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미터 눈폭탄 '진짜 난리에요'>
- 2월 6일. 하늘에서 함박눈이 쏟아진다. 원주를 떠나 강릉에 발령난 지 불과 사흘째. 좀처럼 볼 수 없던 탐스러운 눈발에 잠시나마 감상에 젖어든다.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섰다. 솜털 같은 하얀 눈이 도로 위에 쌓여간다. 어지러운 도심이 순백의 옷으로 갈아입고 있다.
- 2월 7일.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눈 상황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하루 사이에 얼굴이 퀭해졌지만 일손을 놓을 수 없다. 현장과 사무실을 벌써 열번 넘게 들락날락거리며 촬영과 편집을 반복하고 있다. 내일부터 주말이다. 비번이니 뜨거운 물에 씼고 좀 쉬어야겠다.
- 2월 8일. 눈(眼)에 눈(雪) 밖에 안 보인다. 벌써 50센티미터나 쌓였다. 주말이고 뭐고 전원 출근이다. 불평할 시간도 없다. 눈밭이 된 도로는 거대한 주차장으로 변했다. 도심은 이미 마비됐다. 제설용 중장비만 바쁘게 오갈 뿐이다. 눈앞에서 크고 작은 사건사고가 속출하고 있다. 몸은 천근만근이지만 긴장을 늦출 수 없다.
- 2월 9일. 즐거운 일요일이다. 하지만 계속 눈이 온다. 오늘도 쉬기는 틀렸다. 출근길 인도에 쌓인 눈 때문에 발이 푹푹 빠진다. 짜증이 난다. 산간마을에는 일부 주민들이 고립됐다. 길가에는 운행을 포기하고 버려둔 차들이 수두룩하다. 기상청은 당분간 눈이 더 온다고 한다. 제발 예보가 틀리기를 바랄 뿐이다.
- 2월 17일. 일주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얼굴이 검게 타버렸다. 열흘 동안 정신없이 눈 속에 파묻혀 지냈다. 허리춤까지 차오르는 눈이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 열흘 넘게 계속된 눈과 제설에 주민들이 지쳐가고 있다는데, 나도 그 중 하나다. 이 눈이 대체 언제 끝날지 모르겠다.
- 2월 18일. 눈이 그쳤다. 지난 6일 이후 12일째 만이다. 적설과 관련된 모든 기록을 갈아치웠다고 한다. 1911년 기상 관측이 시작된 이후 가장 많은 110센티미터의 눈이 쌓인 것으로 기록됐다. 기상청 예보관들조차 1미터 이상 쌓인 눈을 직접 눈으로 볼 줄은 몰랐다며 당혹해했다. 나도 정말 당혹스러웠다.
- 2월 24일. 일상을 서서히 되찾고 있지만, 마음이 복잡하다. 지붕이 주저앉으면서 삶의 터전을 잃은 할머니. 열흘 넘게 고립됐던 산골마을 할아버지. 뜬눈으로 밤을 지새며 제설차를 몰았을 공무원까지. 폭설이 할퀴고 간 상처는 깊기만 하고, 삶이 정상화되려면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지 장담하기 어렵다. 정신없이 촬영에만 열중하는 사이 피해 주민들의 속사정을 제대로 취재하지 못 한 것은 아닌지 후회스럽다. 폭설은 끝났지만 아직 할일이 많다. 폭설에 따른 피해 복구가 제대로 이뤄질런지, 대규모 재난에 우리 지자체나 정부의 대응 시스템은 제대로 가동됐는지 등 아직도 들여다볼 부분이 적지 않다. 아직 담아내지 못한 눈(雪)이 없는지 다시 눈(眼)에 불을 켜고 현장으로 달려가야겠다.
김중용 / KBS 강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