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김선일씨를 취재하고…
6월임에도 불구하고 폭염이 내리쬐던 6월의 아침… 한국청년 한 명이 이라크의 무장단체에 둘러싸여 눈물로 하소연하는 모습을 보면서 걱정과 안타까움을 느끼며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출근길에 나섰다. 그로부터 몇 분 후 부산으로 출장을 가라는 데스크의 취재지시를 받는 순간, 피랍된 한국인 김선일씨에 관련된 취재임을 직감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앞으로의 일정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장비를 챙기고 수원에서 부산까지 고속도로로 내려갔다. 점심도 대충 휴게실에서 먹고 서두른 덕분에 오후 3시경에 부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김선일씨의 집 앞은 취재진들과 중계장비들로 좁은 골목이 더욱 더 비좁게 되었고, 평소 조용했던 동네도 낯선 이방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뤄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첫날은 부산의 습한 새벽공기를 맞으며 밤을 꼬박 샜다. 주위의 다른 기자들도 나와 마찬가지였는데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자리를 뜰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장단체가 제시했던 24시간의 시간이 그렇게 조금씩 지나가고 있었다. 다시 골목에서 대기하는 상황이 연 이틀 이어졌다. 옷은 점점 더러워져가고 땀에 젖은 속옷은 몸에 착 달라붙어 불쾌했다. 출장준비를 할 틈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단벌신사(?)’의 처지였다. 힘든 몸을 가누며 골목에서 다른 기자들과 같이 대기하던 무렵… 무장단체가 예고한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자 낙관적인 전망이 각 방송사에서 쏟아졌다. ‘이제 곧 돌아갈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에 힘든 줄도 모르고 취재를 계속할 수 있었다. 기뻐하는 김선일씨의 식구들 모습을 보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뉴스에서는 계속해서 기뻐하는 김선일씨의 부모님들의 모습이 방영되었고, 그때까지 그가 피살되리라고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게 평온하게 지날 것 같았던 상황은 언론사들에게 ‘오보’라는 불명예를 씌우는 상황으로 급변했고, 대한민국의 한 청년은 낯선 이국 땅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사라졌다. 소식을 접한 가족들의 오열의 순간을 취재하면서 나의 가슴속에는 분노와 안타까움이 교차하였고, 어느덧 그들을 바라보던 뷰파인더는 땀과 눈물로 얼룩져 잘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취재는 끝났다.
힘들었던 취재였지만, 느낀 점도 많았고 카메라기자로서 조금은 성장한 기분이다.
끝으로, 언론사들의 치열한 취재경쟁에 상처 입은 유가족들에게는 사과의 말을 전하고 싶고, 고인이 된 김선일씨의 명복을 빈다. 또, 부산에서 따뜻하게 대해주었던 부산지역 카메라기자 선배님들께도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경인방송 영상취재팀 양태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