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5역이 아니면 안 되는 곳 울릉도!
KBS 울릉지국 방송기술 직원의 태풍 나비 수해 취재기
작년 12월1일 KBS 울릉중계소에 오면서 나름대로 계획이 있었다 프로그램 하나 만들어 보겠다고 기획 제작 서까지 만든 것이다. 그러나 막상 울릉도에 와보니 그럴만한 시간이 없었다. 비록 울릉도가 많은 방송 아이템을 갖고 있지만, 울릉중계소의 경우 인적 구성이나 제작 여건이 넉넉하지 못했다. 직원이라고는 엔지니어 3명이 전부고 그 외 리포터1명에 운전, 경비요원, 밥하는 아주머니를 합쳐 4명이 전부다. 일단 직원이 엔지니어 밖에 없다보니 방송부분에 약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나마 라디오PD 업무는 엔지니어들이 제대로야 어렵겠지만, 흉내는 낼 수 있다 하더라도 뉴스 취재 업무는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특히 기사 작성은 기자들에게 인터넷을 통해 수정을 요구하면 되지만 영상취재의 경우는 그럴 수 없다. 수정을 할 수도 없고 지나간 일들을 되돌려 다시 촬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촬영한 영상이 최종 물로 가야 하기 때문에 전문이 아닌 우리 입장에서는 큰 부담이다. 전근 오기 전부터 울릉도에 가면 해야할 일이기에 촬영기자들에게 묻기도 하고 보지도 않던 뉴스를 집중적으로 모니터하기도 했지만, 막상 카메라를 들고 현장에서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는 순간 갑갑하기만 했다. 칼라도 아니고 조그마한 흑백 모니터로 보이는 그림이 내가 원하는 그림이 맞는지 분간도 되지 않았다.
카메라 특성은 중계차에서 근무를 하며 영상을 했던 경험으로 접근이 가능했지만 구도며 흑백모니터의 적응은 큰 숙제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울릉도에 큰 사건들이 왜 그리도 많은지 12월초부터 시작된 첫눈부터 시작해서 독도 3.1절 행사 일본의 독도 망언으로 불거진 독도에 대한 국민적 관심, 태풍 나비까지, 정신이 없었다. 물론 보람도 있다. 타 언론사가 접근하지 못하는 특종을 KBS에는 우리가 있어서 늘 할 수 있으니 말이다.
9월6일 태풍나비가 울릉도를 강타했다.
그야말로 새벽부터 정신 없이 뛰었다. 재해 방송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하필이면 인사발령 문제로 한사람이 들어오지 못한 상황에서 리포터와 엔지니어 두 명이 열명 이상이 하는 재해 중계 방송을 할 수밖에 없었다.
새벽 4시부터 한사람은 링크 구성이며 조명 중계준비를 하고 한사람은 촬영을 하고 기사 쓰고, 생생한 그림을 위해 도동항, 저동항을 해맸다. 방파제로 마침 파도가 넘어 오는 것을 보고 뛰어가 카메라 앵글을 돌리는 순간 파도가 덮쳤고 깜짝 놀라 한발 물러서서 다시 촬영하기 시작했다. 우리 운전 기사는 위험하다고 했지만 촬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카메라만 들면 이상한 마법에 걸리는 것 같다
우리 카메라 기자들 역시 항상 이런 저런 위험 속에 노출되어 일하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허겁지겁 첫 방송참여가 끝나고 다음 원고 준비하려는데 여기저기서 방송 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라디오 뉴스는 물론 라디오 프로그램 및 지역 라디오까지, 리포터는 라디오 원고에, 참여에 정신 없고 우리 둘은 전문가도 아님에도 한시간의 짧은 시간 안에 교대로 촬영을 하고 중계시스템을 확인하고 정신이 없었다. 게다가 TV 기사까지 써야 했으니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서울에 앉아 있는 데스크는 왜 그렇게 주문 사항이 많고 이기적인지! 중계차 시절 늘 느꼈던 일이지만 보도 일은 하기 싫을 뿐 아니라 하고도 기분은 좋지 않은데 역시 그랬다.
정전으로 발전기는 계속 돌아가고 방송은 다 끊어져 참여도 대구TV주조로 전화 연결해 오디오를 받아야만했다. 그렇게 반복 작업이 밤새 계속 되는 동안 우리 시설을 둘러 볼 시간조차 없었다. 그런데 데스크는 밤샘 방송을 요구했다. 우리는 못한다고 얘기했고 데스크는 당연히 우리가 해야 되는 냥 큰 소리를 쳤다. 왜냐하면 더 이상 할 여력도 없지만 영상이 뒷받침되지 않은 참여는 무의미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방송참여를 중단하고 그제 서야 울릉지국 청사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우리 지국의 곳곳에 피해가 감지되었고 옥상에는 물이 차 수영장이 되어 있었다. 겨우 몸을 낮춰 배수구를 뚫고 나뭇잎을 걷어내 지국의 수해를 해소하고 나니 다시 방송 준비해야 될 시간이 되었다. 녹초가 되어서인지 습기가 가득 찬 뷰파인더가 보이질 않았다 감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방송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촬영에만 집중했다. 참여를 하나 빼먹더라도 생생한 영상을 조금 더 보충하는 게 의미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재해 방송이 끝나고 우린 한사람은 사무실에서 취재와 섭외, 시설 점검을 하고 나머지 한사람은 피해지역을 취재하기로 하고 카메라를 들고 문제의 현장을 찾았다. 곳곳엔 산사태와 홍수로 인해 뻘 밭이었다. 한참 걸어 들어가서야 힘들게 도착한 마을은 아수라장이었다. 마을 전체가 돌무덤과 흙더미에 묻혀 있었다. 홍수에 떠내려온 자동차와 갖가지 나무와 쓰레기들은 지붕을 덮고 있었고 기름 냄새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정신없이 카메라를 돌렸다. 주민의 안내로 5층 건물 옥상에 물탱크위로 카메라를 겨우 올려 마을 풀샷을 담았다. 후들거리고 진땀이 났다. 겨우 주민의 도움으로 내려와 마을로 들어가 보니 참담했다. 30분 테이프 두개를 그것도 어깨걸이로 스케치하고 나니 온몸이 쑤셨다. 이 일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얼마나 힘드는 일인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이틀 동안 그렇게 촬영과 기사에 시달리다가 강릉에서 이상원 기자와 류호성 기자가 들어 왔다.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접근 가능 지역만 이틀에 걸쳐 취재 하다보니 고립 지역이 문제였다. 배를 타거나 산을 넘어 가야 하는데 배는 육지로 모두 피항 하고 없고 도보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 덕분에 우리는 타사가 들어오기 전 접근이 어려웠던 지역을 접근하기로 했다. 다음날 배를 우선 섭외 해 보기로 하고 안되면 도보이동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북면 면사무소에 취재 차량협조도 했다. 모든게 작전대로 이루어졌고 9시 뉴스에 우리가 원했던 뉴스가 나가기 시작했다. 태풍 나비 보도가 훌륭하게 방송되는 순간이었다. 비록 전문 직종이 아니지만 울릉중계소 직원들은 최선을 다했고 뭔가 역할을 했다는데 대해 보람과 자부심을 느꼈다. 또한 이 순간 열정적인 그들과 축배를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원래 뉴스를 잘 보질 않았었다. 물론 신문은 더더구나 보질 않았다. 주요 뉴스는 인터넷을 통해 아니면 프로그램 속에서 자연히 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꼭 9시 뉴스를 꼭 볼 때가 있었다. 그것은 그 사건의 실제 상황이 어떠했는지 영상을 보기 위해서였다. 아마 현대인이라면 대부분 그런 사람이 많을 것이다.
실제 영상의 중요성을 알고 나서부터 영상 취재가 더 큰 부담이 되었다. 그런데 항상 뭔가 모자람을 느꼈다. 기사내용과 그림이 맞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직접 기사를 써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방향을 알고 접근하다 보니 영상은 물론 뉴스 전체의 완성도가 높아 졌다. 라디오의 경우 청취자들은 소리로 모든 현상을 느끼고 상황을 알게 된다. 하지만 TV의 경우는 다르다. 영상이 차지하는 비중이 음향에 비해 크다. 실제 제작 현장에서도 그 비중의 차이를 느끼곤 한다. 그만큼 디지털 시대에 영상의 중요성은 더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울릉도 생활이 이제 불과 2달 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회사 생활에서 정말 의미 있는 기간이었던 것 같다. 여러 업무도 해보면서 타 직종의 어려움도 알게 되었고 보람도 컸다. 무엇보다 좋은 사람을 많이 알게 된 것은 내게 더 없이 중요한 일인 것 같다.
KBS 엔지니어 최규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