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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캘커타의 ‘소나가치’라는 홍등가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

인도 홍등가의 작은 반란

도 규 만 | (에센스21 PD)

‘인도 홍등가의 작은 반란’은 도규만 PD가 모 일간지의 외신란에 난 기사를 보고 기획했다. 촬영장소는 소나가치였는데 이곳은 한국의 미아리, 청량리, 영등포와 같은 창녀촌으로, 창녀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조합을 만들어 캠페인을 하는 등 작은 반란을 벌이고 있는 곳이다. ‘인도 홍등가의 작은 반란’은 작년 5월 촬영한 것으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아시아리포트>에서 방송한 바 있다.

언제나 그렇듯 아이템은 ‘우연히’ 찾아온다. 인도의 소나가치라는 지명을 본 것 역시 그랬다. 모 일간지의 외신란에 난 작은 기사가 그 발단이었다. <인도 홍등가의 작은 반란>. ‘홍등가’라는 장소가 주는 야릇함과 ‘반란’이라는 단어와의 묘한 부조화. 프로그램이 갖춰야할 요소들은 두루 갖추고 있었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랬다.
신문이나 잡지 같은 활자화된 정보에 한 두 번 속은 것이 아니라서, 이번에는 차분히 마음을 먹고 자료조사부터 시작했다. 인도에 관한 한 가장 많은 정보량을 제공하는 BBC 홈페이지에 들어가 ‘Sonagachi’라는 단어를 두드리니 꽤 많은 양의 정보가 모니터에 떴다. 대부분의 기사는 1995년도에 일어난 캘커타(참고로 소나가치는 테레사 수녀의 도시 캘커타의 대표적인 홍등가가 위치한 곳으로, 서울의 영등포나 청량리쯤 되는 곳이다)의 섹스워커(제3세계에서는 창녀들에 대한 명칭으로 Sex-Worker라는 용어를 쓴다/이하 ‘매춘여성’이라 씀)들의 공개시위 이후의 활발한 활동들에 대해 연도별로 리포트하고 있었다. 그리고 뉴스위크에서도 특집으로 다룰 정도여서 거의 매춘 여성들의 ‘해방구’처럼 보였다.
현지 상황이 이 정도로라면 취재가 그리 어렵지 않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경찰과 포주들에 대항해서 몸싸움도 벌이고 가두캠페인도 할 정도라면 하고 싶은 만큼 취재할 수 있겠다는 일종의 ‘자신감’도 생겼다. 적어도 캘커타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1999년 4월 26일, 설레는 마음으로 캘커타에 도착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전까지 인도의 중심이었던 캘커타의 첫 인상은 회색이었다. 대부분 100여 년이 넘은 건물들. 도시의 일부분처럼 분간이 안 되는 검은 얼굴의 사람들. 너무나 자연스럽게 옆구리 쿡 찌르며 구걸하는 사람들.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땀방울. 첫 눈에 들어온 인도는 그런 이미지였다.
숙소에 여장을 풀고 곧장 도착한 곳은 MSC(Mahila Sammanya Commitee:여성협력위원회)본부. 캘커타 뒷골목 허름한 건물 지하에 들어있는 사무실에는 수십 명의 매춘여성들과 자원봉사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우리가 도착하자 MSC의 실질적인 지도자인 스마라지트 자나 박사(전염병 전문의)가 반갑게 맞았다. 간단히 인사를 하고 곧장 프로그램에 대한 협의에 들어갔다. 마침 취재기간이 메이데이(노동절)와 제2회 벵갈주 매춘여성대회와 겹쳐 있어서 행사도 많고 각종 언론기관의 취재도 많아 경황이 없을 듯 보였지만, 아시아 동쪽 끝의 작은 나라에서 ‘일부러’ 취재하러 왔다는 것이 고맙다며, 차분히 일정을 일러주고 각 행사와 자신들의 구체적 활동, 그리고 그 의미와 성과들에 대해 조목조목 짚어주어 취재포인트를 잡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한 두 시간쯤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소란스러워지면서 사람들이 우루루 사무실 밖으로 몰려나갔다. 무슨 일인가 싶어 부랴부랴 뒤따라갔더니 일행은 두 대의 트럭에 나눠 타고 캘커타 시내 중심부 광장으로 향하면서 각종의 구호와 전단지를 뿌리고 있었다. 거리캠페인이 시작된 것이다. 이제는 익숙해진 모습들이어서 그런지 시민들의 반응도 자연스러웠다. 구호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트럭에 걸린 플랭카드의 영문구호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Sex-Work is real work. We demand worker’s right(매춘노동도 노동이다. 우리는 노동자의 권리를 요구한다)”
그들 중 한 명이 마이크를 잡는다. “우리들이 요구하는 것은 안전한 노동이다. 우리들은 에이즈의 공포로부터 자유롭고자 한다. 우리들은 당신(남자)들에게 콘돔착용을 정당하게 요구할 것이다. 우리는 또한 경찰과 포주들의 부당한 억압에 대해서도 단호히 반대한다. 우리는 노동자로서 노동의 정당한 대가를 공정하게 나눌 것을 요구한다”. 노동자로서의 권리. 이들의 요구는 우리나라처럼 매춘금지가 아니다. 인도 역시 매춘은 불법이지만, 관계당국의 묵인하에 이루어지고 있다.

불법과 묵인의 굴레에서 자행되는 비인격적인 처우개선, 에이즈 확산방지를 위한 공개적인 요구들이 현재 소나가치에서 벌어지는 권익운동의 주류이다. 캠페인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의견도 동조의견이 대부분이었다. 그만큼 인도에서의 에이즈 문제는 심각한 지경이며, 이를 기반으로 해 시민사회에서의 보건문제에 대한 공감대 확산이 그녀들의 정당한 노동의 권리 요구로 진전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소나가치의 매춘여성들의 권익운동은 1992년에 시작된 세계보건기구의 에이즈 실태조사연구의 책임자였던 스마라지트 자나 박사로부터 시작됐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캘커타 홍등가에 유입되는 매춘여성들은 인도 및 인근 국가(네팔, 방글라데시 등)의 빈곤층 여성들이 대부분이다. 여전히 계급적 굴레에 강하게 결박돼 있는 인도사회에서 매춘여성들의 존재는 카스트 체계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최하위 카스트(out-cast)이다. 이들을 찾는 손님들 역시 릭샤(인력거)꾼과 같은 인도사회 최하층의 남성들이다. 오로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흘러 들어온 여성들과 단순한 성적인 욕구를 잔돈푼으로 해소하려는 손님들간의 밀거래에는 당연히 경찰과 포주의 비호가 뒤를 받치고 있다. 그리고 남존여비의 관념이 지배적인 사회분위기에서 비롯되는 폭력적이고도 비위생적인 성 관계의 일반화. 그 현실은 처참한 것이었다.
1992년 가을, 에이즈 실태 조사연구가 끝나자 캘커타 보건담당이었던 자나 박사는 캘커타市 및 웨스트벵갈州 인근의 에이즈 확산 실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주위의 동료의사들과 지역유지들을 규합해 매춘여성들의 보건을 책임지는 일명 ‘소나가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이고 생소한 이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자나 박사는 우선적으로 당사자들인 매춘여성들과 연대를 결심한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자나 박사는 지역단체들과 권력기관들과의 조화를 모색했지만 정작 저항은 그 여자들로부터 비롯됐다. 그녀들은 욕설을 퍼부으며 우리들을 거부했다”(아니마 바너지/MSC회원).
“우리는 점차 홍등가가 그 자체의 문화를 가지고 있고, 의사소통법도 다른 사회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캠페인의 방법도 일반적인 에이즈 예방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매춘여성 스스로 권리를 자각하고 스스로 그 권리를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인식했으며, 그들 스스로의 조직을 건설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판단하게 됐다”(스마라지트 자나 박사).
소나가치 프로젝트라는 자원봉사단체에서 매춘여성들이 주체가 되는 조직인 MSC가 창설된 것은 1995년이다. 우연한 사건이 그 발단이 됐다.

“기달불이라는 동네에서 4∼5명의 남자들이 여자아이들을 방에 가두고 채찍으로 때리고 담뱃불로 지지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죠. 이 소식을 듣고 약 1,200여명이 몰려가 몸싸움을 하고 그 남자들을 감금하고 경찰을 불러 우리 앞에서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는 공개사과를 받아냈지요. 그 일이 MSC 결성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사드나 무헤르지/MSC회원/아시아태평양여성기구 의장).
비합리적인 폭력에 대항하는 대응폭력에서의 자그마한 승리로 소나가치의 여성들은 조합을 결성하기에 이르고, 그해 11월에는 캘커타를 포함한 벵갈주전역의 매춘여성들의 공개집회를 개최했다.

캘커타대학 강당에서 치뤄진 1회 대회 후 5,000여명에 이르는 매춘여성들은 캘커타 시내를 행진했다. 이것이 외부에 공개된 최초의 매춘여성들의 집회로 기록된다.
현재 MSC의 활동은 크게 보건분야와 매춘여성들을 위한 각종의 활동으로 구분된다. 그 중에서 외부로 드러나는 것은 보건분야의 활동인데, 자나 박사를 중심으로 전문적인 의료봉사자들과 캘커타 일대 12개 장소를 거점으로 진행된다.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소나가치 및 캘커타의 군소 홍등가 내부에 위치한 보건소에서 매춘여성은 물론 그 가족, 그리고 홍등가에 들리는 손님들까지 각종의 성병과 기타 질병들을 무료로 진료해주고 치료해주는 활동들을 통해 MSC는 홍등가에 필수 불가결한 조직으로 자리잡는다. 매일 이 시간이 되면 MSC 회원들은 녹색가운을 입고 홍등가 곳곳을 돌아다니며 환자들을 돌보고 지나는 사람들에게 보건캠페인을 벌인다. 녹색가운 자체가 스스로 매춘여성임을 드러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나는 사람들이나 MSC회원 자체도 아무런 거리낌없이 대화를 주고받는다. 이러한 활동은 놀라운 결과로 드러난다. “소나가치에서 콘돔 사용자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1992년 당시 콘돔 사용자가 2∼3%였던 것이 1998년에는 무려 78%를 차지했고, 에이즈 감염률도 28%에서 12%로 격감했다”(스마라지트 자나 박사).
해외취재에서 긴장의 끈을 놓으면 항상 치명적인 결과가 발생한다. 취재원과의 원활한 협조관계가 유지되고 있다고 해도, 언제 어디서 돌발상황이 벌어질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취재 사흘째 MSC활동의 본거지인 소나가치의 본격 취재에 들어갔다. 도착해서 두 시간 가량 소나가치에 있는 그들의 사무실에서 전반적인 현황과 자원봉사자들의 활동상을 인터뷰하고 바깥으로 나왔다. 코디가 너무 마음을 놓지 말고 항상 회원들 가운데에 있으라고 여러 차례 경고했건만, 취재진 주위에 MSC회원들이 4∼5명씩 항상 둘러싸고 있어서 촬영에 지장을 느낀 나는 슬그머니 무리에서 이탈해서 홍등가의 다른 모습을 찍는 도중, 시커먼 남자들 5∼6명이 순식간에 나를 에워싸고 카메라를 뺐으려고 했다.
처음에는 그들 말로 시끌시끌하더니 어느새 옆구리로 차가운 금속성의 물체가 감지되고...아찔했다. 첫날부터 코디하던 친구가 조심하라고 했는데, MSC회원들과 같이 다니던 며칠 동안 경계심이 사라지고, 그들(MSC)의 힘을 너무 과신했던 것 같다. 잠시 당황스러워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녹색가운(녹색가운은 MSC회원의 상징이다)을 입은 MSC회원 10여명이 달려와 그 남자들을 몸으로 밀어내고 재빨리 나를 그들의 무리 가운데에 쏙 집어넣는 것이 아닌가? 그후로도 몸싸움은 30여분간 계속되고 그 남자들은 후퇴했다. 그날의 취재는 그걸로 끝나고 MSC사무실로 돌아와서야 경위를 알 수 있었다.
소나가치 프로젝트가 시작된 지 9년이 흘렀고, MSC가 결성된지도 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들은 소수였다. 오후 2시까지의 캠페인이 끝나면 그들은 다시 그들의 일터인 홍등가로 돌아가야 하고, 여전히 홍등가는 견고한 요새였다. 아직까지는 서로에게 이익이 되고(보건캠페인으로 대표되는 무료진료...), 홍등가 전체의 영업에 지장이 없기 때문에 포주나 깡패들이 그들의 활동을 묵인해주는 정전상태가 지속되고 있을 뿐 여전히 그곳에는 폭력과 억압이 횡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까지 인도 내부의 방송은 물론, 외국의 방송사도 비디오카메라로 취재한 적이 없는 험한 곳에 아무 생각 없이 카메라를 휘둘러 댔으니... 그래도 그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을 담아야 한다는 생각에 몇 번이고 자나 박사와 MSC측에 부탁을 했지만, 그들의 마지막 말에 더 이상의 무리를 감행하지 않기로 했다. 이러한 결정은 수 시간 동안의 대화의 마지막에 들은 자나 박사의 말 한 마디 때문이었다.
“어쩌면 당신은 프로그램을 위해 무리를 해서라도 그 그림을 찍어갈 수 있다. 우리들 몰래 찍어 가는 것까지 우리가 통제할 길은 없다. 당신이 그렇게 하고 싶다면 우리도 당신의 생명을 보호해 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당신이 떠나고 난 후에 우리들의 활동은 크게 위축될 것이다. 지금과 같은 우호적인 관계로 되돌리려면 상당한 시간이 흐를 것이다. 당신이 판단해주길 바란다”.
취재를 하다보면 어쩔 수 없는 욕심이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 욕심은 PD로서 프로그램을 대하는 일종의 스테레오타입에서 요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컨대 ‘홍등가의 매춘여성들이 활발한 권익보호투쟁을 한다...이들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수많은 어두운 삶의 편린들이 흩어져 있다...이들의 밝은 오늘은 짙은 어둠과 대비되어야만 더 빛을 발할 수 있다’는 등의 드라마 스토리가 머리 속에 박혀있는 것이고, 그 모든 것들을 비디오로 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현장에서 무리를 감행하게 하는 것이다.
그 당시 그들이 막무가내로 촬영을 중지시켰다면 나도 감정적으로 몰래카메라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촬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말대로 내가 떠난 후 그들의 활동이 어려움에 처한다면 프로그램이 어떠한 의미인가? 나는 왜 굳이 그 먼 곳까지 찾아갔을까? 나는 그들에게 무엇을 남길 것인가? 무엇보다도 그 현장이 있어야만 프로그램의 메시지가 전달되는가? 현장에 맞닥뜨려 있는 PD는, 특히나 <아시아리포트>와 같이 PD 혼자 현장에서 모든 판단과 결정을 해야 하는 작업에서는 예상치 못했던 돌발상황에서 순간적인 결정은 프로그램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매우 어려운 과제이다. 이번의 경우 소나가치 홍등가 여성들의 생생한 삶은 인터뷰로 처리했다. 실제 그들의 삶을 밀착 취재하는 대신 그들의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내게 신뢰를 가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때때로 현장에서는 취재원과의 우연한 의기투합이 되어 의외의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생기는데, 나의 경우 프로그램의 논리보다는 현장의 논리를 신뢰하는 편으로 결정을 내릴 경우 예상치 않은 도움의 손길이 벌어진다. 더 이상 홍등가의 삶에 대해 밀착 취재하거나 몰래 찍어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자, MSC측에서는 전날 밤 긴급회의를 열어 그들의 남은 활동에 대한 상세한 스케줄을 숙소로 통보해왔다. 스케줄을 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그들의 배려가 숨막히는 일정표에그득했기 때문이다.

취재 4일째. 우선 그들의 보건활동을 따라갔다. 소나가치 뒷골목에 허름하게 자리한 빈집을 개조해 임시보건소로 쓰고 있었는데, 환자들과 자원봉사자들로 가득했다. 섭씨 35도를 웃도는 살인적인 폭염을 천장에 매달린 선풍기 하나로 간신히 버텨내며, 싫증내지 않고 성실히 환자들을 진료하고 약을 조제해주며 주의사항을 하나하나 웃는 얼굴로 일러주는 자원봉사자들 중에는 외국인도 더러 눈에 띄었다. 두 시간 여의 취재가 끝나자 이번에는 우리들을 또 다른 거리캠페인의 현장으로 안내한다.
비합리적인 폭력에 대항하는 대응폭력에서의 자그마한 승리로 소나가치의 여성들은 조합을 결성하기에 이르고, 그해 11월에는 캘

커타를 포함한 벵갈주 전역의 매춘여성들의 공개집회를 개최했다.
캘커타대학 강당에서 치뤄진 1회 대회 후 5,000여명에 이르는 매춘여성들은 캘커타 시내를 행진했다. 이것이 외부에 공개된 최초의 매춘여성들의 집회로 기록된다.
현재 MSC의 활동은 크게 보건분야와 매춘여성들을 위한 각종의 활동으로 구분된다. 그 중에서 외부로 드러나는 것은 보건분야의 활동인데, 자나 박사를 중심으로 전문적인 의료봉사자들과 캘커타 일대 12개 장소를 거점으로 진행된다.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소나가치 및 캘커타의 군소 홍등가 내부에 위치한 보건소에서 매춘여성은 물론 그 가족, 그리고 홍등가에 들리는 손님들까지 각종의 성병과 기타 질병들을 무료로 진료해주고 치료해주는 활동들을 통해 MSC는 홍등가에 필수 불가결한 조직으로 자리잡는다. 매일 이 시간이 되면 MSC 회원들은 녹색가운을 입고 홍등가 곳곳을 돌아다니며 환자들을 돌보고 지나는 사람들에게 보건캠페인을 벌인다. 녹색가운 자체가 스스로 매춘여성임을 드러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나는 사람들이나 MSC회원 자체도 아무런 거리낌없이 대화를 주고받는다. 이러한 활동은 놀라운 결과로 드러난다. “소나가치에서 콘돔 사용자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1992년 당시 콘돔 사용자가 2∼3%였던 것이 1998년에는 무려 78%를 차지했고, 에이즈 감염률도 28%에서 12%로 격감했다”(스마라지트 자나 박사).
해외취재에서 긴장의 끈을 놓으면 항상 치명적인 결과가 발생한다. 취재원과의 원활한 협조관계가 유지되고 있다고 해도, 언제 어디서 돌발상황이 벌어질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취재 사흘째 MSC활동의 본거지인 소나가치의 본격 취재에 들어갔다. 도착해서 두 시간 가량 소나가치에 있는 그들의 사무실에서 전반적인 현황과 자원봉사자들의 활동상을 인터뷰하고 바깥으로 나왔다. 코디가 너무 마음을 놓지 말고 항상 회원들 가운데에 있으라고 여러 차례 경고했건만, 취재진 주위에 MSC회원들이 4∼5명씩 항상 둘러싸고 있어서 촬영에 지장을 느낀 나는 슬그머니 무리에서 이탈해서 홍등가의 다른 모습을 찍는 도중, 시커먼 남자들 5∼6명이 순식간에 나를 에워싸고 카메라를 뺐으려고 했다.
처음에는 그들 말로 시끌시끌하더니 어느새 옆구리로 차가운 금속성의 물체가 감지되고...아찔했다. 첫날부터 코디하던 친구가 조심하라고 했는데, MSC회원들과 같이 다니던 며칠 동안 경계심이 사라지고, 그들(MSC)의 힘을 너무 과신했던 것 같다. 잠시 당황스러워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녹색가운(녹색가운은 MSC회원의 상징이다)을 입은 MSC회원 10여명이 달려와 그 남자들을 몸으로 밀어내고 재빨리 나를 그들의 무리 가운데에 쏙 집어넣는 것이 아닌가? 그후로도 몸싸움은 30여분간 계속되고 그 남자들은 후퇴했다. 그날의 취재는 그걸로 끝나고 MSC사무실로 돌아와서야 경위를 알 수 있었다.
소나가치 프로젝트가 시작된 지 9년이 흘렀고, MSC가 결성된지도 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들은 소수였다. 오후 2시까지의 캠페인이 끝나면 그들은 다시 그들의 일터인 홍등가로 돌아가야 하고, 여전히 홍등가는 견고한 요새였다. 아직까지는 서로에게 이익이 되고(보건캠페인으로 대표되는 무료진료...), 홍등가 전체의 영업에 지장이 없기 때문에 포주나 깡패들이 그들의 활동을 묵인해주는 정전상태가 지속되고 있을 뿐 여전히 그곳에는 폭력과 억압이 횡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까지 인도 내부의 방송은 물론, 외국의 방송사도 비디오카메라로 취재한 적이 없는 험한 곳에 아무 생각 없이 카메라를 휘둘러 댔으니... 그래도 그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을 담아야 한다는 생각에 몇 번이고 자나 박사와 MSC측에 부탁을 했지만, 그들의 마지막 말에 더 이상의 무리를 감행하지 않기로 했다. 이러한 결정은 수 시간 동안의 대화의 마지막에 들은 자나 박사의 말 한 마디 때문이었다.
“어쩌면 당신은 프로그램을 위해 무리를 해서라도 그 그림을 찍어갈 수 있다. 우리들 몰래 찍어 가는 것까지 우리가 통제할 길은 없다. 당신이 그렇게 하고 싶다면 우리도 당신의 생명을 보호해 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당신이 떠나고 난 후에 우리들의 활동은 크게 위축될 것이다. 지금과 같은 우호적인 관계로 되돌리려면 상당한 시간이 흐를 것이다. 당신이 판단해주길 바란다”.
취재를 하다보면 어쩔 수 없는 욕심이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 욕심은 PD로서 프로그램을 대하는 일종의 스테레오타입에서 요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컨대 ‘홍등가의 매춘여성들이 활발한 권익보호투쟁을 한다...이들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수많은 어두운 삶의 편린들이 흩어져 있다...이들의 밝은 오늘은 짙은 어둠과 대비되어야만 더 빛을 발할 수 있다’는 등의 드라마 스토리가 머리 속에 박혀있는 것이고, 그 모든 것들을 비디오로 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현장에서 무리를 감행하게 하는 것이다.
그 당시 그들이 막무가내로 촬영을 중지시켰다면 나도 감정적으로 몰래카메라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촬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말대로 내가 떠난 후 그들의 활동이 어려움에 처한다면 프로그램이 어떠한 의미인가? 나는 왜 굳이 그 먼 곳까지 찾아갔을까? 나는 그들에게 무엇을 남길 것인가? 무엇보다도 그 현장이 있어야만 프로그램의 메시지가 전달되는가? 현장에 맞닥뜨려 있는 PD는, 특히나 <아시아리포트>와 같이 PD 혼자 현장에서 모든 판단과 결정을 해야 하는 작업에서는 예상치 못했던 돌발상황에서 순간적인 결정은 프로그램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매우 어려운 과제이다. 이번의 경우 소나가치 홍등가 여성들의 생생한 삶은 인터뷰로 처리했다. 실제 그들의 삶을 밀착 취재하는 대신 그들의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내게 신뢰를 가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때때로 현장에서는 취재원과의 우연한 의기투합이 되어 의외의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생기는데, 나의 경우 프로그램의 논리보다는 현장의 논리를 신뢰하는 편으로 결정을 내릴 경우 예상치 않은 도움의 손길이 벌어진다. 더 이상 홍등가의 삶에 대해 밀착 취재하거나 몰래 찍어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자, MSC측에서는 전날 밤 긴급회의를 열어 그들의 남은 활동에 대한 상세한 스케줄을 숙소로 통보해왔다. 스케줄을 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그들의 배려가 숨막히는 일정표에그득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거리캠페인은 소나가치를 지역별로 나눠 10명 단위로 조를 짜서 가가호호 방문하여 콘돔을 나누어주며 성병 및 에이즈예방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이다. 거리캠페인 역시 소나가치의 거리에서 하는 일이라 전날의 경험도 있고 해서, 불필요한 의심을 살 행동은 아예 하지 않았다. 카메라를 들고 그들이 찍어도 좋다는 사인이 왔을 때 버튼을 누르고, 곤란하다는 표시를 해주면 즉시 카메라를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몇 번을 그러다 보니 어제의 그 깡패들과 포주들도 먼발치에서만 지켜볼 뿐 접근하거나 더 이상의 시비를 걸지 않았다. 오히려 그 중의 일부가 다가와 웃으면서 무엇을 취재하는지 물어도 보고 예상치 않게 즉석 인터뷰도 했다.
이들과 2시간 가량 취재하고 취재진이 도착한 곳은 허름한 집의 옥탑 방. 영문도 모르고 들어선 그곳에서는 글을 가르치고 있었다. 대부분 문맹인 매춘여성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자각하는 가장 빠른 길은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그들의 눈으로 정확히 보는 것이다. 이를 위한 가장 적절한 방법은 글자를 깨우치는 일이기 때문에 일종의 야학 같은 이곳에서, 자원봉사자들과 매춘여성 중에서 글자를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이 자원해서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자그마한 이런 종류의 교육은 매우 커다란 의미를 갖고 있다. 이곳에서 글을 가르치는 매춘여성이자 교사인 미투 닷의 말이다. “교육을 받기 전까지 우리들은 아무 것도 몰랐다. 때리면 맞고 돈 안주고 도망가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들은 읽고 쓸 수 있다. 그러면서 우리들은 자신을 깨우쳐가고 있다”.
다음날 아침 취재진이 도착한 곳은 홍등가에 사는 아이들의 작은 학교였다. 가난은 대물림되고 아버지도 모르는 채로 태어나 빈민계층으로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과 그들의 어머니들에게 교육이란 꿈도 꿀 수 없는 사치품이었다. MSC가 주목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었다. 어머니들의 교육 못지 않게 아이들의 교육도 중요하다는 것. 골목길을 들어서자 낭랑한 아이들의 목소리가 가득하다. 2평 남짓한 공간에 바글바글한 아이들. 초롱한 그들의 눈망울들. 그들의 희망을 물어봤다. 아직 세상의 굴곡을 모르는 아이들의 천진한 꿈이 오롯하다.
하지만 그들의 희망에는 어쩔 수 없이 홍등가의 삶이 배어있다. “경찰이 되어 우리 엄마 못살게 구는 깡패들을 잡을 거예요”, “의사가 되어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 줄 거예요”, “선생님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싶어요”... 세상의 부조리함과 그 부조리함을 바꾸려는 동네아줌마들의 삶이 아이들의 꿈으로 투영된 게 아닐까?
이제 취재의 마지막이다. 4월 30일 메이데이 전날 캘커타대학 강당에서는 제2회 벵갈주 매춘여성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1995년 1회 대회 이후 4년 만이다. 아침부터 후끈 달아 오른 캘커타의 열기는 계속되었고 강당 안으로 들어서자 캘커타 인근에서 모인 3,000여명의 매춘여성들로 가득하고, 그간의 경과와 성과들이 발표될 때마다 박수와 환호가 가득하다.
대회 마지막 순서로 소나 가치프로젝트 깃발을 선두로 MSC 본부깃발, 각 지부의 깃발들이 연단을 가득 메우고, 연단에 있는 사람들과 강당에 모여있는 사람들이 손을 맞잡고 부르는 “We shall overcome (우리 승리하리라)”가 울려 퍼지자 곳곳에서 감격의 눈물이 흐른다. 대회장을 나선 이들은 각종의 구호를 적은 플랭카드와 깃발을 들고 캘커타 시내를 가로질러 MSC 본부와 그 인근도로에 삼삼오오 모여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저녁 7시가 되자 마치 그림자가 살아나오 듯 사람들이 소나가치 한복판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메이데이 노동절 시위가 시작된 것이다. 이들을 옭아매었던 삶의 현장에서 목청껏 그들의 요구를 외친다. 소나가치를 빠져 나와 캘커타 중심부를 지나면서 어느새 준비된 횃불에 불을 붙이고 가로등 하나 없는 캘커타의 어둠을 밝히는 등신불의 모습에서 그들의 과거와 빛으로 나아가는 지난한 발걸음을 본다. 가슴 한 구석 묵직한 무언가가 내려온다. 캘커타를 떠나면서, 그리고 1년여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녀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나는 이 한마디의 말을 건졌다.
“(지난 5년간) 많은 것을 얻었지요. 세상에 돈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인간을 존중하는 것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배운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제가 당신 앞에 앉아있을 수 있는 것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이제야 눈을 떴습니다. 전에는 어두움에 버려져 있었고, 아직도 그 어두움 속에 갇혀있는 자매들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그들에게 빛을 주려고 합니다. 그 소중함을 알기 때문이지요(만주 비스와스/MSC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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