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의 바다에서 삼호주얼리호를 만나다
오만의 바닷가는 ‘클린스테이트’를 지향한다는 그들의 말 만큼이나 푸르고 깨끗했다. 한국대사관과 무스카트항을 몇 번씩 오가며 삼호주얼리호를 얼마나 기다렸을까. 사살된 해적들의 시신처리와 생포된 해적들의 인도문제로 주얼리호의 입항은 기약 없이 늦어졌다. 오전에 출근하듯이 대사관에 들려 브리핑을 듣고는 그날의 취재일정을 세웠다. 이러저러한 스케치로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이 상황에서 타사 취재팀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가 더 궁금했다. 타사는 이미 몇 번이나 배를 타고 외항에 대기 중인 삼호주얼리호를 촬영하러 나갔다 왔었다고 한다. 헬기를 수배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며칠이나 늦게 현지에 도착해 현장상황을 따라잡기에도 숨이 찼던 시점이라 전전긍긍 했다. 뒤늦게 우리도 배편을 알아보기 시작했지만, 삼호주얼리호를 호위하는 최영함이 레이더로 감시하며 다른 선박이 접근할 경우 주얼리호를 이동시키기 때문에 절대 배를 잡지 못할 것이라는 관계자의 조언에 따라 계획을 접었다. 지리멸렬하지만,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애초의 입항 예정보다 나흘정도 늦어진 1월 31일 밤, 외교부 관계자에게 전화가 왔다. 지금 브리핑이 있다고. 부리나케 달려간 대사관은 여러 사람들로 어수선했다. 외교부 측의 발표가 이어졌다. 삼호주얼리호의 입항허가가 떨어졌고, 내일 중으로 입항할 것이라는 것. 모두 긴장 반 흥분 반이다. 어쨌든 내일이면 취재는 끝날 것이고, 설은 집에서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내일 하루에 사실상 이번 출장의 모든 것이 걸려 있었다.
다음날, 일찌감치 무스카트항으로 향했다. 역시 보는 눈들은 다들 같았다. 항구 전경이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점찍어 둔 포인트는 나만 보아 둔 것이 아니었다. 태풍으로 절반 정도가 무너져 내린 낡은 첨탑을 올라, 녹슨 대포의 포신 뒤편에 자리를 잡았다. 이국의 바다가 끝없이 펼쳐졌다. 해무에 쌓인 채 수평선 너머로 일렁이는 배라도 보일라치면 주얼리호가 아닌지, 최영함이 아닌지, 카메라로 몇 번을 확인해 보곤 했다.
사실 취재보다는 송출이 문제였다. 지금까지는 인터넷 송출을 했는데, 당일 주얼리호의 입항시간이 애매했다. 뉴스 시간에 임박했고, 뉴스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는 중간에 취재를 포기하고 나와야 할 상황이었다. 결국 고심 끝에 위성 송출 청약을 하기로 했다. 오만의 국영방송인 오만TV가 무스카트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며칠 전 직접 사전답사를 해서 최종 송출 전 단계의 링크까지 확인해보고 온 터였다. 타사의 경우 여러 팀이 취재를 와 있어서 한 팀은 취재를 하고, 한 팀은 인터넷 송출을 맡는 방식으로 일을 분담했는데, 뉴스시간에 임박해 홀로 취재와 송출을 맡아야하는 나로서는 위성 청약이 최선이었다.
멀리 최영함이 보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최영함 옆으로 주얼리호가 보일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먼 바다만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었다. 누군가 외쳤다. 이거 주얼리호 아니야? 아차 싶었다. 최영함과는 다른 방향에서, 첨탑의 사각지대로 주얼리호는 벌써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와 있었다. 연돌이다! 작전 당시의 흐릿한 영상에서만 보았던 주얼리호의 연돌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연돌 곳곳에 남겨진 상흔은 마치 하나의 상징처럼 그들의 고단했던 여정을 말하고 있었다. 주얼리호가 항구 인근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촬영한 후에는 부리나케 부두로 달려가야 했다. 외교부 관계자와 함께 통제구역을 지나가니, 삼호주얼리호가 이미 부두에 정박해 있었다. 승선 취재는 철저히 제한되었다. 곳곳에 남은 총탄의 흔적들이며, 성한 것이 없는 유리창들, 부분적으로 패이고 휘어진 선체는 작전 당시의 위태로웠던 상황을 짐작하게 했다. 간간히 갑판위로 오가는 선원들의 한마디라도 듣고자 소리쳐 보았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이제 집으로 간다는 안도와 오랜 피로가 함께 뒤섞인 담담한 표정들이었다. 본래 뱃사람들은 사고가 난 배에 탔었다는 것만으로도 다른 배에 승선을 거부당할 정도로 징크스에 민감하다고 한다. 선원들이 노출을 꺼려하는 것이 당연했다.
취재를 하다보니 어느덧 그림을 송출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아직 현장을 더 지켜보아야 했지만, 포기할 것은 포기해야 했다. 그렇게 급하게 달려간 송출포인트,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위성청약은 최악의 선택이 되고 말았다. 위성링크를 통해 본사의 위성중계실 화면에 뜬 그림들은 모두 색깔이 빠지고 노이즈가 심했다. 오만TV의 엔지니어들에게 항의했지만, 그들도 고개만 갸우뚱할 뿐이었다. 위성청약시간 20분은 그렇게 속절없이 흘러가 버렸다. 인터넷 송출하기도 시간이 부족한 상황, 위성청약을 더 잡아보려 했지만, 이미 다른 청약이 다 되어 있어서 그것도 불가능했다. 그렇게 허둥대기만 하다가 뉴스시간은 다가왔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뉴스는 시작됐다. 결국 그날의 뉴스는 색깔이 빠진 화면과 내근자의 오디오로 방송이 되었다. 가장 중요한 입항 당일의 뉴스였다! 결과적으로 오만TV 측의 귀책사유가 확인되었지만, 상황에 민첩하게 대처하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컸다. 그날 밤에는 주얼리호 선원들에 대한 후속취재도 해야 했지만, 기운이 날 리 없었다. 취재팀원 모두 의기소침했다. 하지만, 많은 선후배들이 오히려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주었고, 그 덕분에 큰 위안을 얻었다. 감사했다. 그러나, 이미 상황은 끝났고, 나는 무엇을 더 할 수 있단 말인가.
그 해답은 다음날 우연처럼 다가왔다. 우리 취재팀은 귀국을 위해 공항으로 가기 전 무스카트항에 잠시 들렸다. 항구 안에 들어가는 것은 생각도 못했고, 주변에 혹시 취재거리가 있나 그저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삼엄한 보안 탓에 절대 출입할 수 없었던 항구 정문에서 우리는 스스로도 놀라고 말았다. 우리가 탄 차가 별다른 제지없이 정문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 이유를 우리도 나중에서야 알았다. 현지 코트라 사무소에 취재기자와 친한 지인분이 계셨고, 그 분께서 공항까지 데려다준다며 당일 자신의 차를 잠시 빌려주셨는데, 그 차가 코트라 소속의 차량인 덕분에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행운이었다.
흥분되기 시작했다. 항만경찰에 눈을 피해 카메라를 들고 갈 수 있다면, 부두에 정박한 주얼리호에 오를 수 있다. 하지만, 이곳은 머나먼 오만, 얼마 전 한 취재팀이 항구 정문에서 촬영을 하다가 항만경찰에 끌려가 몇 시간씩 조사를 받은 사례도 있었던 곳이다. 신중해야 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접근한 삼호주얼리호 앞에서 우리는 한번 또 멈칫했다. 배에 승선하는 일은 출입국 절차에 준하는 중대한 일이라고 했다. 자칫하면 큰 문제가 될 수도 있고, 그야말로 구속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때 어제의 실패가 떠올랐다. 더는 무언가를 할 수 없을 것 같은 무기력한 상황 속에 반전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용기가 생겼다. 올라가는 거다. 뭍을 떠나 배에 오르니 길이 보였다.
삼호주얼리호를 인수 받은 교체선원들은 의외로 친절했다. 비록 20여분 남짓의 시간 밖에는 허락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주얼리호 내부의 치열했던 흔적을 생생하게 담을 수 있었다. 납치에서 구출작전까지 생사의 길을 오갔던 외국인 선원들의 이야기도 들었다. 단독취재였다. 그렇게 취재를 마치고, 단독영상을 송출한 뒤 한숨을 돌리고 있는데 문득 만감이 교차했다. 단독취재를 했다는 기쁨보다는 어제의 실패에 위축되지 않았다는 성취감이 더 컸다. 우습지만, 스스로가 대견한 순간이었다.
모든 유리창이 다 깨져 버린 채, 총탄에 검게 그을린 조타실의 황량함은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다. 반 쯤 찢겨진 커튼을 흔들던 바닷바람과 인생을 두 번 산다는 한 선원의 말은 어떤 경건함마저 들게 했다. 생과 사에 준하는 일은 아니겠지만, 취재실패와 성공 사이를 롤러코스터처럼 오갔던 경험은 그렇게 스스로를 깊이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먼 이국의 바다에서 만난 주얼리호와 사람들. 그들은 뉴스속의 사건사고로서가 아니라, 내 삶의 소중한 경험치로서 깊이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조창현 SBS 영상취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