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지역 폭우, 취재를 마치고>
수재민 여러분, 힘내세요!
모처럼 쉬는 날이었던 지난 15일. 큰 비가 온다는 예보는 있었지만, 강원도는 대부분 8-9월 태풍 외에는 큰 비 피해가 없었던 터라 “상황 대기만 하면 되겠지”라는 속편한 생각으로 주말을 맞았다.
잠결에 울리던 벨소리. 직감적으로 사고가 났구나하는 생각에 핸드폰을 받자 아니나 다를 까 양양과 인제지역에서 비피해가 발생했다는 선배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나는 씻지도 못한 채 사무실로 뛰어나가 무작정 한계리로 출발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 취재차 앞 유리창에 퍼지는 빗방울의 크기에 지난 태풍 루사와 매미의 때의 상황이 떠올랐다. 그동안 재난, 재해를 많이 겪었던 영동지역 기자들은 빗방울이 앞 유리창에 번지는 크기가 백 원짜리 동전 크기를 넘어가면 피해 발생이라는 경험적인 공식이 성립돼 있었다.(참고로 지난 루사 때는 5백 원짜리 정도 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기저기서 도로 위로 토사가 밀려 내려오고, 2차선 도로 옆 하천에 차오른 시뻘건 흙탕물이 도로를 위협했다. 도로 곳곳에 뿌리 채 뽑힌 나무들이 누워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계리로 강행. 도로를 통제하던 경찰은 갈 수는 있겠지만 올 때는 도로 자체가 끊겨 있을지 모른다는 말을 했다.
그래도 어쩌겠나. 그림을 못 찍는 것 보다는 찍고 못 오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판단에 토사와 나무를 피해 도착한 한계리는 처참 그 자체였다. 만신창이가 된 주택. 하천을 가로지르던 다리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아수라장으로 변한 도로 위에선 간신히 몸만 빠져 나온 몇몇 주민들이 하천 건너편에 남아 있는 가족을 향해 울부짖고 있었다. 지옥과도 같았던 그 현장은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겨 그날 전국으로 그 피해상황이 보도됐다.
다음날, 고립 지역을 찾다.
전날 현장에 투입되지 않았던 기자들이 모두 인제와 평창. 그리고 양양군 오색지역으로 투입됐다. 나는 관광객과 주민 수 백 명이 고립됐다는 오색지역 취재를 담당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도로. 커다란 바위와 흙더미가 차지해버린 도로를 걸어 올라간 지 2시간.
그곳에는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의 관광객과 주민 수 백 명이 모여 있었다. 외부와 통신마저 두절돼 공포감이 극심했던 터라 외부에서 들어온 우리를 본 그들의 얼굴에선 안도감마저 느껴졌다. 2시간 행군의 피곤함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거센 물살 위로 외나무다리를 놓고, 유실된 도로에는 구명줄을 설치하며 도착한 양양읍. 환자와 노인을 남겨둔 채 고립됐던 대부분 사람들은 탈출에 성공하자 전화기부터 찾았다. 그리고 가족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설움이 복받쳤나보다. 흐르는 눈물과 터져 나오는 울음 그 모습을 영상으로 담는 나 또한 온 몸이 떨렸다.
고립된 주민들과 함께한 왕복 4시간의 도보. 하지만 내겐 그보다 더 힘든 상황이 남아 있었다. 수해와 관련해 쏟아내는 기사가 많다 보니 3개의 리포트를 한 개의 편집기에서 제작해야 했다. 도로 사정이 워낙 좋지 않다 보니 속초지국에 도착한 시간이 비슷해서 더욱 급박한 상황이었다.
“그냥 붙여”, “야 시간 없어”.... 겨우 제작을 마쳤지만 이번에는 속초지국 사무실의 광케이블이 고장 났다. KT 담당은 전화도 받지 않는 상황. 속초에서 강릉지국으로 테이프를 들고 갈 수 밖에 없었다. “30분 만에 갈 수 있지? 운전은 조심해라”
그날 뉴스 모니터를 하면서 방송이 나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우리는 그날 첫 끼니를 라면으로 때울 수 있었다.
힘내세요. 수재민 여러분
집을 잃고,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심정을 누가 알까. 세간 살이 대신 흙더미가 집을 차지하고, 단란했던 삶의 터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람들. 자신의 몸을 돌보기도 힘든 상황에서 이재민들은 걸어서 찾아온 우리에게 손수 라면을 끓여 주셨다.
“뭐 고생하느라 이까지 걸어와. 줄게 라면 밖에 없네. 미안해요..”
아끼고 아껴 먹는 김치를 한가득 내오는 정성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평생을 살아온 터전이 사라졌지만, 여유만큼은 잃지 않았다. 적어도 사람에 대한 정만은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네들의 마음을 안 탓일까. 전국에서 자원봉사자들이 수해지역을 찾아 힘을 보탰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하나가 돼 복구에 힘을 쏟는 모습은 그 어떤 대가의 작품보다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자식같이 든든한 군인과 경찰들은 언제나 복구의 최일선에 있었다. 종교계, 학계, 관공서 등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서로 내미는 복구와 구호의 손길에 이재민들의 아픔도 조금씩 가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이재민들을 좌절하게 만든 것은 정부가 내놓은 보상대책이었다. 특별재난지역?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쥐꼬리만한 보상금. 특별생계지원금은 식사비로도 모자란 하루 5천원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일주일이면 끝이라니... 우리가 그토록 현장을 누비며 수재민들의 목소리를 대신했건만 돌아오는 정부의 대답은 고작 이것뿐이었다.
“어르신, 저희가 밖에서 노력 많이 할게요. 저희가 도와드릴게요, 기운 내세요..” 그동안 수해지역을 다니며 만났던 수재민들에게 되 뇌이고 또 되 뇌였던 내 말은 한순간에 거짓부렁이 되고 말았다. 부끄러웠다.
지루한 장마가 물러가고 수해현장도 점차 안정을 되찾으면서 그토록 넘쳐나던 기자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 더 이상 보기가 어려워졌다. 그러나 한순간 집과 가족을 잃은 수재민들의 마음속 그늘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난 다짐했다. 나 하나만이라도 ‘그때그때 이슈만 쫓는 황색언론의 구성원’이 아니라 약자의 아픈 곳을 찾아내 보듬어 줄 수 있는 한 줄기 빛이 되리라고 말이다.
GTB 강원민방 영동취재본부 이영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