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고원에서 폴란드의 대평원까지
- <칭기스칸 원정로를 가다> 동행 취재기
박영률(조연출 겸 동행 취재 작가)
분열에서 통합으로, 역사의 변방에서 세계사의 중심으로!
13세기 초 몽골고원에서 몸을 일으킨 가공할 회오리바람이 중앙아시아와 중동 동유럽에 이르는 세계의 대부분을 휩쓸었다. 회오리는 단순한 파괴에 그치지않고 동서를 하나로 이은 새로운 세계사를 창조하였다. 그리고 이 회오리의 중심에는 칭기스칸이라는 사내가 있었다.
칭기스칸! 그는 어떻게 골육상쟁을 일삼으며 강대국들에 이용만 당하던 부족들을 강력한 국가로 통합할 수 있었을까? 수렵과 목축에 종사하던 변방의 오랑캐들이 순식간에 세계를 휩쓸고 역사상 전무후무한 세계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힘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먼저 이는 황량한 몽골 고원과 천산산맥 너머의 사막과 오아시스로 이루어진 중앙아시아 5개국, 차도르의 나라 이란, 카스피해와 석유로 이루어진 아제르바이잔 그리고 폴란드의 대평원에 이르는 30,000Km 100여일간에 걸친 대 장정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함이었다.
1997년 4월 25일 16시 30분 우리가 탄 비행기는 화성표면처럼 황량한 초봄의 몽골고원에 내려앉았다. 나무 한 그루 없는 오렌지 빛 구릉아래 툴강은 늙은 뱀처럼 길게 허리를 틀고 있고, 그옆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낡은 아파트들, 성한 유리창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차들과 우리나라에서는 벌써 수십년 전에 사라진 전차, 거지소년들..., 울란바토르는 60년대의 한국을 연상시켰다. 탐사대는 MBC촬영팀 4명과 동아일보 2명, 대우 자동차 정비사 1명, 외부 학술 요원 1명 등 총 8명으로 앞으로의 험난한 일정을 함께할 다목적군이었다.예상했던 대로(?) 모든 일이 지연되었다. 우선 세관에서 차를 찾는 데만 여러 날이 소요되었다. 식량과 탐사 장비 점검, 차량 정비 그리고 몽골측 카운터 파트와 의견 조율 등등...,
5월 2일 드디어 출발, 혀찬사에 제공한 누비라 승용차 2대, 탐사팀에서 구입한 세렉스 트럭 1대와 지원유조차 1대(우리가 가는 구간에는 주유소가 없다)를 끌고 러시아 국경을 향해 대장정은 시작되었다.
출발 전 우리의 차량을 본 몽공현지인들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승용차로는 그 길을 절대 못간다는 것이다. 얼마 못가서 필시 되돌아 올 거라는 게 그들의 애기였다. 출발한 지 불과 몇 시간만에 우리는 그들의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지뢰밭 같은 돌밭, 끝없는 모래 수렁, 가파른 바위산들을 넘어 걸레가 된 타이어를 교체하고 구덩이에 빠진차를 밀며 우리는 전진했다. 마치 무슨 군사작전을 치르는 것처럼, 흡드로 가는 길에 만난 낙타대상은 자기는 태어나서 승용차를 처음 봤다며 자기 낙타와 우리차를 바꾸자고 조르기도 했다.
몽골의 대평원. 그것은 자유 그 자체였다. 보이는 건 구름아래 끝없는 벌판, 그리고 바람소리 바람소리뿐! 몽공의 해는 늦게 진다. 장거리 이동 후 촬영 포인트에 짐을 푼 뒤, 촬영을 마치고 해질 무렵에 돌아오면 어느새 시계바늘은 밤 11시를 가르키고 있었다. 촛불을 켜고 발전기를 돌려 배터리를 충전시켜놓고, 물 한 컵으로 몽골식 세우와 샤워를 마치고 나면 자정을 훨씬 넘겨 잠자리에 들곤 했다. 이러한 우리의 엄청난 노동강도에 현지인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는데 결국 희생자들은 우리와 함께 일했던 현지인 가이드 혹은 운전사들이었다. 몽골뿐만 아니라 몽골에서 폴란드까지 전 구간에 걸쳐 우리와 함께 일했던 가이드들은 우리와 헤어진 후 과로로 병원신세를 져야 했다.
촬영은 취재팀이 스스로 정한 몇가지 원칙에 따라 진행되었다. 첫째는 양보다 질을 우선한다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흥분해서 보이는 걸 모두 카메라에 담으려 하다면 초반에 거꾸러질 게 뻔하기 때무이었다. 대신 필요한 장소와 시간에 맞춰 원하는 그림을 담으려 했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정도 지켜졌다. 두번째는 휴식과 일을 구분한다는 것이었다. 이 역시 장기 촬영을 염두에 둔 배려이기는 했으나 이 원칙은 별로 잘 지켜지지 못했다. 왜냐하면 상황은 항상 돌발적이기 때문이었다.
반면 꼭 필요한데 타이밍을 놓쳐 어렵게 촬영을 마친 경우도 있었다. 바로 독수리 사냥씬이었다. 사막과 대초원 북구
- <칭기스칸 원정로를 가다> 동행 취재기
박영률(조연출 겸 동행 취재 작가)
분열에서 통합으로, 역사의 변방에서 세계사의 중심으로!
13세기 초 몽골고원에서 몸을 일으킨 가공할 회오리바람이 중앙아시아와 중동 동유럽에 이르는 세계의 대부분을 휩쓸었다. 회오리는 단순한 파괴에 그치지않고 동서를 하나로 이은 새로운 세계사를 창조하였다. 그리고 이 회오리의 중심에는 칭기스칸이라는 사내가 있었다.
칭기스칸! 그는 어떻게 골육상쟁을 일삼으며 강대국들에 이용만 당하던 부족들을 강력한 국가로 통합할 수 있었을까? 수렵과 목축에 종사하던 변방의 오랑캐들이 순식간에 세계를 휩쓸고 역사상 전무후무한 세계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힘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먼저 이는 황량한 몽골 고원과 천산산맥 너머의 사막과 오아시스로 이루어진 중앙아시아 5개국, 차도르의 나라 이란, 카스피해와 석유로 이루어진 아제르바이잔 그리고 폴란드의 대평원에 이르는 30,000Km 100여일간에 걸친 대 장정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함이었다.
1997년 4월 25일 16시 30분 우리가 탄 비행기는 화성표면처럼 황량한 초봄의 몽골고원에 내려앉았다. 나무 한 그루 없는 오렌지 빛 구릉아래 툴강은 늙은 뱀처럼 길게 허리를 틀고 있고, 그옆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낡은 아파트들, 성한 유리창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차들과 우리나라에서는 벌써 수십년 전에 사라진 전차, 거지소년들..., 울란바토르는 60년대의 한국을 연상시켰다. 탐사대는 MBC촬영팀 4명과 동아일보 2명, 대우 자동차 정비사 1명, 외부 학술 요원 1명 등 총 8명으로 앞으로의 험난한 일정을 함께할 다목적군이었다.예상했던 대로(?) 모든 일이 지연되었다. 우선 세관에서 차를 찾는 데만 여러 날이 소요되었다. 식량과 탐사 장비 점검, 차량 정비 그리고 몽골측 카운터 파트와 의견 조율 등등...,
5월 2일 드디어 출발, 혀찬사에 제공한 누비라 승용차 2대, 탐사팀에서 구입한 세렉스 트럭 1대와 지원유조차 1대(우리가 가는 구간에는 주유소가 없다)를 끌고 러시아 국경을 향해 대장정은 시작되었다.
출발 전 우리의 차량을 본 몽공현지인들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승용차로는 그 길을 절대 못간다는 것이다. 얼마 못가서 필시 되돌아 올 거라는 게 그들의 애기였다. 출발한 지 불과 몇 시간만에 우리는 그들의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지뢰밭 같은 돌밭, 끝없는 모래 수렁, 가파른 바위산들을 넘어 걸레가 된 타이어를 교체하고 구덩이에 빠진차를 밀며 우리는 전진했다. 마치 무슨 군사작전을 치르는 것처럼, 흡드로 가는 길에 만난 낙타대상은 자기는 태어나서 승용차를 처음 봤다며 자기 낙타와 우리차를 바꾸자고 조르기도 했다.
몽골의 대평원. 그것은 자유 그 자체였다. 보이는 건 구름아래 끝없는 벌판, 그리고 바람소리 바람소리뿐! 몽공의 해는 늦게 진다. 장거리 이동 후 촬영 포인트에 짐을 푼 뒤, 촬영을 마치고 해질 무렵에 돌아오면 어느새 시계바늘은 밤 11시를 가르키고 있었다. 촛불을 켜고 발전기를 돌려 배터리를 충전시켜놓고, 물 한 컵으로 몽골식 세우와 샤워를 마치고 나면 자정을 훨씬 넘겨 잠자리에 들곤 했다. 이러한 우리의 엄청난 노동강도에 현지인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는데 결국 희생자들은 우리와 함께 일했던 현지인 가이드 혹은 운전사들이었다. 몽골뿐만 아니라 몽골에서 폴란드까지 전 구간에 걸쳐 우리와 함께 일했던 가이드들은 우리와 헤어진 후 과로로 병원신세를 져야 했다.
촬영은 취재팀이 스스로 정한 몇가지 원칙에 따라 진행되었다. 첫째는 양보다 질을 우선한다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흥분해서 보이는 걸 모두 카메라에 담으려 하다면 초반에 거꾸러질 게 뻔하기 때무이었다. 대신 필요한 장소와 시간에 맞춰 원하는 그림을 담으려 했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정도 지켜졌다. 두번째는 휴식과 일을 구분한다는 것이었다. 이 역시 장기 촬영을 염두에 둔 배려이기는 했으나 이 원칙은 별로 잘 지켜지지 못했다. 왜냐하면 상황은 항상 돌발적이기 때문이었다.
반면 꼭 필요한데 타이밍을 놓쳐 어렵게 촬영을 마친 경우도 있었다. 바로 독수리 사냥씬이었다. 사막과 대초원 북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