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걸 도쿄 특파원
1.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의 탈아론(脫亞論)과 고이즈미의 개혁론(개혁론)
" 오늘날 우리나라는 이웃 나라의 문명개화를 기다려 함께 아세아를 부흥시키려하지 말고 아시아를 벗어나 서양 문명국과 진퇴를 함께 해야 한다. 나쁜 벗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함께 악명을 면하기 불가하니 우리들은 마음가짐부터 아세아 동방의 나쁜 벗을 사절(謝絶)해야 할 것이다."
1885년(메이지 18년) 3월16일 시사신보 후쿠자와 유기치
1853년 요코하마에 도착한 당시 미국의 동인도 함대 사령관 페리는 4척의 함선을 거느리고 미국 대통령 필모어의 국서를 제출하고 일본의 개국을 요구한다. 이미 쇠락한 도쿠가와 바쿠후는 전함의 위력에 주눅이 들어 이듬해인 1854년 이른바 미-일 화친조약을 맺고 시모다와 하코다테 항을 개항하고 이어 1858년 미일 통상조약을 맺게 된다.
미-일 화친조약을 조약을 계기로 외부로부터의 개혁을 강요당한 일본은 안으로 존황양이(尊皇攘夷)와 화혼양재(和魂洋才)를 기치로 내걸고 막부 타도와 천황중심의 근대입헌 국가로의 변신을 추구한다. 이 과정에서 후쿠자와 유기치와 니시 아마네, 가토 히로유키,니시무라 시게키 등 이른바 일본의 선각자들은 단순히 정부조직과 법률의 서구화 뿐만 아니라 문화와 생활관습, 사고방식 까지도 서양화 할 것을 촉구하는 이른바 '문명개화'를 주창하고 나섰다.
그러나 근대화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후쿠자와의 서구화에 대한 추종은 도를 지나쳐 일본은 아예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화 한 몸이 되야 한다는 탈아입구론을 주장하기에 이르렀고, 이런 주장은 후일 일본이 청일전쟁과 한일합방 등을 통해 아시아를 동반자가 아닌 침략과 수탈의 대상으로 삼고 대륙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게 된다.
당시의 외무장관을 역임한 이노우에 가오루 역시 제도뿐 아니라 국민들의 생활과 문화까지 철저히 서구식으로 개조해야 한다는 이른바 구화주의(歐化主義)를 주창해 저 유명한 로쿠메이칸(鹿鳴館) 이라는 서양식 무도관이 도쿄 황궁 바로 옆 히비야 거리에 등장하게 된다. 서양식 드레스와 모자를 쓴 일본의 귀부인이 요한 스트라우스의 왈츠에 맞추어 무도회를 즐기는 모습은 서구화의 상징인 동시에 피폐한 백성들에게는 비아냥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어쨌던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근대화, 서구화에 성공했고 팽창의 에너지를 아시아로 분출해 주변국을 무차별 집어삼키는 탐욕스런 제국주의 국가가 돼 갔다.
그러나 2차 대전을 계기로 일본은 근대화의 모델이자 은인이었던 미국과 식민지를 둘러싼 이해관계의 충돌로 한바탕 격전을 치르게 됐고, 그 와중에서 아시아 국가들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후쿠자와 유기치가 탈아입구의 열변을 토했던 때로부터 116년, 일본에 다시 탈아입구론의 기치가 서서히 올라가고 있다.
쇠락해 가는 집권 자민당의 발복색원을 기치로 들고 나온 고이즈미는 도쿠가와 바쿠후를 타도하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루자는 후쿠자와처럼 자민당을 개혁하고 매너리즘에 빠진 관료와 거대공룡 공기업 집단을 개혁해 일본을 새로 일으켜 세워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메이지 유신에 버금가는 신 유신을 주장하는 고이즈미는 오랜 불황과 정치적 무능에 신물이 난 일본인들에게는 신천지의 복음을 전하는 메신저로 다가왔고 그의 일거수 일투족에 일본열도는 열광하고 있다.
역대 총리 가운데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는 고이즈미는 과연 한세기 만에 부활한 후쿠자와 유키치인가? 공교롭게도 4월27일 취임한 이후 그의 석달 간의 행적은 아시아를 멀리하고 미국과 유럽에 다가가는 '탈아입구'의 묘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
2. 친미외교로 일관한 고이즈미의 첫 미-일 정상회담
지난 6월30일 미국 매릴랜드 주에 있는 부시대통령의 별장 캠프데이비드. 부시 대통령이 선물로 준 가죽 점퍼를 입고 부시대통령과 야구공을 주고 받으며 파안대소하는 고이즈미 총리의 모습이 일본 텔레비전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취임 이후 처음 미국을 방문하는데다 외교무대에서의 능력을 검증받은 바 없는 고이즈미 총리여서인지 일본언론들은 그의 일거수 일투족에 스포트라이트를 맞추었다.
고이즈미 총리는 부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모두(冒頭)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 60년 미-일 안보조약개정 때 당시 외무위원장이었던 아버지가 이를 반대하던 데모대 앞에서 조약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을 보고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새롭게 생겼다. 이후 나는 일관되게 일본에 있어서 미국과의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역설해 왔다. 일-미관계가 다소 악화돼도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서 보전되면 되지 않나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있을 수 없다. 일-미 관계가 좋으면 좋을수록 다른 나라와의 관계도 좋아질 것이다."
아무리 미국과의 친근감을 과시하려 했다고 이해하려 해도 일국의 총리로서는 낯 간지러운 언사가 아닐 수 없다. 미국과의 관계가 좋으면 좋을수록 다른 나라와의 관계도 좋다니, 마치 미국은 자국의 이해에 따라 움직이는 나라가 아니고 무오류의 전지전능한 국가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고이즈미는 한술 더 떠 1854년 미-일 화친조약과 제2차 세계대전을 언급했다. " 일본은 최초에는 외국으로부터 영향에 반발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잘 받아들였다"." 미국이 관대함과 정의감을 가지고 일본에 접근한 것이 일본인의 친미관의 근저를 이루고 있다 ". " 전쟁에서 패한 후 일본국민은 미국의 노예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은 관대하게 대접해 주었고 식량도 제공해 주었기 때문에 일본국민들은 미국이 일본을 구 일본군에서 해방시켰다는 감정이 강하다 "
고이즈미의 이런 발언이 알려지자 일본 언론들은 지나친 친미, 사대적 발언이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아사히 신문은 7월2일자 워싱턴발 기사에서 솔직성이 지나친 친미관의 표명이라고 지적하고 고이즈미 류의 외교에 위험성을 보여주었다고 비판했다.
야당도 비판에 가세해 간 나오토 민주당 간사장은 일본에 있어서 미국은 여전히 성역으로 남아있으며 구 자민당과 전혀 변한 것이 없는 셈이라고 혹평했다.
시이가즈오 공산당 위원장도 미국 추종외교로 시종일관 했다고 비난했고, 도이 다카코 사민당 당수도 일본이 미국의 종속변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재삼 확인한 회담이었다고 폄하했다.
미국에 지나치게 유화적인 모습을 보인 현안 가운데 하나가 바로 교토의정서 비준문제다.
지난 6월30일 캠프데이비드에서 있는 부시 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고이즈미 총리는 일본이 미국의 의사를 무시하고 교토 기후협약 발효에 앞장서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교토협약은 1997년 168개국의 서명으로 일본 교토에서 체결된 국제 기후협약이다. 선진국의 과도한 에너지 사용과 유해 가스 배출로 지구 온난화 현상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지구촌 곳곳에서 기상이변이 일어나는가 하면 오존층의 파괴 등으로 전지구적인 생태계의 위협이 일어나자 전 세계국가들이 유해가스 배출을 줄이자고 합의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이 협약의 이행 시기가 다가오자 미국의 막강한 석유재벌과 대기업의 압력을 받은 부시 정권은 이 조약을 보완해야 한다며 전격 탈퇴를 선언했다.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 이산화탄소이고 이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기준으로 보면 미국은 1999년 현재 15억2천만톤으로 단연 1위를 차지하고 있다. 2위인 중국의 두배, 3위인 러시아의 4배나 배출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이 탈퇴를 선언할 경우 이 조약은 사실상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교토 의정서는 온난화 유발가스의 55%를 방출하는 55개국 이상이 비준할 경우 법적 구속력을 갖기 때문에 일본이 러시아와 유럽 국가들과 보조를 맞춘다면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협략은 효력을 발휘한다. 따라서 협약의 발효에 있어서 일본의 입장은 매우 중요하다. 일본내 여론과 유럽 등 다른 선진국의 입장을 고려해 협약 비준에 전향적이었던 일본 정부였으나 막상 고이즈미 총리는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탈퇴 입장을 이해한다 쪽으로 선회했다
출국전 기자회견에서 " 미국을 설득하지 못하다면 발효를 위한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고 사뭇 비장한 태도를 보이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공해 문제에 대한 규제라면 둘째가 서러운 일본이 개도국의 수입품에 대해서는 가혹한 기준을 적용하면서 미국의 으름짱에는 순순히 장단을 맞추는 꼴은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지구상의 온갖 자원과 에너지를 가장 헤프게 쓰며 인류 사상 최대의 풍요를 구가하고 있는 미국이 에너지 사용과 이에 따른 유해가스 배출을 줄이지 않는다는 것은 지구 경찰을 자처하는 엉클 샘으로서는 비신사적이고 이기적인 행위다.
부시 대통령의 교토의정서 탈퇴선언 직후 일본의 국회의원들이 연명으로 미국의 주요일간지에 의견광고를 내 미국정부를 비판했던 당당함과, 교토 회의의 의장국으로서 환경 친화적인 선진국의 모습을 과시했던 일본의 입장을 떠올려 보면 고이즈미의 외교 행보는 친미 사대라는 비판도 나올법 하다.
3. 한국과 중국에는 오만한 일본
고이즈미의 대미 정책이 지나칠 정도로 유화적이고 우호적이라면 그의 등장 이후 한국과 중국 등 이웃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정책은 지나칠 정도로 오만하고 강경하다.
지난달 초 일본의 문부과학성은 한국과 중국 정부가 공식 요청한 후소샤의 역사교과서를 비롯한 역사교과서의 재수정 요구에 대해 사실상 전면 거부의사를 밝혔다. 표면적인 이유는 한국과 중국이 지적한 부분이 사실의 오류가 아닌 역사 해석의 문제이고 역사관이나 해석의 다양성에 대해서 일본정부는 집필자에게 수정을 강요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도오야마 문부과학성 장관은 동일한 항목에 대해서 만일 중국과 한국이 재수정을 요구해 온다면 더 이상은 응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고, 고이즈미 총리 역시 재수정 의향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여러 가지를 생각해서 결론을 내린 것인 만큼 더 이상의 수정은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른바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라는 우익 아마추어 학자와 만화가 등이 만든 교과서는 철저히 일본 우월주의와 황국사관에 입각해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일본의 식민통치와 아시아 침략을 미화하고 군국주의가 저지른 범죄를 은폐하는가 하면 일본의 재무장을 공공연히 주장하는 위험한 교과서다.
이런 교과서가 버젓이 일본 정부의 검정을 통과하고 전례가 없었던 일반인 상대의 대대적인 시중 판매를 하는가 하면 교육일선에서 이 교과서를 채택시키기 위한 대 의회 청원과 교육위원회를 상대로 한 압력과 로비 활동도 벌어지고 있다.
이 교과서의 위험성을 감지한 일본의 양심적인 학자와 지식인, 시민단체와 교사 학부모들조차 교과서의 오류를 지적하고 불채택 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점만 보아도 이 교과서의 검정 통과와 재수정 거부라는 일본 정부의 결정이 얼마나 아시아를 무시하는 행위인지를
짐작케 한다. 이 교과서의 등장은 지난 94년 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범죄를 사죄한 무라야마 담화 이후 일본 정부의 과거사에 대한 공식입장을 정면으로 뒤집은 것이고, 2차 교과서 파동이후 일본이 막대한 피해를 입힌 아시아 국가에 약속한 이른바 교과서 기술에서의 '근린조항'을 사문화 하는 무책임한 행위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재수정 거부 이후 비등하는 한국과 중국의 분노와 잇단 제재조치 발표에 대해 대수롭지 않다는 듯, 8.15 신사참배 이후 관계 개선을 모색하겠다는 느긋한 입장으로 일관하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 공언도 대표적으로 아시아를 무시하는 일본 외교를 상징한다.
고이즈미 총리는 지난 4월 총리 선거에서 느닷없이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공약으로 들고 나왔다.
야스쿠니 신사는 도조 히테키를 비롯해 전쟁을 일으킨 A급 전범 14명의 위패가 있는 곳으로 일본 우익의 성역과 같은 곳이며 군국주의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곳이다. 이런 상징성 때문에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은 정치인과 관료의 참배 금지를 요구해 왔고 일본 역시 피해를 입힌 주변국에 대한 최소한의 사죄 의미로 관료들의 공식 참배를 자제해 왔다.
그러나 지난 85년 나카소네 총리의 참배와 96년 하시모토 총리의 참배에 이어 해가 갈수록 관료들과 의원들의 참배는 공공연히 이뤄지고 있다. 다만 주변국의 비난을 의식해 이들은 총리나 관료 등 공식적인 자격이 아니라 개인적인 자격의 참배임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새 총리에 취임한 고이즈미 씨는 " 두 번 다시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심정으로 국가를 위해 희생한 전몰자에 대한 애도를 표하고 싶다"는 지극히 정서적인 차원의 이유를 대면서 신사참배 강행을 공언하고 있다. 고이즈미의 본질을 흐리는 이런 참배의 변은 논리적으로도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앞서 부시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고이즈미 총리는 정의와 관대의 상징 미국이 일본을 구 일본군에서 해방시켜주었다고 했는데 일본을 질곡으로 몰아넣었던 구 일본군을 애도하기 위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겠다니 이 무슨 궤변인가?
고이즈미 총리는 한술 더떠 참의원 선거를 앞둔 지난달 당수간 토론회에서 " 일본인의 감정으로 인간은 죽으면 모두 신이 된다. 전범들도 모두 사형을 받음으로써 책임을 다한 것이 아닌가, 왜 다른 사망자와 구별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해 파문을 일으켰다.
마이니치 신문은 그의 이런 발언이 일본의 전쟁책임을 부정하고 A급 전범 들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면 신사참배 중지를 요구했다.
야스쿠니 참배의 자제를 통해 일본은 과거 깊은 상처를 안겨 준 수많은 주변국가에 대해 최소한의 사죄를 한다는 의미, 혹은 신사참배가 가져오는 주변국의 분노를 애써 외면하는 고이즈미 총리의 참배 강행은 아시아와의 외교마찰도 불사하겠다는 배짱으로밖에 비쳐지지 않는다.
이밖에도 일본은 한국과 러시아가 국제 법과 관계에 따라 맺은 남 쿠릴 열도의 꽁치잡이 어업협정을 일본의 영토주권을 무시한 행위라며 트집을 잡고 있다. 중국에 대해서는 지난 4월23일 대파와 표고버섯, 다다미 재료 등의 농산물에 대해 고율의 관세를 물리는 세이프 가드를 발동했다. 거듭되는 중국의 재고 요청과 협상 요구에도 철저히 무시로 일관하던 일본은 분노한 중국이 일본산 자동차와 냉장고 휴대전화에 대해 전격 보복관세를 물리자 허둥지둥 협상테이블에 앉겠다고 나서고 있다. 한국산 폴리에스테르와 방울 도마토 등에 대해서도 여차하면 세이프 가드를 발동하겠다고 으름짱을 놓고 있다.
최근 방위청이 내놓은 일본의 방위백서에서는 중국의 미사일 증강과 일본 해역에서의 중국 함정 활동 등을 자세히 적시하면서 중국의 군사적 팽창을 아시아의 안보 위협 요인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미국의 MD 구상이나 미국의 대중국 위협론, 미국의 일본에 대한 집단적 자위권 행사의 촉구 등 일련의 미-일 군사 동맹 강화 역시 중국을 가상 적으로 겨냥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고이즈미 총리가 그의 공언대로 중국과 한국의 요청을 무시하고 8월15일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강행한다면 오는 10월로 예정된 고이즈미 총리의 중국방문도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한국 방문도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98년 김대중 대통령의 일본 방문 이후 두나라 정상은 한해씩 번갈아 가며 상대국을 방문해 정상회담을 갖고 있으며, 올해는 일본 측에서 방한할 차례이다. 그러나 정작 고이즈미 총리는 취임 석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언급이 없다.
오랜 불황의 늪에 빠진 일본의 구원투수로 등장한 고이즈미 총리, 성역없는 개혁과 구태의연한 파벌정치의 타파를 외치는 그는 확실히 일본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신선한 지도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런 고이즈미 총리가 대중들의 인기에 도취돼, 주변국의 존재를 무시한 일방통행식 외교정책을 편다면, 아시아 국가와의 공존공생을 무시하고 친미 일변도의 외교정책을 펼쳐 나간다면 이는 일본을 위해서도 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많은 일본의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경고하듯 이런 일본의 우경화는 일본의 국제적 고립을 자초할 수 밖에 없고 일본의 고립은 결국 아시아의 불행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110년 전 일본에 불었던 탈아입구의 열풍이 정말 일본에 다시 불 것인가?
1.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의 탈아론(脫亞論)과 고이즈미의 개혁론(개혁론)
" 오늘날 우리나라는 이웃 나라의 문명개화를 기다려 함께 아세아를 부흥시키려하지 말고 아시아를 벗어나 서양 문명국과 진퇴를 함께 해야 한다. 나쁜 벗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함께 악명을 면하기 불가하니 우리들은 마음가짐부터 아세아 동방의 나쁜 벗을 사절(謝絶)해야 할 것이다."
1885년(메이지 18년) 3월16일 시사신보 후쿠자와 유기치
1853년 요코하마에 도착한 당시 미국의 동인도 함대 사령관 페리는 4척의 함선을 거느리고 미국 대통령 필모어의 국서를 제출하고 일본의 개국을 요구한다. 이미 쇠락한 도쿠가와 바쿠후는 전함의 위력에 주눅이 들어 이듬해인 1854년 이른바 미-일 화친조약을 맺고 시모다와 하코다테 항을 개항하고 이어 1858년 미일 통상조약을 맺게 된다.
미-일 화친조약을 조약을 계기로 외부로부터의 개혁을 강요당한 일본은 안으로 존황양이(尊皇攘夷)와 화혼양재(和魂洋才)를 기치로 내걸고 막부 타도와 천황중심의 근대입헌 국가로의 변신을 추구한다. 이 과정에서 후쿠자와 유기치와 니시 아마네, 가토 히로유키,니시무라 시게키 등 이른바 일본의 선각자들은 단순히 정부조직과 법률의 서구화 뿐만 아니라 문화와 생활관습, 사고방식 까지도 서양화 할 것을 촉구하는 이른바 '문명개화'를 주창하고 나섰다.
그러나 근대화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후쿠자와의 서구화에 대한 추종은 도를 지나쳐 일본은 아예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화 한 몸이 되야 한다는 탈아입구론을 주장하기에 이르렀고, 이런 주장은 후일 일본이 청일전쟁과 한일합방 등을 통해 아시아를 동반자가 아닌 침략과 수탈의 대상으로 삼고 대륙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게 된다.
당시의 외무장관을 역임한 이노우에 가오루 역시 제도뿐 아니라 국민들의 생활과 문화까지 철저히 서구식으로 개조해야 한다는 이른바 구화주의(歐化主義)를 주창해 저 유명한 로쿠메이칸(鹿鳴館) 이라는 서양식 무도관이 도쿄 황궁 바로 옆 히비야 거리에 등장하게 된다. 서양식 드레스와 모자를 쓴 일본의 귀부인이 요한 스트라우스의 왈츠에 맞추어 무도회를 즐기는 모습은 서구화의 상징인 동시에 피폐한 백성들에게는 비아냥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어쨌던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근대화, 서구화에 성공했고 팽창의 에너지를 아시아로 분출해 주변국을 무차별 집어삼키는 탐욕스런 제국주의 국가가 돼 갔다.
그러나 2차 대전을 계기로 일본은 근대화의 모델이자 은인이었던 미국과 식민지를 둘러싼 이해관계의 충돌로 한바탕 격전을 치르게 됐고, 그 와중에서 아시아 국가들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후쿠자와 유기치가 탈아입구의 열변을 토했던 때로부터 116년, 일본에 다시 탈아입구론의 기치가 서서히 올라가고 있다.
쇠락해 가는 집권 자민당의 발복색원을 기치로 들고 나온 고이즈미는 도쿠가와 바쿠후를 타도하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루자는 후쿠자와처럼 자민당을 개혁하고 매너리즘에 빠진 관료와 거대공룡 공기업 집단을 개혁해 일본을 새로 일으켜 세워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메이지 유신에 버금가는 신 유신을 주장하는 고이즈미는 오랜 불황과 정치적 무능에 신물이 난 일본인들에게는 신천지의 복음을 전하는 메신저로 다가왔고 그의 일거수 일투족에 일본열도는 열광하고 있다.
역대 총리 가운데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는 고이즈미는 과연 한세기 만에 부활한 후쿠자와 유키치인가? 공교롭게도 4월27일 취임한 이후 그의 석달 간의 행적은 아시아를 멀리하고 미국과 유럽에 다가가는 '탈아입구'의 묘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
2. 친미외교로 일관한 고이즈미의 첫 미-일 정상회담
지난 6월30일 미국 매릴랜드 주에 있는 부시대통령의 별장 캠프데이비드. 부시 대통령이 선물로 준 가죽 점퍼를 입고 부시대통령과 야구공을 주고 받으며 파안대소하는 고이즈미 총리의 모습이 일본 텔레비전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취임 이후 처음 미국을 방문하는데다 외교무대에서의 능력을 검증받은 바 없는 고이즈미 총리여서인지 일본언론들은 그의 일거수 일투족에 스포트라이트를 맞추었다.
고이즈미 총리는 부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모두(冒頭)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 60년 미-일 안보조약개정 때 당시 외무위원장이었던 아버지가 이를 반대하던 데모대 앞에서 조약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을 보고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새롭게 생겼다. 이후 나는 일관되게 일본에 있어서 미국과의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역설해 왔다. 일-미관계가 다소 악화돼도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서 보전되면 되지 않나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있을 수 없다. 일-미 관계가 좋으면 좋을수록 다른 나라와의 관계도 좋아질 것이다."
아무리 미국과의 친근감을 과시하려 했다고 이해하려 해도 일국의 총리로서는 낯 간지러운 언사가 아닐 수 없다. 미국과의 관계가 좋으면 좋을수록 다른 나라와의 관계도 좋다니, 마치 미국은 자국의 이해에 따라 움직이는 나라가 아니고 무오류의 전지전능한 국가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고이즈미는 한술 더 떠 1854년 미-일 화친조약과 제2차 세계대전을 언급했다. " 일본은 최초에는 외국으로부터 영향에 반발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잘 받아들였다"." 미국이 관대함과 정의감을 가지고 일본에 접근한 것이 일본인의 친미관의 근저를 이루고 있다 ". " 전쟁에서 패한 후 일본국민은 미국의 노예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은 관대하게 대접해 주었고 식량도 제공해 주었기 때문에 일본국민들은 미국이 일본을 구 일본군에서 해방시켰다는 감정이 강하다 "
고이즈미의 이런 발언이 알려지자 일본 언론들은 지나친 친미, 사대적 발언이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아사히 신문은 7월2일자 워싱턴발 기사에서 솔직성이 지나친 친미관의 표명이라고 지적하고 고이즈미 류의 외교에 위험성을 보여주었다고 비판했다.
야당도 비판에 가세해 간 나오토 민주당 간사장은 일본에 있어서 미국은 여전히 성역으로 남아있으며 구 자민당과 전혀 변한 것이 없는 셈이라고 혹평했다.
시이가즈오 공산당 위원장도 미국 추종외교로 시종일관 했다고 비난했고, 도이 다카코 사민당 당수도 일본이 미국의 종속변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재삼 확인한 회담이었다고 폄하했다.
미국에 지나치게 유화적인 모습을 보인 현안 가운데 하나가 바로 교토의정서 비준문제다.
지난 6월30일 캠프데이비드에서 있는 부시 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고이즈미 총리는 일본이 미국의 의사를 무시하고 교토 기후협약 발효에 앞장서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교토협약은 1997년 168개국의 서명으로 일본 교토에서 체결된 국제 기후협약이다. 선진국의 과도한 에너지 사용과 유해 가스 배출로 지구 온난화 현상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지구촌 곳곳에서 기상이변이 일어나는가 하면 오존층의 파괴 등으로 전지구적인 생태계의 위협이 일어나자 전 세계국가들이 유해가스 배출을 줄이자고 합의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이 협약의 이행 시기가 다가오자 미국의 막강한 석유재벌과 대기업의 압력을 받은 부시 정권은 이 조약을 보완해야 한다며 전격 탈퇴를 선언했다.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 이산화탄소이고 이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기준으로 보면 미국은 1999년 현재 15억2천만톤으로 단연 1위를 차지하고 있다. 2위인 중국의 두배, 3위인 러시아의 4배나 배출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이 탈퇴를 선언할 경우 이 조약은 사실상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교토 의정서는 온난화 유발가스의 55%를 방출하는 55개국 이상이 비준할 경우 법적 구속력을 갖기 때문에 일본이 러시아와 유럽 국가들과 보조를 맞춘다면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협략은 효력을 발휘한다. 따라서 협약의 발효에 있어서 일본의 입장은 매우 중요하다. 일본내 여론과 유럽 등 다른 선진국의 입장을 고려해 협약 비준에 전향적이었던 일본 정부였으나 막상 고이즈미 총리는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탈퇴 입장을 이해한다 쪽으로 선회했다
출국전 기자회견에서 " 미국을 설득하지 못하다면 발효를 위한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고 사뭇 비장한 태도를 보이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공해 문제에 대한 규제라면 둘째가 서러운 일본이 개도국의 수입품에 대해서는 가혹한 기준을 적용하면서 미국의 으름짱에는 순순히 장단을 맞추는 꼴은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지구상의 온갖 자원과 에너지를 가장 헤프게 쓰며 인류 사상 최대의 풍요를 구가하고 있는 미국이 에너지 사용과 이에 따른 유해가스 배출을 줄이지 않는다는 것은 지구 경찰을 자처하는 엉클 샘으로서는 비신사적이고 이기적인 행위다.
부시 대통령의 교토의정서 탈퇴선언 직후 일본의 국회의원들이 연명으로 미국의 주요일간지에 의견광고를 내 미국정부를 비판했던 당당함과, 교토 회의의 의장국으로서 환경 친화적인 선진국의 모습을 과시했던 일본의 입장을 떠올려 보면 고이즈미의 외교 행보는 친미 사대라는 비판도 나올법 하다.
3. 한국과 중국에는 오만한 일본
고이즈미의 대미 정책이 지나칠 정도로 유화적이고 우호적이라면 그의 등장 이후 한국과 중국 등 이웃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정책은 지나칠 정도로 오만하고 강경하다.
지난달 초 일본의 문부과학성은 한국과 중국 정부가 공식 요청한 후소샤의 역사교과서를 비롯한 역사교과서의 재수정 요구에 대해 사실상 전면 거부의사를 밝혔다. 표면적인 이유는 한국과 중국이 지적한 부분이 사실의 오류가 아닌 역사 해석의 문제이고 역사관이나 해석의 다양성에 대해서 일본정부는 집필자에게 수정을 강요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도오야마 문부과학성 장관은 동일한 항목에 대해서 만일 중국과 한국이 재수정을 요구해 온다면 더 이상은 응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고, 고이즈미 총리 역시 재수정 의향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여러 가지를 생각해서 결론을 내린 것인 만큼 더 이상의 수정은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른바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라는 우익 아마추어 학자와 만화가 등이 만든 교과서는 철저히 일본 우월주의와 황국사관에 입각해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일본의 식민통치와 아시아 침략을 미화하고 군국주의가 저지른 범죄를 은폐하는가 하면 일본의 재무장을 공공연히 주장하는 위험한 교과서다.
이런 교과서가 버젓이 일본 정부의 검정을 통과하고 전례가 없었던 일반인 상대의 대대적인 시중 판매를 하는가 하면 교육일선에서 이 교과서를 채택시키기 위한 대 의회 청원과 교육위원회를 상대로 한 압력과 로비 활동도 벌어지고 있다.
이 교과서의 위험성을 감지한 일본의 양심적인 학자와 지식인, 시민단체와 교사 학부모들조차 교과서의 오류를 지적하고 불채택 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점만 보아도 이 교과서의 검정 통과와 재수정 거부라는 일본 정부의 결정이 얼마나 아시아를 무시하는 행위인지를
짐작케 한다. 이 교과서의 등장은 지난 94년 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범죄를 사죄한 무라야마 담화 이후 일본 정부의 과거사에 대한 공식입장을 정면으로 뒤집은 것이고, 2차 교과서 파동이후 일본이 막대한 피해를 입힌 아시아 국가에 약속한 이른바 교과서 기술에서의 '근린조항'을 사문화 하는 무책임한 행위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재수정 거부 이후 비등하는 한국과 중국의 분노와 잇단 제재조치 발표에 대해 대수롭지 않다는 듯, 8.15 신사참배 이후 관계 개선을 모색하겠다는 느긋한 입장으로 일관하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 공언도 대표적으로 아시아를 무시하는 일본 외교를 상징한다.
고이즈미 총리는 지난 4월 총리 선거에서 느닷없이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공약으로 들고 나왔다.
야스쿠니 신사는 도조 히테키를 비롯해 전쟁을 일으킨 A급 전범 14명의 위패가 있는 곳으로 일본 우익의 성역과 같은 곳이며 군국주의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곳이다. 이런 상징성 때문에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은 정치인과 관료의 참배 금지를 요구해 왔고 일본 역시 피해를 입힌 주변국에 대한 최소한의 사죄 의미로 관료들의 공식 참배를 자제해 왔다.
그러나 지난 85년 나카소네 총리의 참배와 96년 하시모토 총리의 참배에 이어 해가 갈수록 관료들과 의원들의 참배는 공공연히 이뤄지고 있다. 다만 주변국의 비난을 의식해 이들은 총리나 관료 등 공식적인 자격이 아니라 개인적인 자격의 참배임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새 총리에 취임한 고이즈미 씨는 " 두 번 다시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심정으로 국가를 위해 희생한 전몰자에 대한 애도를 표하고 싶다"는 지극히 정서적인 차원의 이유를 대면서 신사참배 강행을 공언하고 있다. 고이즈미의 본질을 흐리는 이런 참배의 변은 논리적으로도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앞서 부시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고이즈미 총리는 정의와 관대의 상징 미국이 일본을 구 일본군에서 해방시켜주었다고 했는데 일본을 질곡으로 몰아넣었던 구 일본군을 애도하기 위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겠다니 이 무슨 궤변인가?
고이즈미 총리는 한술 더떠 참의원 선거를 앞둔 지난달 당수간 토론회에서 " 일본인의 감정으로 인간은 죽으면 모두 신이 된다. 전범들도 모두 사형을 받음으로써 책임을 다한 것이 아닌가, 왜 다른 사망자와 구별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해 파문을 일으켰다.
마이니치 신문은 그의 이런 발언이 일본의 전쟁책임을 부정하고 A급 전범 들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면 신사참배 중지를 요구했다.
야스쿠니 참배의 자제를 통해 일본은 과거 깊은 상처를 안겨 준 수많은 주변국가에 대해 최소한의 사죄를 한다는 의미, 혹은 신사참배가 가져오는 주변국의 분노를 애써 외면하는 고이즈미 총리의 참배 강행은 아시아와의 외교마찰도 불사하겠다는 배짱으로밖에 비쳐지지 않는다.
이밖에도 일본은 한국과 러시아가 국제 법과 관계에 따라 맺은 남 쿠릴 열도의 꽁치잡이 어업협정을 일본의 영토주권을 무시한 행위라며 트집을 잡고 있다. 중국에 대해서는 지난 4월23일 대파와 표고버섯, 다다미 재료 등의 농산물에 대해 고율의 관세를 물리는 세이프 가드를 발동했다. 거듭되는 중국의 재고 요청과 협상 요구에도 철저히 무시로 일관하던 일본은 분노한 중국이 일본산 자동차와 냉장고 휴대전화에 대해 전격 보복관세를 물리자 허둥지둥 협상테이블에 앉겠다고 나서고 있다. 한국산 폴리에스테르와 방울 도마토 등에 대해서도 여차하면 세이프 가드를 발동하겠다고 으름짱을 놓고 있다.
최근 방위청이 내놓은 일본의 방위백서에서는 중국의 미사일 증강과 일본 해역에서의 중국 함정 활동 등을 자세히 적시하면서 중국의 군사적 팽창을 아시아의 안보 위협 요인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미국의 MD 구상이나 미국의 대중국 위협론, 미국의 일본에 대한 집단적 자위권 행사의 촉구 등 일련의 미-일 군사 동맹 강화 역시 중국을 가상 적으로 겨냥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고이즈미 총리가 그의 공언대로 중국과 한국의 요청을 무시하고 8월15일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강행한다면 오는 10월로 예정된 고이즈미 총리의 중국방문도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한국 방문도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98년 김대중 대통령의 일본 방문 이후 두나라 정상은 한해씩 번갈아 가며 상대국을 방문해 정상회담을 갖고 있으며, 올해는 일본 측에서 방한할 차례이다. 그러나 정작 고이즈미 총리는 취임 석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언급이 없다.
오랜 불황의 늪에 빠진 일본의 구원투수로 등장한 고이즈미 총리, 성역없는 개혁과 구태의연한 파벌정치의 타파를 외치는 그는 확실히 일본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신선한 지도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런 고이즈미 총리가 대중들의 인기에 도취돼, 주변국의 존재를 무시한 일방통행식 외교정책을 편다면, 아시아 국가와의 공존공생을 무시하고 친미 일변도의 외교정책을 펼쳐 나간다면 이는 일본을 위해서도 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많은 일본의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경고하듯 이런 일본의 우경화는 일본의 국제적 고립을 자초할 수 밖에 없고 일본의 고립은 결국 아시아의 불행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110년 전 일본에 불었던 탈아입구의 열풍이 정말 일본에 다시 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