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사(貴社)의 테이프(Tape), 안녕하십니까?
▲ MBC강원영동 방송사가 보관하고 있는 테이프 자료<사진>
14,040개.
저희 회사가 보유한 테이프 개수예요. 손으로 하나하나 셌으니, 약간의 오차는 있을 수 있지만 크게 틀린 숫자는 아닐 거예요. 1986년 자사 TV개국 방송을 담은 U-matic 테이프부터, 90년대 베타 형제들(Betacam SP/SX, Digibeta), 2000년대 HDCAM까지... 우리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보물 같은 아이들입니다. 그런데 이 보물 같은 아이들, 여러분들은 어떻게 보관하고 계시나요?
각 사마다 차이는 있을 거예요. 이미 모든 형태의 Tape 자료를 디지털화해서 아카이빙을 끝낸 곳도 있을 테고, 에어컨이라도 있는 자료실에 고이 모셔둔 양심은 있는 곳, 항온이나 방습 따위는 무시한 채 창고 어딘가 방치해 놓은 곳도 있을 테지요. 특히 하루하루 콘텐츠 제작하기에도 바쁜 지역 방송사들은 영상 자료의 중요함을 알면서도 과거(?)의 테이프에 인력과 장비를 투자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제 VCR도 생산이 중단되고, 얼마 안 있으면 부품 수급도 어려워질 겁니다. 유메틱은 지금도 재생할 수 있는 VCR 찾기가 쉽지 않아요. 테이프에 곰팡이가 피거나 서로 달라붙어 나중에는 지금의 몇 배, 아니 수십 수백 배의 비용이 들지도 몰라요. 현재 디지타이징 작업을 했거나 하고 있는 곳도 시간과 비용의 한계로 선택 보존하고 있는데, 감당할 수 없는 비용이 들게 되면 그때는 눈물을 머금고 폐기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여러 요인으로 단기간에 방송사 경영 상황이 좋아지지는 않을 것 같고, UHD도 준비해야 하는데, Tape Digitizing에 큰 예산을 쓰기는 더욱 힘들겠지요.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시작했어요. ‘제대로 아카이브를 구축하기 전에 일단 디지털 파일로라도 만들어 놓자!’ 회사에 있는 모든 테이프를 꺼내서 카테고리별, 시간대별로 분류했어요, 회사 한편에 공간을 만들고, NLE 두 대와 VCR, 스토리지로 한 조를 구성했어요. 오래된 것부터 하나하나씩. 테이프에 들어 있는 정보에 따라 어느 날은 하루에 10개도 정리하고, 또 어느 날은 Tape 한 개 정리하는 데 꼬박 이틀이 넘게 걸릴 때도 있었어요.
‘알바생이라도 쓰지, 그걸 영상기자가 하고 있어?’라는 얘기도 들었어요. 단순히 Tape를 캡처하고 파일로 출력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영상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메타데이터를 만드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기록이 남아 있는 테이프 자료는 비교적 정리가 쉽지만, 제목도 알 수 없는 테이프는 과거에 수기(手記)로 작성된 기사와 일일이 대조해 내용을 확인하고, 촬영 일자를 특정하기 위해 화면 속 현수막이나 작은 달력도 놓치지 않고 확인해야 했거든요.
NLE 한 대로 캡처받고, 다른 한 대로 파일 생성하고, 그렇게 1년 반을 작업했지만 작업량은 보유하고 있는 전체 테이프의 10분의 1도 되지 않습니다. 다른 업무와 병행했다 하더라도 거북이 같은 속도네요. 이대로라면 10년이 걸릴지, 20년일 걸릴지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더 고민이 필요하고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회사 자체 예산이 부족하다면, 정부가 추진하는 75조 원 규모의 디지털 뉴딜 사업에 지원해 보는 것이나 지자체와의 협업 등도 좋은 대안이 될지 모릅니다. 협회 차원에서 같이 고민할 필요도 있을 것 같고요.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도, 늦출 수도 없는 일이에요. 우리가 가진 보물들이 얼마나 온전한 형태로 우리를 기다려 줄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2020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요. 필자의 회사같이 아직 디지타이징 작업을 마무리하지 못하셨다면 올해가 가기 전에 회사에 방치된 Tape, 꼭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귀사(貴社)의 테이프(Tape)들 안녕하신지 말이에요.
김재욱 / MBC강원영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