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방송 영상취재부 이상구
출발부터 순조롭지는 못했다. 김포공항에서 보딩 티켓을 받고 화물을 실으면서 우리는 항공사 직원들의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애써 외면하려 했다. 승객은 고작해야 일곱 명인데 산더미 만한 짐이 32개나 되었던 것이다. 취재장비만 해도 만만치 않을텐데, 혹한에 대비해서 방한 커버와 소형 발전기까지 챙긴 데다, 겨울 산행을 위해 방한복은 물론 고글이며 알파인 스틱까지 꽉 차있으니 짐을 어떻게 더 줄일 수도 없었다. 할인된 항공 티켓이라 해도 짐 값을 따로 내고 나니 결국 더 비싸게 비행기를 타게 됐다.
백두산을 가려면 심양까지 갔다가 다시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연길로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심양 공항에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물론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에 비하면 그다지 큰 일은 아니었지만 처음부터 우린 당황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화물 중 하나가 없어진 것. 공항 직원과 화물 찾는 곳을 여러 번 뒤져보았지만 허사였다. 게다가 이미 서울에서 2시간 정도 늦게 출발한지라 비행기를 갈아탈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없어진 품목과 수량을 체크하고 그냥 연길로 향하기로 했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이번에는 다른 데서 문제가 발생했다. 중국 국내선 보안 검색대에서 대뜸 우리 짐을 풀러 봐야겠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카메라 보온을 위해 준비한 손난로용 연료가 문제가 된 것이다. 김포 공항에서는 물론 아무문제가 없었다. 당황한 우리는 별로 위험 물질이 아니라고 영어로 손짓까지 해가며 설명하였지만 막무가내였다. 영어가 통하지 않을 뿐더러 자기네들끼리 뭐라고 수군대자 더 많은 공항직원들이 주위로 몰려들었다. 아직 취재도 시작하지 않은 시점에서 문제가 더 커질 것을 우려한 우리는 힘들겠지만 현지에서 구해보기로 하고 손난로용 연료를 일단 포기하기로 했다. 없어진 화물은 현지 여행사 직원에게 찾아 달라고 부탁해놓고, 손난로용 휘발유를 압수 당한 채 우리는 연길로 향했다.
백두산 천지 정상과 그 일대는 면적이 전라북도에 견줄만한 크기. 그곳을 몇 개 구역으로 나누어서 관리한다. 서백두 취재를 위해 우리는 백두산 서쪽 구역을 관할, 보호하는 직원들이 겨울 동안 임시 숙소로 사용하는 위동잠을 빌렸다. 위동잠은 우리 나라 산에 있는 산장과 비슷한 모양으로, 붉은 벽돌로 지은 단층 건물에 재래식 아궁이가 있고, 화장실이나 부엌은 따로 떨어져 있었다. 그리 넓진 않았지만 방 2개에 탐사대 20명이 그럭저럭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짐을 풀고 나서야 긴장이 좀 풀리기 시작했고, 위동잠을 베이스 캠프로 하고 왔다 갔다 하는 일정이라면 그런 대로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다음날, 산에서의 첫날은 이른 새벽에 시작되었다. 비록 서울에서 출발하기 전에 취재팀이 모여 취재계획과 내용, 일정 등을 어느 정도 협의하고 온 상태였지만 현지에 와보니 사정은 많이 달랐다. 평소 운동을 많이 했던 사람들도 아니고, 더구나 하루 6∼7시간의 눈길 산행은 바로 육체적 한계에 다다랐다. 날씨만 춥지 않았더라면, 계곡을 오르락 내리락 하고 원시림 사이를 헤치고 다니는 일쯤은 그런 대로 견딜 만 했겠지만 때마침 북서쪽에서 내려온 한기류에 기온까지 급격하게 떨어졌다. 정오에 온도를 측정해 보니 영하 24도였다. 매섭게 불어대는 바람에 체감온도는 더욱 낮아졌고, 시간이 갈수록 근육통이나 관절염 재발 정도는 이제 문제가 아니었다. 갑작스레 오른 혈압에 숨이 가빠지고 몇몇 사람은 겨울 산행용으로 등산 장비를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손과 발 그리고 얼굴에까지 동상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문제는 사람보다 기계였다. 해발 2천4백 미터 청석봉, 천지 아래에 도착해서는 카메라 한 대가 아예 추위에 얼어버린 것이었다. 해가 막 떨어지려는 순간이었다. 옆으로 길게 한 번 화면을 담고, 해를 클로즈업해서 촬영하려는데 카메라에 경고 등이 들어왔다. 난감했다. 뷰파인더 상에는 하얀 벌판위로 20세기의 마지막 해가 자취를 감추고 있었지만 테입은 돌아가지 않았다. 추위에 대비해 방한커버를 씌웠음에도 불구하고 낮에 5∼6시간 눈 속을 이동하는 동안 카메라가 속까지 얼어버린 모양이다. ENG카메라와 핸디캄을 이용해 입체적인 취재를 하려던 우리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는 듯했다. 심양 공항에서 압수 당한 손난로 생각에 분통이 터졌다. 할 수 없이 그곳에 텐트를 치고 야영을 했다. 텐트 안에까지 얼음이 얼어붙을 정도로 추웠고, 초조한 마음으로 내일의 일출 촬영을 위해 밤새 조그마한 버너 옆에서 카메라를 껴안고 밤을 지샜다. 이대로 잠들었다가는 이 눈 속에서 다시 깨어나지 못할 것만 같은 생각에 모두들 잠을 못 이루고 뒤척거렸다.
다음날 조심스레 카메라를 테스트한 결과, 다행히 카메라가 돌아갔다. 그러나 날씨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눈보라가 계속됐다. 결국 천지위로 떠오르는 붉은 해를 촬영하지 못한 채 아쉬움을 안고 하산해야했다.
천지의 장엄한 모습과 그곳에서의 일출을 촬영하지 못했다는 부담감에 우리는 다른 아이템이라도 좀 더 취재하기 위해 팀을 두 개조로 나누어서 움직이기로 했다. 한 개조는 정상 정복을 시도하고 다른 한 개조는 주변의 비경을 취재하기로 했다. 인원이 줄어든 만큼 이동 시간도 빨라졌지만 그만큼 개인 당 짊어져야 할 짐이 늘어나고, 그에 따른 위험부담도 커졌다.
우리는 좀 더 바쁘게 움직였다. 하지만 더욱 악화된 날씨로 어느 한 쪽도 순조롭게 일이 풀릴 것 같지가 않았다. 백두의 북쪽 정상까지는 관광지로 개발이 되어 길이 닦여 있었지만, 군데군데 눈이 쌓여있어서 스노우 모빌이나 자동차, 어느 것으로도 접근이 불가능했다. 또다시 걷는 수밖에 없었다. 쉽게 접근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북백두도 역시 만만치가 않았다. 정상에 거의 이르러서 흑풍구라는 지역을 통과 할 때에는 생명에 위협을 느낄 정도로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갑자기 돌개바람이 일면 일행 모두는 배낭을 짊어진 채로 그대로 땅에 철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 갑작스런 돌개바람에 대원 중 2명이 손목과 발목에 부상을 입었다. 그렇게 여러 번 위기를 넘기고서야 우리는 겨우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다른 조는 장백 폭포로 향했다. 국내에 방송CF 등으로 이미 많이 알려진 장백 폭포도 여름과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마스크를 벗고 기자 스탠드업을 하는 것은 모험이었다. 백두의 세찬 겨울 바람에 노출된 안면부위는 금새 얼어버렸다. 그러나 폭포 앞까지 얼어 있어 우리는 사상 최초로 장백폭포 바로 밑에서 근접 촬영하는 행운을 얻었다.
일주일 여를 백두산에서 지내면서 우리는 그동안 국내 언론에 소개되지 않았던 백두산 서쪽 지역(진주온천, 금강폭포. 금강대협곡, 노호배, 청석봉)과 한 겨울에 보는 백두산의 북쪽 비경(장백폭포, 지하삼림, 소천지, 천문봉)을 모두 취재할 수 있었다. 비록 백두산일대는 백두산 보호국의 협조를 받아 무사히 취재를 마쳤지만 중국 당국의 공식 취재 비자를 받아서 입국한 상태는 아니었기에 우리는 마지막까지 긴장의 고삐를 늦출 수 없었다.
돌아오는 길, 심양 공항을 통해 외화 반출이 예상된다는 첩보를 입수한 중국 세관원들은 가방을 하나하나 열어보며 검색을 철저히 하였다. 우리 차례에 와서는 테입 상자를 열어보며 촬영 여부까지 세밀히 물어왔다. 등골이 오싹했다. 만약에 촬영한 테입을 압수 당한다면 백두산에서 고생한 우리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감은 물론이고, 외교적 문제로까지 비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비무환이라 했던가. 서울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른 후, 전날 심양 시내에 도착하자마자 촬영한 분량만큼 베타 테입을 구입해 촬영 원본을 빼돌려 놓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백두산이 우리에게 달아준 훈장인 두 볼과 코끝의 동상은 귀국해서도 한동안 없어지질 않았다. 겨울 백두산 등정 취재에 나섰던 우리는 서로의 거뭇거뭇해진 얼굴을 보면서 산 속에서의 일들을 회상해본다. 그 험하다는 지옥훈련! 훈련은 잘못되어도 훈련으로 끝날 수 있지만 백두산 탐사취재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 있었기에 더욱 비장할 수밖에 없었다.
* 글쓴이 이상구 기자는 KBS 24기 촬영 기자로 이제 4년차가 되었습니다. 작년, 밀레니엄 특집을 위해 취재기자 3명과 장익환 촬영기자 선배와 함께 백두산 취재에 나섰다가 정말 많은 고생을 하고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KBS 원단기획으로 연초에 방영되었습니다.
출발부터 순조롭지는 못했다. 김포공항에서 보딩 티켓을 받고 화물을 실으면서 우리는 항공사 직원들의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애써 외면하려 했다. 승객은 고작해야 일곱 명인데 산더미 만한 짐이 32개나 되었던 것이다. 취재장비만 해도 만만치 않을텐데, 혹한에 대비해서 방한 커버와 소형 발전기까지 챙긴 데다, 겨울 산행을 위해 방한복은 물론 고글이며 알파인 스틱까지 꽉 차있으니 짐을 어떻게 더 줄일 수도 없었다. 할인된 항공 티켓이라 해도 짐 값을 따로 내고 나니 결국 더 비싸게 비행기를 타게 됐다.
백두산을 가려면 심양까지 갔다가 다시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연길로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심양 공항에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물론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에 비하면 그다지 큰 일은 아니었지만 처음부터 우린 당황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화물 중 하나가 없어진 것. 공항 직원과 화물 찾는 곳을 여러 번 뒤져보았지만 허사였다. 게다가 이미 서울에서 2시간 정도 늦게 출발한지라 비행기를 갈아탈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없어진 품목과 수량을 체크하고 그냥 연길로 향하기로 했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이번에는 다른 데서 문제가 발생했다. 중국 국내선 보안 검색대에서 대뜸 우리 짐을 풀러 봐야겠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카메라 보온을 위해 준비한 손난로용 연료가 문제가 된 것이다. 김포 공항에서는 물론 아무문제가 없었다. 당황한 우리는 별로 위험 물질이 아니라고 영어로 손짓까지 해가며 설명하였지만 막무가내였다. 영어가 통하지 않을 뿐더러 자기네들끼리 뭐라고 수군대자 더 많은 공항직원들이 주위로 몰려들었다. 아직 취재도 시작하지 않은 시점에서 문제가 더 커질 것을 우려한 우리는 힘들겠지만 현지에서 구해보기로 하고 손난로용 연료를 일단 포기하기로 했다. 없어진 화물은 현지 여행사 직원에게 찾아 달라고 부탁해놓고, 손난로용 휘발유를 압수 당한 채 우리는 연길로 향했다.
백두산 천지 정상과 그 일대는 면적이 전라북도에 견줄만한 크기. 그곳을 몇 개 구역으로 나누어서 관리한다. 서백두 취재를 위해 우리는 백두산 서쪽 구역을 관할, 보호하는 직원들이 겨울 동안 임시 숙소로 사용하는 위동잠을 빌렸다. 위동잠은 우리 나라 산에 있는 산장과 비슷한 모양으로, 붉은 벽돌로 지은 단층 건물에 재래식 아궁이가 있고, 화장실이나 부엌은 따로 떨어져 있었다. 그리 넓진 않았지만 방 2개에 탐사대 20명이 그럭저럭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짐을 풀고 나서야 긴장이 좀 풀리기 시작했고, 위동잠을 베이스 캠프로 하고 왔다 갔다 하는 일정이라면 그런 대로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다음날, 산에서의 첫날은 이른 새벽에 시작되었다. 비록 서울에서 출발하기 전에 취재팀이 모여 취재계획과 내용, 일정 등을 어느 정도 협의하고 온 상태였지만 현지에 와보니 사정은 많이 달랐다. 평소 운동을 많이 했던 사람들도 아니고, 더구나 하루 6∼7시간의 눈길 산행은 바로 육체적 한계에 다다랐다. 날씨만 춥지 않았더라면, 계곡을 오르락 내리락 하고 원시림 사이를 헤치고 다니는 일쯤은 그런 대로 견딜 만 했겠지만 때마침 북서쪽에서 내려온 한기류에 기온까지 급격하게 떨어졌다. 정오에 온도를 측정해 보니 영하 24도였다. 매섭게 불어대는 바람에 체감온도는 더욱 낮아졌고, 시간이 갈수록 근육통이나 관절염 재발 정도는 이제 문제가 아니었다. 갑작스레 오른 혈압에 숨이 가빠지고 몇몇 사람은 겨울 산행용으로 등산 장비를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손과 발 그리고 얼굴에까지 동상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문제는 사람보다 기계였다. 해발 2천4백 미터 청석봉, 천지 아래에 도착해서는 카메라 한 대가 아예 추위에 얼어버린 것이었다. 해가 막 떨어지려는 순간이었다. 옆으로 길게 한 번 화면을 담고, 해를 클로즈업해서 촬영하려는데 카메라에 경고 등이 들어왔다. 난감했다. 뷰파인더 상에는 하얀 벌판위로 20세기의 마지막 해가 자취를 감추고 있었지만 테입은 돌아가지 않았다. 추위에 대비해 방한커버를 씌웠음에도 불구하고 낮에 5∼6시간 눈 속을 이동하는 동안 카메라가 속까지 얼어버린 모양이다. ENG카메라와 핸디캄을 이용해 입체적인 취재를 하려던 우리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는 듯했다. 심양 공항에서 압수 당한 손난로 생각에 분통이 터졌다. 할 수 없이 그곳에 텐트를 치고 야영을 했다. 텐트 안에까지 얼음이 얼어붙을 정도로 추웠고, 초조한 마음으로 내일의 일출 촬영을 위해 밤새 조그마한 버너 옆에서 카메라를 껴안고 밤을 지샜다. 이대로 잠들었다가는 이 눈 속에서 다시 깨어나지 못할 것만 같은 생각에 모두들 잠을 못 이루고 뒤척거렸다.
다음날 조심스레 카메라를 테스트한 결과, 다행히 카메라가 돌아갔다. 그러나 날씨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눈보라가 계속됐다. 결국 천지위로 떠오르는 붉은 해를 촬영하지 못한 채 아쉬움을 안고 하산해야했다.
천지의 장엄한 모습과 그곳에서의 일출을 촬영하지 못했다는 부담감에 우리는 다른 아이템이라도 좀 더 취재하기 위해 팀을 두 개조로 나누어서 움직이기로 했다. 한 개조는 정상 정복을 시도하고 다른 한 개조는 주변의 비경을 취재하기로 했다. 인원이 줄어든 만큼 이동 시간도 빨라졌지만 그만큼 개인 당 짊어져야 할 짐이 늘어나고, 그에 따른 위험부담도 커졌다.
우리는 좀 더 바쁘게 움직였다. 하지만 더욱 악화된 날씨로 어느 한 쪽도 순조롭게 일이 풀릴 것 같지가 않았다. 백두의 북쪽 정상까지는 관광지로 개발이 되어 길이 닦여 있었지만, 군데군데 눈이 쌓여있어서 스노우 모빌이나 자동차, 어느 것으로도 접근이 불가능했다. 또다시 걷는 수밖에 없었다. 쉽게 접근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북백두도 역시 만만치가 않았다. 정상에 거의 이르러서 흑풍구라는 지역을 통과 할 때에는 생명에 위협을 느낄 정도로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갑자기 돌개바람이 일면 일행 모두는 배낭을 짊어진 채로 그대로 땅에 철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 갑작스런 돌개바람에 대원 중 2명이 손목과 발목에 부상을 입었다. 그렇게 여러 번 위기를 넘기고서야 우리는 겨우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다른 조는 장백 폭포로 향했다. 국내에 방송CF 등으로 이미 많이 알려진 장백 폭포도 여름과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마스크를 벗고 기자 스탠드업을 하는 것은 모험이었다. 백두의 세찬 겨울 바람에 노출된 안면부위는 금새 얼어버렸다. 그러나 폭포 앞까지 얼어 있어 우리는 사상 최초로 장백폭포 바로 밑에서 근접 촬영하는 행운을 얻었다.
일주일 여를 백두산에서 지내면서 우리는 그동안 국내 언론에 소개되지 않았던 백두산 서쪽 지역(진주온천, 금강폭포. 금강대협곡, 노호배, 청석봉)과 한 겨울에 보는 백두산의 북쪽 비경(장백폭포, 지하삼림, 소천지, 천문봉)을 모두 취재할 수 있었다. 비록 백두산일대는 백두산 보호국의 협조를 받아 무사히 취재를 마쳤지만 중국 당국의 공식 취재 비자를 받아서 입국한 상태는 아니었기에 우리는 마지막까지 긴장의 고삐를 늦출 수 없었다.
돌아오는 길, 심양 공항을 통해 외화 반출이 예상된다는 첩보를 입수한 중국 세관원들은 가방을 하나하나 열어보며 검색을 철저히 하였다. 우리 차례에 와서는 테입 상자를 열어보며 촬영 여부까지 세밀히 물어왔다. 등골이 오싹했다. 만약에 촬영한 테입을 압수 당한다면 백두산에서 고생한 우리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감은 물론이고, 외교적 문제로까지 비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비무환이라 했던가. 서울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른 후, 전날 심양 시내에 도착하자마자 촬영한 분량만큼 베타 테입을 구입해 촬영 원본을 빼돌려 놓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백두산이 우리에게 달아준 훈장인 두 볼과 코끝의 동상은 귀국해서도 한동안 없어지질 않았다. 겨울 백두산 등정 취재에 나섰던 우리는 서로의 거뭇거뭇해진 얼굴을 보면서 산 속에서의 일들을 회상해본다. 그 험하다는 지옥훈련! 훈련은 잘못되어도 훈련으로 끝날 수 있지만 백두산 탐사취재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 있었기에 더욱 비장할 수밖에 없었다.
* 글쓴이 이상구 기자는 KBS 24기 촬영 기자로 이제 4년차가 되었습니다. 작년, 밀레니엄 특집을 위해 취재기자 3명과 장익환 촬영기자 선배와 함께 백두산 취재에 나섰다가 정말 많은 고생을 하고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KBS 원단기획으로 연초에 방영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