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광변리사의 시 론]
자유경제와 경제민주화
우빠니샤드에서 말하는 인간 삶의 네 가지 목적은 다르마(dharma, 法), 아르타(artha, 富), 까마(kama, 樂), 목샤(moksa, 해탈)다. 다르마 규범에 어긋나지 않는 재물과 쾌락의 추구는 정당하며, 최종적으로 해탈의 성취를 돕는 것일 수 있다. 해탈의 문제는 차지하더라도 법질서를 기반으로 사회적 의무를 다하고 경제적 부와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상, 그것은 곧 우리 헌법의 지향점이다.
우리나라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하며(헌법 제119조 제1항), 경쟁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따라서 경쟁의 패배자는 상대방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
그러나 공평하고 정당한 경쟁은 완전한 자유방임이 아니라 규제가 수반된 환경에서만 보장될 수 있다. 이에 따라 경쟁질서의 왜곡을 금지하고 독과점의 폐해를 방지하기 위한 독점규제법, 타인의 노력에 부당하게 편승하거나 타인의 신용과 가치를 부당하게 훼손하는 방식의 이익 편취를 제재하는 부정경쟁방지법 등의 경업질서법(競業秩序法)이 마련되어 있다.
물론 경업질서법이 경제상의 평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선점자의 정당한 지위를 보장하며, 경제주체간의 불평등한 조건과 결과의 차이를 인정한다. 창의의 결과물은 지적재산권 제도를 통해 독점·배타적으로 보호된다. 자유경제질서의 영역에서 우리가 보장받아야 할 것은 ‘평등’이 아니라 ‘공정(公正)’이다.
자유경제 영역에서 선악은 ‘부의 크기’와 관계없다. 공정한 방법으로 형성된 부(富)는 어떠한 거부(巨富)도 선이고, 불공정한 방법으로 형성된 부는 소부(小富)도 악이다. 공정한 노력이 선이고, 부정한 방법이 악이다. 선한 부는 자유의 산물이지만 악한 부는 자유를 파괴한다.
선악이 ‘의도’에 따라 구분되는 것도 아니다. 철저히 사익을 추구했더라도 공정한 질서 속의 사익 추구는 선이다. 어차피 자유경제체제가 상정한 ‘합리적 인간’은 이타적인 인간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이다. 이타적이지 않더라도 ‘합리적 인간’으로서, 합법적으로 경쟁하여 얻어낸 부는 일단 선한 부로 간주된다. 반면, 대의명분을 품었더라도 불공정한 방법이 개입되는 순간부터는 악이다. 국가는 자유경제의 수호를 위해 ‘선한 부’를 장려하고 ‘악한 부’를 응징해야 한다.
‘악한 부’에 협조하는 국가 권력이 있다면, 그것은 자유경제라는 일체(一體)의 암 덩어리다. 체제의 존립을 위해 최선을 다하여 제거할 대상이다.
‘경제민주화’도 헌법상의 개념이다(헌법 제119조 제2항).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기 위해 부의 편중을 해소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다만 경제민주화의 가치는 합리적 인간만으로는 실현하기 어렵다. 여기에는 공익도 함께 추구하는 대승(大乘)의 정신이 요구된다. ‘선한 부’에도 의무가 지워진다. 공정한 룰을 지킨 당당한 승리자들에게 사회적 의무를 부여함으로써, 경쟁에서 패배한 자의 손실을 함께 부담하고 경쟁의 기회가 없었던 자를 경쟁의 무대로 끌어올리는 세상, 이것은 비효율적이고 비자연스러운 세계이다. ‘경제민주화’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어렵고 불편하다. 그러나 이 역시 국가의 몫이다. 도달하기 어려운 목표를 향해 용맹정진하여 헌법의 가치를 수호해야 한다.
대통령이 파면되면서, 대선이 얼마 남지 않게 되었다. 정치적 수사(修辭) 이면에 어떠한 가치가 녹아 있는가, 누가 어떤 방식으로 공정한 자유경제질서를 확고히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누가 어려운 길을 선택하고 누가 쉬운 길을 찾는가, 지엄한 언론의 정념(正念), 정견(正見), 정론(正論)을 기대한다.
조 성 광 박사
특허법인 세원 파트너 변리사
우리협회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