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개성 방문기

by TVNEWS posted Nov 04,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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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9첩반상을 다시 받고 싶다.

오늘처럼 날씨가 화창할 때는 개성 송악산을 볼 수 있다. 

내가 근무하는 목동 SBS 본사 15층에서 북서쪽 지평선 위로 자세히 보면 송악산이 나타난다. 

해발 488m의 높지 않은 산이지만 그 사이 높은 장애물이 없고, 목동에서 직선거리로 60km밖에 되지 않아서 송악산의 아름다운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송악산은 고려의 정궁인 만월대를 품고 있는 개성의 진산이며 임신한 여성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누워있는 형상이다. 북쪽 능선을 따라 10여 km 떨어진 곳에는 유명한 박연폭포가 흘러내리고 있다.


2015년 10월 말 개성을 방문했다. 

아직 개성공단이 폐쇄되기 전이어서 휴전선을 넘어서 출입하는 차량과 인원이 좀 있긴 했지만, 

한창 공단이 가동될 때에 비해서는 훨씬 활력이 떨어졌다. <어린이 의약품 지원본부>라는 NGO 단체 소속인 나는 동료가 직접 모는 차량을 타고, 공단을 지나 개성시내 ‘민속려관’으로 가서 북한 쪽 파트너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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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완벽한 서울 악센트의 개성 민속려관 의례원. 카메라 앞에 서는 걸 부끄러워했다.


1997년 의사, 약사, 치과의사, 한의사 등이 중심이 되어서 결성된 <어린이 의약품 지원본부>는 

매년 어려움을 무릅쓰고 영양부족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북한 어린이들에게 의약품을 공급하고 있다. 

남북이 대치된 긴장 속에서 평양에 ‘만경대 어린이종합병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우리는 북한의 ‘민족화해협의회’ 참사들을 만나 어린이를 위한 의약품과 의료기자재 지원에 대해서 협의했다.


북한 측과 회의는 주로 오전에 끝난다. 북한 측 파트너는 주요한 내용에 대해서는 미리 위선의 지시를 받고 오기 때문에 회의 석상에서는 주로 실무적인 협상만 진행된다. 

모처럼 얼굴을 마주한 우리는 큼직한 백두산 풍경화가 걸린 방에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회의를 서둘러 끝냈다. 

남이나 북이나 아침 일찍 출발해 시장했으므로 일종의 한식 풀 코스 음식인 ‘개성9첩반상’을 주문했다. ‘

개성9첩반상’은 밥, 국, 김치, 장, 찌개, 찜 외에 아홉 가지 반찬을 추가로 내놓는 상차림이다. 

개성 ‘민속려관’의 특산품으로써 개성 명물인 ‘인삼닭곰(삼계탕)’이 따라 나온다. 

임금님의 수라상인 12첩반상 다음으로 격이 높은 상차림으로서 개성관광이 한창일 때는 우리 남한 관광객들이 즐겨 먹었다. 


나전이 조각된 독상(獨床)에 정성스레 차린 음식을 받아 보면 제대로 사람 대접받는 느낌이 난다. 

나는 술을 한 잔도 못한다. 하지만 놋쇠로 된 주전자에 담긴 ‘송악소주’의 풍미는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코끝에 진하게 배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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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풍을 두르고 돗자리가 깔린 온돌방에서 각자 독상으로 9첩반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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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인삼의 이름을 살려 인삼닭곰이 올라오는 개성9첩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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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소주의 진한 향기는 한 번 맡으면 오래도록 그 여운이 남는다.


점심식사 장소인 ‘민속려관’은 개성상인들이 살았던 곳이라고 하는데, 개울을 중심으로 동쪽은 숙박시설이 있고 서쪽은 서점, 연회장이 있다. 

기와집 온돌방에는 12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구수한 나무 냄새가 풍기는 중부지방의 전통한옥에 앉아 있다 보면, 한 일주일은 푹 쉬어가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개성이 38선 이남이었던 덕분에 한옥들이 다행히 미군의 포격으로부터 고스란히 살아남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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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상인이 살던 집이라고 전해오는 개성 민속려관은 한국전쟁의 포격에서도 용케 살아남았다.



개성에 처음 갔을 때부터 나는 편안함을 느꼈다. 

1시간 안에 닿을 수 있다는 물리적 근접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진짜 이유는 다른데 있다. 

개성 사람들은 거의 완벽한 서울말을 쓴다. 서로 대화하다 보면 여기가 서울인지 개성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그런데 정작 자신들은 이 말투가 촌스럽다고 오히려 부끄러워한다.


국제정치에서 ‘buffer zone’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두 세력 사이에 설치된 완충지대이다. 수에즈 운하나 DMZ 같은 곳이다. 

그런데 개성은 ‘buffer zone’ 과는 정반대 개념의 ‘통합지대’이다. 

두 반대세력을 한 곳에 모아서, 증오와 대립을 완화시킬 새로운 통합 의식을 생산하는 창조적 공간이다.


미래 희망의 장소인 개성공단이 폐쇄된 지도 일 년 8개월이 지났다. 연간 7,000억 정도의 생산 가치 상실, 

개성공단지역의 북한 군사시설 재배치로 인한 안보 손실 보다 더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다. 

한반도의 정 중앙에 위치한 개성(開: 열릴 개, 城: 재성)이 남북 모두의 가슴속에 살아 있는 열린 공간이 

아니라 긴장의 전진기지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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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태가 더 아름다운 민속려관 의례원


추석 연휴에 개성이 또다시 뉴스거리가 되었다. 

개성공단을 우리의 허락도 받지 않고 북한 측이 몰래 가동했다는 것이다. 

우리 정부는 불법행위를 중단하라고 요구했고, 북한 측은 자신들의 주권행사이니 상관 말라고 주장한다. 

양측의 언사는 개성공단이 설치되기 훨씬 전의 상태로 되돌아 갔다. 

어여쁜 의례원들이 날라다 주는 9첩반상을 거뜬히 비우고, 민속려관의 뜨뜻한 아랫목에 누워 

통일의 단 꿈을 꿔 보는 것이 이젠 불가능할 것인가?

가을바람에 하늘 낮게 깔리었던 연무가 사라지면서 송악산이 더 또렷이 눈에 들어왔다. 

귀를 기울여보니 박연폭포의 웅장한 물소리가 들이는 듯하다.


오기현 / 전 한국PD연합회장, 한국PD연합회 통일특위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