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속 고궁 산책
▲ 올여름, 경복궁 근정전 앞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의 모습
“서울은 천박한 도시.”
지난여름, 여당 대표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서울을 가리켜 아파트값만 얘기하게 되는 천박한 도시로 표현해 논란이 됐다. 행정수도 이전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도중, 서울의 집값 문제 및 재산 가치로만 평가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한 발언이었다지만 논란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반은 맞고 반은 틀린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강남불패니 마용성, 노도강 하는 단어들을 떠올려보면 맞는 말이고, 서울이 조선왕조 500년에 근현대 100년을 더한 현재 진행형 역사 도시임을 생각해 본다면 틀렸다. 서울은 단순히 물질적 가치로만 평가할 수 있는 도시가 아님은 분명하다.
입사하며 시작된 서울살이가 어느덧 7년 차. 최근 몇 년 사이 나에겐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서울 시내 고궁 산책이다. 조선 500년의 수도였던 서울에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등 자그마치 5개의 궁궐이 있다. 취재 일정 중 비는 시간이나 철야 근무 후 쉬는 날이면 나는 고궁을 찾는다. 아스팔트와 보도블록으로 덮인 도심 길을 걷다가 고궁의 흙바닥을 걸으면 왠지 모르게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역사문화적 식견은 부족하지만 보이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이 내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한국의 전통미를 말할 때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라고 표현한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여유로이 고궁을 바라보고 있자면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다. 부드럽게 곡선으로 뻗어나가는 지붕 선에서, 오방색으로 물든 단청에서, 정전 앞 넓게 깔린 월대에서 그런 아름다움을 느낀다. 고궁을 걷다 인적이 드문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사색하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이다. 여러 취재 현장에서 느꼈던 복잡한 감정들이 사색 속에서 차분히 가라앉는다. 내 머릿속에도 여백의 미를 넣어주는 순간이다.
서울의 5대 궁궐 중 내가 가장 즐겨 찾는 곳은 창경궁이다. 창경궁은 왕이 아닌 왕의 부모인 상왕이나 대비 등이 기거하던 궁궐이었다. 그 때문에 경복궁이나 창덕궁에 비해 다소 소박한 규모로 권위보단 친근한 인간미가 느껴지는 공간이다. 또한 상대적으로 찾는 사람이 적고 울창한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어 혼자 여유롭게 산책하기에 좋다. 창경궁 내에 있는 연못인 춘당지는 창덕궁 후원과 더불어 서울에서 사계의 변화를 가장 아름답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여름이면 녹음이 푸르고, 가을이 되면 단풍이 물든다. 해설사 인솔하에 정해진 시간 동안만 관람이 가능한 창덕궁 후원과 달리, 창경궁 춘당지는 항시 자유관람이 가능해 훨씬 더 한가로이 계절의 정취를 즐길 수 있다. 선선한 날씨에 가을이 물들고 있는 요즘이 창경궁을 산책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다.
세계 10대 도시로 손꼽히면서도 600년 역사의 기품이 흐르는 곳이 바로 서울이다. 그리고 그 중심엔 도심 속 고궁이 있다. 경복궁 근정전에 서서 뒤를 돌아보면 광화문 너머 도심 속 빌딩들이 보인다. 고도(古都)의 궁궐 속에서 바라보는 높은 고도(高度)의 빌딩 숲 풍경은 이 도시의 품격을 느끼게 한다. 서울은 그렇게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다. ‘서울은 어떤 도시인가?’ 누군가 나에게 이렇게 묻는다면 서울의 고궁을 걸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라웅비 / MB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