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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 취재기>

평양, 짜 맞추기 힘든 큐빅같은 곳

 평양 순안공항의 공기는 뜨겁게 아지랑이치고 있었다. 날씨가 그랬고, 내 가슴이 그러했다. 세 번의 도전 끝에 찾아온 북녘 땅의 중심! 이제 누구나 쉽게 찾아가 볼 수 있는 금강산에서 느꼈던 공기와는 사뭇 달랐다. 내심, 아직 선택받은 사람만이 닿을 수 있다는 이 땅에 두 발로 서서 유월의 평양을 온몸으로 맞고 있다는 생각에 잠깐의 상념에 젖어 들었다.

 하지만 닿았던 흥분도 잠시, 촘촘한 풀들로 덮여있는 민둥산이 내 눈 앞에 나타났고 대북 홍보자료에서나 볼 수 있었던 빨갛고 자극적인 글씨들이 건물 곳곳에 흉물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공항에서의 첫 느낌과는 달리 숙소로 이동하는 차장 밖으로 본 평양은 땀구멍을 자극할 정도의 강렬한 하늘이었지만 어딘지 어색했고 무언가 스산했다.

 숙소인 양각도 호텔에서 내려다보이는 대동강의 어귀 한 자락이 고즈넉한 주홍물결로 드리워질 때 쯤 취재진도 그날의 일정을 시작했다. 민족통일 대축전, 이 행사를 위해 남쪽에서 삼백 명에 가까운 각계 인사들이 북녘 땅을 밟았다. 그들의 시선과 몸짓은 제각각, 얼굴엔 여유에서 호기심에 이르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노출되었고 북녘의 공기를 리트머스마냥 빨아들이며 행사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환영만찬, 그러나 행사의 시작부터 약간 삐걱거렸다. 연회장 주석단에 앉을 인사에 대한 견해차이가 작지만 미세한 파장을 만들었고 그 지체가 가져온 웅성임은 이번 대축전의 행보에 일정한 균열을 예고했다.

 이튿날, 기우는 그 자체로 끝나지 않았다. 선언문 낭독이 예정돼있던 인민문화궁전은 동원된 북측시민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고, 남측 참가자들이 행사장으로 들어올 무렵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뜨거운 진동에 전율마저 느끼게 했다. 그리고 얼마쯤 시간이 지나갔다. 자리를 뜨는 이와 정돈되지 않은 잡음이 눈과 귀에 거슬렸다. 누군가 소리치며 불만의 소리를 내뱉고 주석단은 듬성듬성한 행사장만큼이나 고요히 비워져 있었다. 잠시 후 행사의 파행을 알리는 남측 집행부의 통고가 있었고 기다린 시간이 길었던 만큼 파장은 커져갔다. 사분오열. 서로가 이해하지 못하는 이견 충돌. 끝없이 떨어지는 대립의 각. 남과 북의 갈등이 아닌 남·남의 갈등으로 번져갔다. 취재진들은 날카로워진 분위기만큼이나 촉각을 곤두세우며 사태의 추이를 파악해나갔다. 그리고 이것을 그대로 국민에게 전하고자 했다. 하지만 문화궁전의 높다란 아치는 우리의 소리가 흘러갈 조금의 틈과 여유도 허용치 않았다. 송출할 수 있는 어떠한 여건도 주어지지 않았다. 송출 차량 제공에 대한 요구는 철저히 묵살 됐고, 파행적 행사의 취재도 북측 요원들에 의해 번번이 제지당했다. 당연히 목소리는 커져갔다. 이것은 누구를 위한 행사고, 우리는 무엇을 위해 여기 있단 말인가! 그 시각까지 주석단 인원배분의 문제는 고리를 연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철저히 봉쇄된 그 곳에서 열두시간이란 족쇄가 풀리며 서둘러 송출을 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을 무엇으로 돌릴 수 있겠는가? 모든 언론사의 주요 뉴스가 끝나고 마감이 지나버렸고, 그만큼 흘러간 시간을 기다리며 남쪽은 궁금했고 또 궁금해 했을 것이다. 이미 지나가 버린 뉴스! 오늘 뉴스에 어제의 현장을 전달 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방송기자단에게 평양 취재의 현주소는 더 할 나위 없이 열악하다. 송출의 갈등이 가장 큰 그것이다. 도착 첫날의 송출부터 큰소리가 오가며 잠정 중단 사태를 겪어야 했다. 송출하기  전에 먼저 보자는 것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사전 검열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실랑이 끝에 우리의 뜻을 관철시켜 시작한 송출. 이번엔 인천공항에서 취재한 반공단체의 시위가 갓 수습한 분위기에 기름을 부었다. 옆에 지켜보던 북측 요원이 송출을 중단시켜 버린 것이다. 영상 기사에 빨간 펜을 칠한 것이다. 순간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실랑이 끝에 재발 방지 약속을 받고 부랴부랴 잔여 영상을 전송했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았다. 그날 저녁 만찬장에서 있었던 전 통일부 장관의 연설 내용을 문제 삼아 또다시 중단으로 이어졌다. 묵과 할 수 없는 문제였다. 남과 북 양측대표부에 행사를 보이콧 하고 철수 하겠다는 으름장을 놓았다. 늘 이런 식이다. 영상으로 만드는 기사 또한 그 자체로서 비교 할 수 없는 독특한 의미를 갖는다. 현장을 담았다고 해서 모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카메라기자가 있는 그곳에서 취사선택을 통해 담아낸 영상은 그 자체로 기자의 가치와 영상의 가치가 고스란히 녹아들어있기 때문에 전달하려는 이미지는 그만큼 더 강력한 메시지를 발휘 할 수 있는 것이다. 영상 기사의 가치, 함부로 사선을 그을 수 없는 힘이 있다. 이렇게 취재 일정은 흘러갔다. 결국 마지막 날 공동선언문이 작성되고 각 대표단의 사과성 연설이 이어졌지만, 기약 없는 행사에 삼일 간 동원 되어 나온 평양 시민이나 갈등 속에 분열된 남측 참가자들의 얼굴엔 표정 없는 쓴 웃음만 가득 베어 나왔다.

 방북 전 생각했던 평양과 돌아온 뒤의 평양은 사뭇 달랐다. 존중하려고 했던 그들의 말도, 조심스레 건네던 어색한 농담도 평양의 색깔에 맞게 잿빛으로 변해버렸다. 구분 지을 수 없었던 북측의 행동이, 갈리고 찢겨진 우리의 내분이, 힘겨웠던 검열과 맞물려 그동안 쌓아왔던 이미지를 산산이 흩어놓았다.

평양, 이제 나에게는 짜 맞추기 힘든 큐빅과 같은 곳이다.

이형빈 / MBC 보도국 영상취재2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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