. 만경대 김일성 주석 생가(고향집)에서 만경대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에 기념품 매대가 있었다. 기자 한 사람이 수를 놓은 손수건을 고르다가 판매원에게 물건을 많이 팔면 많이 판만큼 월급을 더 받느냐?’는 질문을 했다. 그러자 안내원이 계획서에 없던 질문이라며 카메라를 막았다. 우리는 강하게 항의를 하다가 안내원의 곤란해 하는 표정을 보고는 더 이상 승강이를 하지 않았다. 민화협 일꾼들에게는 별 재량권이 없다. 첫날부터 피곤하게 싸우기보다는 빨리 호텔로 돌아가 취재 범위를 넓혀도 좋다는 지도부의 지시를 받아내는 것이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만경대를 떠나 주체사상탑, 개선문을 들른 뒤 우리는 서둘러 호텔로 돌아갔다.


호텔 1불고기랭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기다렸지만 소식이 없었다. 오후 230분 쯤 민화협 참사가 와서 오늘은 일정을 변경할 수 없다고 했다. 우리는 원하지 않는 취재를 위해 안내원을 따라 나가지 않겠다고 호텔에서 버텼다. 그리고 합의서를 내보이면서, 이것을 지킬 수 없다면 지금이라도 전체 일정을 다시 협의하자고 요구했다. 합의서 제7조에는 북 측은 공연 기간 중 공연단과 참관단의 활동에 대한 SBS의 취재와 평양 현지 위성생방송을 보장한다고 명시되어있고, 세부합의서 11조에는 보도 및 교양프로 현지 실황 중계방송은 SBS 측의 요구를 존중하되 그 시간 및 회수, 취재대상, 일정 등은 선발대 방문 시에 따로 결정한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곤란한 표정을 지은 참사는 자신은 모르겠으니 지휘부를 찾아가서 따지라고 했다. 나는 곧바로 호텔 5층에 설치된 북한 측 지휘부를 찾아갔다. 그러나 5층 지휘부 입구에는 경비원이 서서 출입을 막았다. 할 이야기가 있으면 2층에 설치된 전화를 이용하라고 했다. 나는 한달음에 2층으로 내려와 전화를 했다. 그러나 리00부장이 자리에 없다는 대답뿐이었다.


민화협측의 의도가 명백해졌다. 애당초 취재진에 대한 배려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세부합의서 작성 때는 선발대가 왔을 때 이야기하자는 식으로 미루었다가, 막상 선발대가 왔을 땐 바쁘다는 핑계로 이리저리 피하며 시간을 끌 심사였다. 어차피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남한으로 돌아가야 한다. 북한 측은 취재활동과 상관없이 조용필공연만 성사시켜주면 비용을 받는 데는 지장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현실을 바탕으로 최선의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간단한 회의를 통해서 우리는 북한측의 의도를 확인한 이상 무리하게 외부아이템을 취재하기 보다는 공연준비와 조용필씨의 동선에 초점을 맞추기로 결정했다. 우리가 커버해야 할 아이템이 급해서 그들만 원망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화약을 모두 수거하겠소!

822일 낮 조용필을 비롯한 참관단들이 평양에 도착했다. 조용필은 짐을 풀자 마자 곧바로 공연장으로 달려왔다. 성실한 북한 근로자들의 도움으로 공연준비는 큰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악단 위대한 탄생과 악기를 세세히 점검하고 난 조용필은 객석 맨 뒤로 올라가 무대를 내려다보았다.조명을 켜자 평양 공연의 무대가 그 실체를 드러냈다. 월드컵경기장 공연 무대를 줄이긴 했지만 야외무대의 화려함과 위용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조용필은 그 자리에 서서 곧바로 리허설을 시작했다. 마이크를 잡은 조용필은 태양의 눈을 시작으로 레퍼토리를 한곡 한곡씩 불렀다. 그런데 밤 9시가 조금 지나자 북한 측이 갑자기 체육관 내 모든 남한 인력의 철수를 요구했다. 자정을 넘겨 연습하려던 조용필 측은 당황했다. 경호상태 점검이 이유였다. 완벽주의자 조용필은 북한 측의 일방적인 결정에 무척 불쾌해했다.


다음날 오전 호텔에서 긴장을 푼 조용필은 이른 점심을 먹고 공연장에서 연습을 시작했다. 오후 1시경 림동옥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을 비롯한 고위 간부들이 나타나 2시간가량 준비상황을 점검했다. 그가 떠난 뒤 갑자기 나타난 북한의 보안 담당자들이 한 낯선 사내의 지휘로 특수효과용 화약을 다 수거해 가버렸다. 이 사내는 선발대가 평양에 도착한 이후부터 공연에 관한 모든 결정을 독단적으로 처리했다. 합의문도, 항의도 속수무책이었다.그는 특수효과용 화약은 공연 도중 불꽃을 내뿜는 재료로서 요인경호의 장애물이라고 했다.

우리는 북한의 고위관리들이 공연장을 둘러보고 화약을 수거해 간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참석 대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실제 김 위원장의 참석여부는 알 수 없지만, 이번 공연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건 사실로 보였다. 류경체육관 관중석 한 중간에는 내부가 보이지 않는 방탄유리로 덮인 VIP 관람석이 있다. 김 위원장이 눈에 띄지 않게 공연장에 나타났다가 공연이 끝나고 소리 없이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돌발 상황은 또 일어났다. 조용필에게 리허설을 한 시간 빨리 끝내 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조용필은 레퍼토리 전체를 불러보지 못하고 오후 3시경 리허설을 중단했다. 그 시간 조선중앙TV의 중계 카메라 6대가 일방적으로 설치되었다. 원래 합의서에는 SBS의 중계 화면을 조선중앙TV에서 받아쓰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SBS것까지 포함해 중계카메라만 열세 대나 설치되어 중계에 적지 않은 지장이 초래되었다.

그런데 생방송 중계는 카메라만 설치된다고 가능한 것은 아니다. 오디오 라인이 따로 연결되어야 한다. 그 오디오와 관련된 모든 라인은 SBS가 관리하고 있었다. 우리는 사전에 협의를 하지 않은 조선중앙방송에 오디오를 공급해 줄 수 없다고 버텼다. 그 순간 얼굴 한 번 보기 힘들었던 리00부장이 다급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오 선생, 나 좀 도와주오. 지금부터 오 선생이 요구하는 모든 내용을 들어주겠소. 취재팀도 새로 조직해 오 선생이 원하는 곳으로 안내하겠소.”

짧은 시간 고민하던 우리는 북한 측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어떤 방식이든 공연 내용을 북한 주민에게 보여주는 것이 행사의 취지이기 때문이었다. 00부장은 그 뒤에도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취재협의는 물론 할 수 없었다.



사진 순안비행장 도착직후 조용필과 인터뷰.jpg


오기현 

전 한국PD연합회장

한국PD연합회 통일특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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