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조종옥 기자와 함께한 5일
<6월 25일>
‘속보 - 한국인 13명 탑승한 항공기 캄보디아에 추락’
나는 갑작스러운 출장 명령을 받고 캄보디아를 향하는 밤 비행기에 피곤한 몸을 싣는다.
탑승자 명단에 포함된 입사동기 조종옥 기자와 아내 그리고 두 아들, 이들을 생각하니 가는 내내 마음이 무겁다.
‘종옥아 내가 지금 가니까 조금만 힘내라. 우리 함께 같은 비행기로 돌아가야지.’
<6월 26일>
아침에 수도 프놈펜에 도착해 차로 3시간 떨어진 캄포트로 향했다. 한국에서의 보도내용과 현지상황은 차이가 있었다. 아직 사고위치도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고 탑승자의 생사도 불확실했다. 기상도 좋지 않아 수색도 중단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현지교민들의 분위기는 희망적이었다. 밀림지역에 추락했으니 완충작용으로 큰 충격 없이 떨어졌을 것이라고들 생각해 탑승자의 생존가능성 역시 높게 보고 있었다. 헬기를 이용해 약품, 식량, 담요 등이 담긴 생존키트를 추락예상지역에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뜨릴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한줄기 희망이 보이는듯했다.
<6월 27일>
“기체가 발견 됐대요.”
취재기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헬기장이 있는 곳으로 무조건 달렸다. 분주히 움직이는 군 병력들, 요란한 헬기 프로펠러 소리로 주변은 어수선했다. 현장에 들어갔다 온 교민자원봉사자에게 생존자가 있는지 묻자 기체파손이 심하다는 말뿐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비닐, 알코올, 들것 등이 헬기에 실리는 것으로 보아 현장상황이 좋지 않은 듯 했다.
오후에서야 헬기를 섭외, 현장에 접근했다. 헬기를 타고 20분정도 가서 다시 길도 없는 밀림을 헤치고 25분정도를 걸었을 때, 참혹한 현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현장을 확인하는 순간 마지막 희망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기체는 절반이 꺾인 채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어 있었고 신발, 안경, 모자 등 주인 잃은 소지품은 이곳저곳 진흙탕 속에 나뒹굴고 있었다. 기체 앞쪽으로 다가가자 미처 수습되지 못한 시신이 비행기 잔해와 어지럽게 엉켜있었다. 작업 중이던 한 교민은 아직 수습되지 못한 조 기자의 큰아들과 부인 시신의 위치를 알려주었고, 조종옥 기자가 마지막까지 자신의 몸으로 아들을 감싸 안고 있었다는 사실도 전해주었다. 나는 그 현장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힘없이 현장을 걸어 나오는데 한 캄보디아 경찰간부가 취재진에게 가족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그 사진 속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조 기자 내외와 세 아들이 있었다. 눈물을 참으며 사진 속 행복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것, 그것 말고 현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6월 28일>
수습된 사고유해는 프놈펜에 있는 깔멧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열세개의 영정이 나란히 세워져있는 분향소 앞에서 유족들은 가족 잃은 슬픔을 억누르며 빈소를 지켰고 빈소 뒤편의 컨테이너 안에는 유해가 안치되어있었다. 그리고 마치 생과 사를 갈라놓은 듯 그 사이에는 흰 천이 높게 가로막고 있었다. 망자의 눈물인 듯 굵은 비는 하루 종일 내렸다. 조 기자의 아버지는 영정사진에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연신 손수건으로 닦으셨다. 차마 위로의 말씀도 드릴 수 없는 죄송한 마음뿐이었다.
<6월 29일>
희생자들의 유해와 유가족 그리고 취재진을 태운 대한항공 특별기는 프놈펜공항을 이륙해 인천공항을 향했다. 한국을 떠나올 때 조 기자와 함께 같은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기를 그토록 바랬는데, 나는 살아서 또 그는 죽어서 같은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종옥아 미안하다. 이런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캄보디아까지 와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네 사진 앞에 꽃 올리고 고개 숙이는 것뿐이구나. 하지만 너의 남은 아들에게 꼭 말해줄게. 너의 아버지는 모두가 인정하는 훌륭한 기자였고 좋은 사람이었다고…”
故 조종옥 기자와 나는 98년 3월 KBS에 함께 입사한 동기이다. 이번 출장은 사고 현장 취재라기보다 동료가 떠나간 곳을 찾아가 수습된 동료의 시신과 함께 귀국하여, 그를 먼 세상으로 떠나보내는 의식과 같은 여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캄보디아 항공기 추락사고 희생자 여러분의 명복을 빕니다.”
이영재 / KBS 보도본부 영상취재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