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의 최전선 가거도, 제13호 태풍 ‘링링’ 그 중심에 서다
▲ 제13호 태풍 ‘링링’ 가거도 취재현장<사진>
지난 9월 초, 제13호 태풍 ‘링링’이 한반도를 관통할 것이란 예보가 나왔다. 지리적으로 태풍의 가장 직접적인 영향권 아래 놓인 곳.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 끝자락의 섬. 목포에서 직선거리로 145Km, 뱃길로는 233Km, 쾌속선으로 가는 데 4시간 30분이 걸리는 국토 최남서 쪽에 위치한 섬, ‘가거도’.
태풍 ‘링링’은 9월 7일 토요일쯤 우리나라에 상륙할 예정이었지만 뱃길이 막히면 닿을 수 없기 때문에 서둘러 채비를 했다. 우리 취재팀은 먼저 목포에서 하룻밤을 묵고 아침 8시에 가거도행 쾌속선에 몸을 실었다. 4시간 30분여 만에 아득한 수평선 끝에 섬을 병풍처럼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옹벽이 나타났다. 1979년에 시작하여 30년 만인 2008년 완공된 길이 500m, 높이 12m, 폭 15m에 달하는 이 옹벽은 세찬 바람과 거센 파도로부터 가거도를 지켜주는 방파제다.
가거도항 선착장엔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태풍 탓인지 500명이 채 안되는 가거도 주민 절반 정도가 이미 섬을 빠져나갔고 당분간 육지로 나갈 수 있는 배편을 통해 나머지 사람들도 섬을 빠져나갈 것으로 보이는 상황이었다.
마중 나온 마을 이장의 트럭 짐칸에 몸을 실었다. 취재 거점이 될 민박집은 항구에서 차로 채 5분이 걸리지 않을 만큼 가까웠다. 식당을 겸한 민박집에는 이미 점심 한상이 차려져 있었다. 가히 낚시꾼들이 한 번은 가 보기를 희망한다는 낚시 천국다운 상차림에 입이 쩍 벌어졌다.
식사를 마치고 곧바로 섬을 둘러보기로 했다. 섬사람들은 어떻게 태풍을 대비하고 있는가? 민박집에서 불과 20m 정도 거리에 위치한 가거도항엔 정박 중인 배가 하나도 없었다. 항구에 아무리 견고하게 배를 정박해 놓아도 태풍의 바람과 파도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라 태풍 같은 유사 시엔 항구 한쪽에 커다란 기중기를 설치하고 배들을 육지에 올려둔다. 각종 어구들은 배를 올려놓은 장소 부근에 낮고 커다란 고무 상자에 담아 밧줄로 꽁꽁 묶어 두었다. 평소에도 바람과 파도가 세기로 유명한 가거도 곳곳에서 크고 작은 태풍을 경험하며 쌓인 그들의 노하우를 엿볼 수 있었다.
배를 타고 들어올 때 우리를 처음 맞아준 거대한 옹벽 방파제로 나가봤다. 대형 기중기 두 대와 여러 대의 포클레인, 덤프트럭이 방파제 위에서 한창 작업 중이었다. 공사 시작 후 30년 만인 지난 2008년 완공되었다는 방파제는 큰 태풍 때마다 부서지고 유실되어 유지와 보수 공사가 계속 이어졌다. 그날 현재도 보강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보강 공사 막바지에 다시 큰 태풍이 온다 해서 공사 관계자들의 걱정이 큰 상황이었다.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바람도 강해졌다. 방파제를 때리며 파도가 만들어낸 포말의 크기도 한층 커졌다. 섬사람들 주업이 어업인 만큼 생선들을 보관하는 개인 냉동창고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도 태풍 대비가 한창이었다. 냉동 창고 문은 굳게 잠가 두었고 각각의 창고들을 마치 한 덩어리인 것처럼 밧줄로 꽁꽁 묶어 두었다. 섬사람들은 거의 모든 곳을 태풍에 대비를 해둔 상태였다. 그래서 태풍이 도달하기 전 분주하게 대비하는 모습을 담을 수는 없었다.
태풍 관통 D-1일. 을 가거도에서 맞은 둘째 날. 태풍 피해가 잦아서인지 섬사람들은 호들갑스럽지 않게, 대범하게 잔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태풍 대비는 이미 철저하게 완료된 상황이었다. 낮 동안 비는 오다 말다를 반복했다. 먼바다로부터 만들어진 파도가 방파제를 때리고 포말이 한층 크게 일어났다. 해가 저물자 비바람이 강해졌다. 일찌감치 가거도항 앞 주택, 상점들 문이 닫히고 그 앞을 차들이 가로막았다. 강한 바람으로부터 시설물 파손을 최소화하기 위한 가거도 사람들만의 지혜였다.
9월 7일 새벽 4시. 2시간 후쯤 가거도를 통과할 것으로 보이는 ‘링링’을 담기위해 민박집을 나섰다. 미닫이문을 여는 순간 문틈 사이로 몰아쳐 들어오는 바람이 심상치 않았다. 세찬 비바람 속에서 LTE 라이브로 태풍 특보를 시작했다. 육안으로 정확한 상황 식별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항구 아래로 내려갈 수는 없었다. 두 번의 특보를 마치자 서서히 날이 밝기 시작했다. 가거도항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분명 전날까지 보았던 그 항구의 모습은 아니었다. 깨끗이 비운 자리에 온갖 건축자재들이 널브러져 있고 시설물을 밧줄로 고정하기 위해 세워 둔 폐트럭은 옆으로 넘어져 있었다. 항구 반대편에 보이는 높이 12m 방파제 위로 파도가 치솟고 있었다. 최악인 것은 방파제 옹벽이 무너져 내려 쾌속선을 접안했던 곳까지 덮쳐 버린 것이었다. 이번 태풍이 설마 이 거대한 방파제를 무너뜨리고 지나갈까? 방파제를 바라보며 문득 든 생각이 현실이 되어 있었다.
링링이 지나간 후, 자연의 힘 앞에 인간이란 한낱 미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서너 시간 만에 태풍 ‘링링’은 가거도를 관통하고 빠져나갔다. 가거도 사람들은 다시 묵묵하게 또 재빠르게 태풍이 남기고 간 잔해를 수습 중이다. 첫 날 보았듯 현재도 방파제는 다시 보강 공사가 진행 중이다. 가거도가 하루빨리 다시 이전의 모습을 되찾길 바란다.
서진호 / S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