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의 AI 도입, 기술과 상징 자본의 충돌
기술과 저널리즘 가치의 충돌을 넘어서 조직의 새로운 합의를 향해
지난해 폴란드의 공영 라디 오 방송인 오프 라디오 크라쿠프(OFF Radio Kraków)는 파격적인 시도를 했다. 모든 직원을 해고하고 AI만으로 방송을 진행하려 한 것이다. 방송국에서는 외모와 성격, 관심사 등을 설계한 3명의 AI 캐릭터를 만들었다. 인간이 개입하기는 했지만 AI 캐릭터들은 AI 도구로 재생 목록을 만들어 음악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직원들의 강력한 반발로 일주일 만에 종료됐다. 기 존 언론이 갖고 있던 하나의 규범(인간 진행 자의 권위와 역할)을 파괴하려던 것을 직업 적 위상과 전문성을 지키려는 담당자들이 저 항해 막은 것이다. 영국의 공영방송 BBC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BBC는 지난해 자동 자막 생성과 기 사 번역 서비스를 도입해 기술적 효율성을 높이려 했다. 하지만 일부 기자들은 자동 번역의 미묘한 표현 오류나 맥락을 고려하지 못 한 자동 자막의 실수를 우려했다. 같은 해 애플의 AI 기반 뉴스 요약 서비스가 BBC 기사 의 사실관계를 왜곡해 전달한 사건이 발생한 후, 기자들은 이러한 기술적 오류가 BBC의 오랜 전통인 신뢰성과 객관성이라는 저널리 즘적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뉴스룸 내부에서는 기술 의존도를 낮 추고 기자들이 엄격하게 팩트를 체크하고 검증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 강력해졌다.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특정 조직 내에서 서로 다른 ‘자본(capital)’, 혹은 가치를 두고 서로 다른 집단 간의 투쟁이 일어난다고 했다. 다양한 직종과 업무가 섞여 있는 방송국의 뉴스룸에서도 이러한 권 력 투쟁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뉴스룸 내에서 AI 기술 도입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대표적인 갈등은 ‘저널리즘의 수호자’인 기자 vs ‘효율성의 추구자’인 엔지니어의 대립 구도이다.
뉴스룸에서 통용되는 전통적인 가치는 기자들이 가진 ‘상징 자본(symbolic capital)’이다. 주로 명성, 신뢰, 영향력을 기 반으로 팩트 체크나 윤리적 판단과 같은, 기 자들이 오랜 기간 축적한 저널리즘적 가치 (journalistic values)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반면 엔지니어들은 자신들이 보유한 ‘기술적 자본(technical capital)’, 즉 전문 지식 등을 내세워 뉴스 생산 과정의 효율성과 비용 절 감을 주장하고 변화를 주도하려고 한다. 기자들은 기술의 효율성보다는 보도의 품 질, 즉 ‘상징 자본’을 보호하고 이 지점에서 엔 지니어 집단과의 갈등과 투쟁이 시작된다. 엔지니어들은 기자들과의 협업을 위해 인맥과 소통 능력 같은 문화적, 사회적(cultural and social capital) 자본을 활 용하며 영향력을 넓히려 한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조직 문화 의 장벽을 완전히 허물지 못하는 실정이다. 기술 인력들은 뉴 스룸 안에서 종종 주변적인 역할로 간주되고 특히 뉴스룸에 속한 데이터·디지털 팀 구성원들은 스스로를 “조직 내에서 인정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지위에 있다고 토로하기도 한다. 부르디외의 이론적 관점에서 보면 언론사의 AI 도입 문 제는 단순히 기술을 받아들이는 차원이 아니라 언론계 내부의 지위와 뉴스룸 내의 권력 재편 이슈와 직결돼 있다고 볼 수 있다.
기자들이 갖고 있는 직무 정체성 역시 AI 기술과 큰 충돌을 일으킨다. 기자들은 대체 적으로 자신을 ‘현장 속을 누비고’, ‘다가가기 어려운 진실에 접근해 사실을 가려내는’ 이야기의 주체로 규정한다. 하지만 AI가 기사를 작성하거나 편집 결정을 내리는 상황은 기자들의 이러한 특별한 정체성에 위협적일 수 있다. 뉴스 생산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책임성과 윤리 문제 역시 AI 도입으로 갈등이 발생할 수 있는 부분이다. AI가 사용된다면 잘못된 정보, 편견에 대한 지적이 나오는 기사에 대해 책임의 경계가 불분명해질 수 있다. 기술의 개발과 배포가 뉴스 제작 과정 의 중요한 요소이지만 많은 기자들이 AI를 자신과 동떨어진 추상적인 기술로 여기고 아예 관여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AI를 도입 하려면 뉴스 제작의 흐름을 바꾸고 새로운 협업 방식을 모색해야 하지만 기존의 관례를 깨고 새로운 업무 관행을 만드는 것이 언론사에서는 쉽지 않다. 뉴스룸의 AI 도입 지연은 기술적인 문제 가 아닌 사회적·구조적 문제이다. 언론 조직 내부의 문화적 저항과 긴장, 기자들과 기술 진 사이에 일어나는 자본의 충돌, 그리고 저널리즘 가치에 대한 시각차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변화의 속도가 조율되고 있다. AI가 언론 현장에 완전히 안착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새로운 도구를 도입하는 것을 넘어, 기존 직무의 정체성, 윤리 기준, 권력 구조에 대한 재해석과 조정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언론사의 뉴스룸이야말로 기술과 인간의 조화로운 공존 방안을 모색하는 노력 이 지속돼야 하는 곳이고, 그래서 한편으로 산업과 관계없이 AI 시대에 부합하는 새로운 표준을 제시할 수 있는 일터로서 가장 가능 성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오상연 M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