씻겨나가 평평해진 도시 - 반다 아체 [TV카메라기자17호]
임우식 기자 SBS뉴스텍 영상취재팀
땅에 서 있는 모든 것들이 폭삭 주저앉았다. 해일에 휩쓸린 도시에서는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괴로움이었다. 그것이야말로 마지막 재앙일지도 모른다. 복구의 삽질로 큰 길은 뚫렸지만, 한 발만 벗어나면 부패한 시체가 널려 있고, 다리 밑으로 흐르던 강은 시신의 바다가 되어버렸다. 대체 무엇이 사람이고 무엇이 쓰레기인지.. 그나마 비닐에 싸여있는 시신은 운 좋은 편에 속했다. 썩은 냄새가 진동하고, 사람이 떠나버린 텅 빈 거리에 유난히 많은 개, 고양이가 배외하던 도시-반다 아체. 으스스한 침묵만이 짙게 감도는 그 곳을 다녀왔다.
아체는 분리독립운동으로 무력 충돌이 계속되는 내전지역이다. ‘제2의 동티모르’를 꿈꾸는 반군과 이를 저지하려는 정부군 사이에선 밤낮을 바꿔가며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다. 자연히 외부와의 왕래는 제한적으로 이뤄지고 있으며, 자국인 조차도 사전 승인을 받아야 접근할 수 있다고 한다. 인도네시아로 향하며 비자를 받았는데, 자카르타에서 정부 허가증을 다시 받아야할 정도였다. 번거로웠지만 해외 출장시 그 나라의 절차를 무시했다가 나중에 더 큰 난관에 봉착할 수 있기에 스스로가 참고 서두르는 게 상책이다. 그런데 그 허가증이 모든 걸 허락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정부군의 검문만을 통과시켜줄 뿐 갈등지역에서의 안전은 순전히 운에 맡길 수밖에.
12월 30일. 아체에서 12시간 거리의 메단이란 도시에서 출발 준비를 했다. 외신을 체크하며, 아체에 다녀 온 사람들을 만나 현지 사정을 종합해 보았다. 단전, 단수에 도시는 암흑이요 묵을 곳도 없으며, 현지에 기름이 없어 차조차 운행할 수 없다고 했다. 온통 비관적인 소문만이 들렸다. 만반의 준비가 없다면 자칫 들어가는 것만이 전부가 될런지도 모를 일이었다. 방송 장비와 최소한의 옷가지만을 챙긴 채 차의 남은 공간엔 휘발류와 식량, 물을 실었다. 이럴 필요까지 있을까란 의문이 맴돌았지만, 만에 하나의 경우를 가정하며 우린 파도에 사라진 폐허의 땅으로 향했다.
그림 같은 적도의 야자수, 화들짝 놀란 길가의 원숭이, 통행세를 강요하는 동네 소년들의 아우성이 귀찮아지고, 좀이 쑤셔 안절부절 못한 채 머리가 멍해져서야 아체는 그 실체를 드러냈다. 도시 초입은 아주 활기찼다. 모든 이들이 분주히 오갔으며, 동남아 특유의 찜통 더위와 버무려진 매연이 익숙했다. 이곳에서의 폭동도 내전도 터무니없어 보였다. 다만 트럭위에 무리져 있는 사람들 입에 걸린 마스크가 유독 눈에 띄었다. 흉조였다. 마스크가 원래 자신과 세상과의 입, 코를 통한 교류를 차단하려는 것이 아닌가. 사스때에도 시위할때에도... 나는 어느새 소문같은 보도 현장에 성큼 다가온걸 비로소야 느꼈다. 아체의 충격적인 모습에 정복당하는 느낌처럼 말이다.
프레스 센터라고 임시로 마련된 공간에는 각국의 기자들이 이미 보도에 한창이었다. 역시 취재진은 변신의 귀재였다. 뻘 잔뜩 묻은 장화에 시커먼 마스크 그리고 얼굴엔 누런 땟국물.
그들 옆에 취재장비가 없다면 누가 그들을 기자라고 보겠는가? 영락없는 구호요원의 모습이자 며칠 후 내 모습일게다. 취재란게 현장 속에 자신을 내맡기는 작업이 아니던가.
위성안테나의 크기와 지름은 방송국 사세의 시금석이었다. 대재난 앞에서 속보전의 승자라는 세계 굴지의 방송사들이 커다란 안테나를 뽐내듯 펼쳐놓았고 인도네시아 방송사들도 나름의 텃세를 보였다. 그땐 우리가 계약한 위성송출사가 들어오기 전이어서 이를 대비한 휴대용 화상위성 전화를 통해 회사와의 연결을 꾀해야 했다. 외신들의 커다란 위성안테나 사이에서 작은 안테나로 하늘을 향해 틈새 자리를 찾아가며 말이다. 비록 화질은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그나마 연결이 돼 얼마나 고맙고 신기했는지 모른다.
위성사진마저 바꿔 놓은 대재앙의 현장. 밥상이 놓여 있던 자리는 진흙더미가 쌓였고, 호텔앞에는 난파선이 처박힌 곳이 허다했다. 해안에서 3-4km 안팎은 쑥대밭으로 변해버렸고, 길을 내며 양측으로 밀어버린 자재들 사이로 불쑥 시신들이 보였다.
처음엔 그 파괴의 섬뜩함에 놀라 진저리를 치곤했는데 금새 익숙해져 버렸다.
숙소를 정하지 못하고 노숙을 하며 제대로 씻지 못하고 돌아다니던 것. 참을만했다.
야밤에 시 외곽에서 돌아오던 중 길을 막았던 큰 야자수 나무 - 대개 반군이 일부러 길을 막기 위해 나무를 쓰러뜨리는 수법을 쓴다는 걸 숙지했던 터라,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잊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넌더리가 나는 것은 지구의 살아있는 움직임 - 지진이었다.
일과를 마치고 하릴없이 지루한 휴식에 빠져 방바닥에 철퍼덕 누워 있으면 “우~~~웅~~”소리와 함께 전등이 흔들리고 벽이 좌우로 천천히 왔다갔다 한다. 누군가 흔드는 것 같다. 벌떡 일어나 보지만 어지러울 뿐 도무지 몸이 잔뜩 겁을 먹어 움직이질 않는다.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는 눈동자만 심하게 흔들릴 뿐. 지진은 혼자 있으면 이게 그 진위가 의심스러워지는데 두 눈이 요동치다 마주쳐 비로소 시선이 엇갈리면 그때서야 지진이 왔음을 알아차린다. 잠시 잠잠해질 쯤 밖으로 짐을 챙겨 뛰쳐나가기를 여러 번. 리히터 5.4의 강진이었다는데. 지진 대비 훈련은 확실히 한 셈이다.
피해 직후 전세계에서 구호의 손길이 물밀 듯 밀려와 되려 넘쳐났다고 한다.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아체는 지금 단시일 내에 회복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도시 기능 회복에만 20년이 걸릴 것이라고 한다. 비록 깜짝 취재의 기억은 빠르게 망각의 늪으로 빠져들어 갈 것이다. 제트 속도의 쓰나미보다 더 빠른 인류 도움의 손길이 절실하다. 벌써 20년 후의 아체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