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 선생을 불러주시오!”
무더위가 한창이던 2004년 7월 16일 오후, 중국 상하이에 연수 중 이었던 나는 베이징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김 참사의 전화였다.
그가 힘이 센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가왕(歌王) 조용필을 불러 달라니, 일단 그의 정확한 지위와 제안의 진정성에 대한 확인이 필요했다.
조용필 당시 평양공연
남북교류에서는 남북관계의 특수성 때문에 비밀주의가 횡행한다.
'최고지도자의 측근이다', '권력핵심부와 바로 통하는 사람이다', '군부실세와 친하다' 등
도무지 검증할 수 없는 말들이 진실여부와 상관없이 효력을 발휘하고, 정체불명의 브로커들이 활동한다.
이럴 경우 확인방법은 두 가지이다.
일단 그가 북한 노동당의 대남사업기관인 <통일전선부> 즉 통전부 소속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통전부 소속원은 보통 외부활동을 할 때에 <민족화해협의회> 혹은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협회> 소속이라고 밝히므로, 이 두 기관 사람이면 신뢰할 수 있다.
또 하나는 뻥을 치느냐 아니냐를 보고 확인한다.
북한의 기관원들은 할 수 없는 일은 애매하게 대답하지만, 할 수 있는 일도 애매하게 대답한다.
모든 의사결정이 한 사람으로 집중된 북한사회에서 어느 누구도 확언을 해 줄 수 없다.
잘못 입을 놀렸다가는 언제 설화(舌禍)를 입을지 알 수 없다.
진짜 북한사람은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일하기보다는 가능한 자신에게 책임이 돌아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가능한 소극적으로 일한다.
따라서 큰 소리를 친다면 사기꾼일 가능성이 크다.
베이징과 서울에서 알려진 바로는 그가 혁명원로의 자제라는 것이었다.
최고학부인 김일성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하였고, 적어도 외국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몇 안 되는 북한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사무실에 가서 확인해본 결과 그의 주요사업은 무역업이었다.
그래서 김정일 위원장의 개인자금을 관리하는 <39호실> 소속으로 추정되기도 했다.
소속이 어디든, 중요한 것은 그가 조용필 공연을 수행할 능력이 있는지였다. 나는 확인된 내용을 정리해서 서울 본사로 보고했다.
팬이 있는 곳이라면 가수는 달려가야지!
SBS에서는 그와 협상을 계속하라는 답이 왔다.
김 참사는 지방공연도 가능하다면서 늦어도 9월 안에는 공연이 열리도록 해보자고 적극성을 보였다.
당사자의 의사가 중요했다.
나는 서둘러 서울로 돌아가 이남기 제작본부장과 조용필을 만나러 갔다.
이남기 본부장은 조용필과 직접 통하는 몇 안 되는 방송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조용필의 집은 방배동 서래마을의 고급빌라 3층이었는데, 저녁 시간이었지만 집 앞에는 소녀복장을 한 아주머니 세 사람이 서성이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 차를 보자 조용필로 착각하고 달려왔다가 이내 실망하며 돌아갔다.
그들의 손에는 여러 날 접었을 종이학을 가득 담은 바구니와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아직도 인기가 이 정도인데 조용필이 굳이 고생스럽게 평양까지 가서 공연을 할 필요성을 느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준비를 하는 스태프들의 방문이 잦기 때문인지 조용필의 거실은 사랑방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작곡 작업을 위해 노트북 컴퓨터에 연결된 스피커, 두툼한 악보뭉치, 그의 오랜 손 떼가 묻은 듯한 기타, 십 수 년 간 모아 둔 트로피는 대중예술사에 기록된 그의 위상과 무게를 느끼게 했다.
“조용필 씨, 평양 공연 한 번 가 봅시다.”
“내가 지금까지 북한 공연을 제안 받은 것은 한 서너 번 됩니다. 어떤 때는 반 협박성 제안을 받기도 했고…. 그러나 평양 공연이 과연 가능하기나 하겠어요?”
“조용필 선생님이 평양에 꽤 알려진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나는 남북한 관계의 불안정성 때문에 우여곡절은 있겠지만 북한 최고위층의 재가를 받아서 추진하는 사업이 분명하므로 실현 가능성이 크다고 설득했다.
조용필은 즉답을 피하고 술잔 내려놓은 채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짧은 정적을 이남기 본부장이 깨뜨렸다.
“가수는 팬이 있는 곳에 가야 할 의무가 있는 것 아닌가요?”
조용필은 갈등하는 듯 보였다. 일주일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이미 새벽 1시 반이 넘어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일단 공연제작진 구성부터 서둘렀다.
그리고 개성을 통한 육로방북을 추진하되 여의치 않을 경우를 대비해 일단 항공사, 해운회사와 접촉했다.
과거 계약서를 기초로 가계약서 문안도 준비했다.
공연 일자는 여유 있게 추석 때인 9월 말로 잡았지만, 시간이 빠듯할 경우에는 10월 초도 고려해 보자고 김 참사에게 통보했다.
조용필을 만난 지 사흘이 지난 날, 이남기 본부장으로부터 급하게 호출이 왔다.
조용필의 마음이 흔들린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조용필이 운영하는 YPC(YOUNG PIL CHO의 약자) 프로덕션의 김일태 사장도 동석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평양은 못 가겠습니다.
나는 가수입니다. 대중가수인 내가 정치적인 논란에 휘말리는 건 큰 부담입니다.
게다가 남북한 관계가 좋을 때라면 한 번 시도해 볼 수도 있지만 남북관계도 최악 상황이라는데,
하필이면 내가 이럴 때 꼭 가야 됩니까?”
“조용필 선생님은 이제 개인 조용필이 아니라 공인(公人) 조용필입니다.
공인은 공인으로서의 역사적인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남북으로 갈려 싸우고 있을 때, 공인인 조용필이 나서서 그 어려움을 타개할 역사적인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남북관계가 좋을 때 한가롭게 북한을 방문하는 것은 국민가수 조용필이 아닙니다.”
작곡용 노트북 자판을 가볍게 톡톡 치던 그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잠시 후 노트북을 닫더니 말문을 열었다.
“좋습니다. 평양 공연 한 번 가봅시다. 그리고 이왕이면 북한의 지방 순회공연도 한 번 해봅시다.”
나는 곧바로 조용필 옆에 앉아 결정을 기다리고 있던 김일태 사장과 공연 일자를 상의했다.
당시 진행되고 있던 전국투어 ‘2004Pil&Peace’의 일정을 고려하면 예정대로 9월 20일 경이나 10월 초가 좋다고 했다.
이제 북한과의 일정 조정만 남았다.
수송 차량 36대
조용필이 결심을 한 이상 이제 장비수송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이전의 다른 공연과 조용필 공연의 가장 큰 차이점은 평양까지 무대장비를 운송하는 일이었다.
2003년 10월 ‘류경정주영체육관 개관기념공연’ 때도 평양까지 무대장비를 운송했지만 그때는 육로를 통해서 인원과 장비가 모두 들어갔기 때문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육로 개방에 대한 확신이 없는데다, 장비의 규모도 그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컸다.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조용필 공연 무대의 폭만 170m 정도로,
공연에 소요될 전체 장비를 모두 수송하려면 5톤 트럭 50대가 필요하였다.
이런 물량을 나르는데 필요한 배의 공간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은데다,
전자장비의 경우엔 배에 싣거나 내릴 때 자칫하면 파손이 되므로 특별한 수송 방법이 요구되었다.
다음날 나는 인천과 북한의 남포를 오가며 화물을 실어 나르는 ‘트랜스포춘’호에 출항일정과 화물 선적을 문의했다.
화물차 50대 분량이면 컨테이너가 25개 소요되는데, 인천-남포 왕복일 경우 총비용이 1억 원 넘게 들었다.
트랜스포춘호 측은 남포항에는 선적장비가 갖춰지지 않아 짐을 싣고 내릴 때 파손될 가능성이 크다고 알려주었다.
조용필 측에서는 정주영체육관의 규모를 고려하여 무대 규모를 줄이고 필수적인 장비만 가져가기로 해 5톤 트럭 26대 분량으로 줄였다.
그러나 방송사의 발전차 5대와 중계차 5대를 추가하니 수송 차량만 36대가 되었다.
공연단과 참관단을 싣고 갈 전세기 확보는 이전에도 경험이 있어서 상대적으로 수월했다.
북한의 항공기는 150명 탑승에 비용이 8천만 원 정도 들었다.
남한 항공기는 300석 좌석에 비용은 6~7천만 원으로 오히려 적게 들었다.
우리는 남한 항공기를 선택했다.
항공사에서도 이런 역사적 행사에 자사 항공기를 이용하길 바라며 적극적으로 나섰다.
나는 진행 상황을 정리해 베이징을 통해 평양으로 팩스를 넣었다.
7번의 연기
베이징의 김 참사는 여유 있게 10월 15일이나 24일로 공연을 열자고 수정 제안을 했다.
10월 17일에 청주공연이 잡혀 있던 조용필 측은 일단 판매된 티켓을 환불하고 10월 15일 공연을 준비하기로 했다.
공연팀은 방북공연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불탔다.
남한의 공연을 평양에서 선 보였을 때 과연 관객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 했다.
이제 남한에서 진행되는 모든 공연은 평양공연을 위한 예행연습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매일 준비 상황을 체크했다.
그런데 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아직 평양 쪽에서 확답이 오지 않았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9월 25일 이전에 답이 오지 않으면 10월 15일 공연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베이징에 전화를 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는 대답뿐이었다.
김 참사도 답답한 건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9월 24일 연락이 왔다.
그러나 11월로 일정을 또 미뤄야겠다는 내용이었다.
조용필도 각오를 하고 있었는지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던 사이 10월 초가 지나갔다.
여전히 평양 측에선 별다른 기별이 없었다.
이러다간 11월 중순 공연도 불가능하게 될 가능성이 컸다.
조용필은 무한한 인내력을 발휘하며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중간에 선 나는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혹시 밤중에라도 연락이 올까봐 아예 전화기를 끼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던 중 부시 미국대통령이 북한은 ‘악의 축’이라는 발언을 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11월 공연도 물 건너갔다. 다시 12월 중순으로 공연이 미루어지다가 결국 해를 넘겼다.
2005년 새해에도 남북관계는 별 진전이 없어 보였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면 남북관계에서 방송은 정치의 종속변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비단 방송뿐이 아니다. 일반적인 문화교류나 경제적인 거래도 늘 정치적 상황에 민감하다.
남한에서는 ‘민간교류를 늘려서 남북관계의 긴장을 해소하고 평화를 정착시키자’고 주장하지만,
북한에서는 ‘정치적인 문제가 해결되어야 민간교류도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이른바 남한의 ‘기능주의’와 북한의 ‘구조주의’의 의견대립이다.
둘 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지만, 당장 짧은 시간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구조주의적 견해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그 사이 1월, 2월, 3월에 각각 한 번씩 만나 4월 공연에 합의를 했지만 또 무산되고 시간이 흘렀다.
봄날이 다 가고 다시 여름이 되었다.
여전히 북한 측으로부터는 소식이 없었다.
우리는 더 이상 타 들어 갈 속마저 남아있지 않았다.
조용필은 오히려 덤덤했다.
6월 30일 드디어 민화협 측으로 부터 팩스가 날아왔다.
공연을 8월 3일과 4일에 개최하자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7월 초 다시 개성 봉동관에서 만났다.
이번 협의는 이전보다 속도를 냈다.
시간이 많이 흘러 준비가 철저히 된 탓이기도 했지만, 양측 모두 이번 기회를 놓치면 기회가 없을 것 같은 절박감 때문이었다.
북한 측은 품위 있는 공연 무대인 봉화예술극장에서 공연을 열자고 제안했다.
체육관에서는 체육을 해야지 공연을 하는 건 사리에 맞지 않다는 논지였다.
개성 봉동관에서 열린 협의
우리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남한 측이 공사한 류경정주영체육관에 대해 북한 측은 보안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
따라서 요인들이 공연 참관을 하기에는 안심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봉화예술극장의 무대 폭은 38m로, 조용필이 준비한 ‘2005Pil&Peace’ 공연 무대 170m를 수용하기에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따라서 우리도 북한 측의 제안을 수용할 수 없었다.
우리는 물자의 육로수송은 양보할 수 있지만 공연 장소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고 버텼다.
북한 측과 협상을 해보면, 협상장에 참석한 북한대표는 자신들의 결정사항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협상이 더 이상 진전되기 어렵다.
양측의 입장이 워낙 첨예하게 대립되어서 회의는 일찍 끝나버렸다.
점심을 먹은 뒤 오후에는 별로 할 얘기가 없어서 서로 술잔만 기울이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봉동관은 비싼 식당이다. 덕분에 북한 식당 봉동관의 매출만 잔뜩 올려주었다.
7월 16일 현대아산 현정은 회장이 금강산에서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다는 보도가 나왔다.
정몽헌 회장 사후 오랜 기간 불편한 관계에 놓여있던 현대아산과 북한 측의 갈등이 봉합되는 자리였다.
현대아산은 북한 측과 백두산 관광에 대해서도 합의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김정일 위원장은 자신이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그 겨울의 찻집’ 등 조용필의 노래를 좋아한다면서,
공연을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열어도 좋다는 허락을 했다고 한다(나중에 현정은 회장이 확인해 줬다).
베이징에서 김 참사가 ‘조용필 선생을 불러주시오’라고 말한 지 정확히 1년이 되는 날이었다.
류경정주영체육관 앞에서 기념촬영(오른쪽에서 필자, 조용필, 서득원 촬영감독, 윤성아 작가)
평양에서 다시 협의를 진행하자는 연락이 왔다.
7월 30일, 공연 무대 설비를 담당하는 YPC 측 스태프를 포함한 우리 쪽 인원 10명이 베이징을 통해 평양으로 들어갔다.
순안 비행장 주변 넓은 들에는 뜨거운 햇살에도 아랑곳없이 사람들이 분주히 풀을 뽑고 있었다.
뜨거운 햇살 아래 대동강의 푸른빛이 한층 더 강렬하게 빛났다.
이 도시 한 가운데서 조용필의 노래가 울려 퍼질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뭉클했다.
대동강 가운데 있는 양각도 호텔에서 양 측은 마주 앉았다.
장소 문제가 해결된 뒤라 다른 협의는 대체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공연은 8월 23일 저녁 6시부터 2시간 동안 1회만 갖기로 했다.
지방공연에 대해서는 양측이 모두 부담을 가졌다. 인원은 양측 요구 안의 중간선인 163명으로 최종 확정됐다.
7번의 연기 끝에 최종 합의에 도달했다.
55분 거리
조용필은 경기도 광주의 연습실에서 마지막 연습에 들어갔다.
북한 측은 23곡의 노래 중 적어도 절반은 남북에 다 알려진 계몽기 가요(일제시대 대중가요)나 민요 혹은 북한노래를 불러주기를 요청했다.
조용필은 단호히 거절했다.
평양 관객들이 조용필의 노래를 들으러 오는 것이지 북한가요나 민요를 듣고 싶어서 오는 건 아닐 거라며,
미국가수 마이클 잭슨의 내한공연 때 우리관객들이 ‘그리운 금강산’을 듣고 싶어서 공연장을 찾았겠냐는 논리였다.
북한관객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지만 예술가로서 조용필의 고집은 일리가 있어 보였다.
조용필은 북한관객을 배려해서 북한가요를 단 두 곡만을 부르겠다고 했다.
이를 위해서 조용필은 100곡이 넘는 북한가요를 들었다.
그 가운데 인민배우 전혜영이 부른 ‘자장가’와 북한 가극의 삽입곡인 ‘험난한 풍파 넘어 다시 만나네’를 선택했다.
북한 측은 다시 ‘그 겨울의 찻집’과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공연 곡목 안에 꼭 넣어달라고 마지막으로 요청을 해왔다.
이번 요청을 수용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모든 연습과 준비가 끝났다.
8월 18일 오후 2시, 선발대 69명이 먼저 아시아나 전세기를 타고 평양으로 떠났다.
그리고 정확히 55분 뒤인 오후 2시 55분 평양 순안비행장에 도착했다.
서울과 평양의 거리는 결코 멀지가 않았다. (다음호에 계속)
오기현 / 전 한국PD연합회장, 한국PD연합회 통일특위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