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취재기
어린이들에게 신으로 군림하고 있는 ‘뽀통령’ 뽀로로 못지않게, 그 만화의 다른 캐릭터들-크롱, 루피, 에디-의 인기도 결코 만만치는 않다. 5살짜리 우리 꼬마에게는 포비가 그러하다. 워낙에 매니악한 수준이라 인형, 장남감 등은 거의 컬렉션 급이고, 방에는 포비의 푸짐한 뱃살이 돋보이는 화보들이 아예 벽지를 덮었다. 당연히 포비의 생물학적 근원인 북극곰에 대한 상식도 나에게 요구(?)되는 덕목 중 하나였고, 덕분에 서른다섯의 나이에 동물백과사전을 뒤적이며 북극곰의 일거수일투족을 학습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피나는 '좋은아빠되기' 노력에 감동했는지, 회사는 나에게 실물 북극곰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쇄빙선 아라온호 북극탐사 동행취재. 이 소식을 들은 우리 꼬맹이에게 MBC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회사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고, 아울러 내 북극 출장의 최대 미션도 아주 자연스레 결정되었다. ‘북극곰을 찍어라!’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렇게 불온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된 한 달간의 북극출장에서 나는 결국 목표를 달성했다. 하지만 이것과는 별개로, 북극은 정말 다양한 형태로 나의 도전감을 자극해주었고, 덕분에 지루할 법도 한 30일의 시간이 꽤 알차게 흘러갔다. 하루하루가 같았지만, 또 하루하루가 전혀 달랐던 북극에서의 한 달을 기록해 본다.
가장 신선한 경험은 ‘반복’에서 나왔다. 아시다시피 북극은 대륙이 아닌 바다다. 바닷물이 얼어 떠다니는 유빙이 북극점을 중심으로 커다란 빙판을 만든 지역이기 때문에, 남극의 세종기지처럼 관측소가 있거나 중간정박을 할 만한 항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일단 북위 70도를 넘어서면 어제나 오늘이나 계속 유빙과 바다만 보이는 풍경의 반복이다.
매일 새로운 것을 쫓던 사람들에게, 매일 똑같은 그림은 당연히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 어색한 상황을 피하고자 종종 술잔을 기울였고 열심히 사람들을 만났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조차도 반복이 되는 시점이 왔고, 이쯤 되니 우리도 슬슬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항상 마감에 쫓기며 급한 것에 단련되었던 몸과 마음에 여유가 생겼고, 동시에 배 안의 취재원들을 ‘뉴스’스럽지 않게 대할 수 있었다. 이번 출장의 가장 큰 수확도 바로 이 점이라 할 수 있겠다. 좀 거창하게 말해보자면, 잠시 잊었던 기자로서의 필요조건들을 되돌아보는 기회가 된 셈이다.
북극 출장의 또 다른 키워드는 ‘기다림’ 이었다. 늘 그렇듯 취재진에게 ‘인내’는 필수덕목이었다. 항해가 시작되고부터는 첫 유빙이 나타나길 기다렸고, 유빙을 만나고서 한참동안은 그림이 될만한 동물들을 기다렸다. 날이 좋으면 헬기 촬영을 해볼까했더니 일주일이 지나도록 구름만 끼어 애를 태웠고, 곰 발자국을 본 뒤로 열흘간은 ‘백야인 와중에 하얀 빙판에서 흰곰 찾기’라는 3단콤보를 해결해야 했다. (앞서 말한 북극곰은 이렇듯 인고의 산물이었다)
과학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의미있는 데이터가 나올 때까지 북극해 여기저기에 탐침봉을 찔렀고, 내가 보기엔 똑같은 바닷물을 뜨기 위해 수도없이 채수통을 채웠다. 그나마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찾아 헤멨지만, 과학자들은 눈에 뵈지도 않는 플랑크톤과도 사투해야 했다. 그리고 취재진이나 과학자들이나 똑같이 애타게 기다리는 것도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아닌 식사시간이었다.
말이 나와서 얘긴데, 배 안에서 유일한 낙은 먹거리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식사가 끝나고 한참동안은 그날의 식단에 대한 토론이 대화의 주였고, 급기야 꽃게탕에 들어간 꽃게의 원산지가 한국이냐 알래스카냐를 놓고 갑론을박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물론 팩트를 확인해야하는 기자들의 숭고한 직업의식의 발로라 하겠다.
이처럼 같은 공간에서, 같은 사람들과, 같은 기간을 보낸다는 것은 여러모로 좋은 추억거리를 만들어주었다. 아울러, 과학발전을 위해 음지를 넘어 극지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의 중요함도 깨닫게 되었다. 이 분들의 노력이 우리의 취재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잘 전달되었길 희망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달동안 마치 친형처럼 지냈던 KBS 홍병국선배에게 참 감사하다. 비록 타사 후배이지만, 취재와 생활 모든 면에서 아낌없이 도움을 주신 까닭에 무사히 출장을 끝마칠 수 있었다. 모든 취재가 그렇듯 일이 반이면 사람이 반인데, 이번 아라온호에 탑승한 5명의 기자들은 궁합이 너무 잘 맞아 한 달이라는 시간이 정말 유쾌했다.
물론 이보다 훨씬 많은 후일담거리가 있지만, 출장기간의 소소한 일상은 일부러 적지 않았다. 앞으로 극지 취재를 떠날 누군가의 기대감에 스포일러가 되는걸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치만 식상하더라도 이 멘트는 붙여야겠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볼 것이다’
기자들 셋이 모이면 늘상 하는 얘기가 있다. 예비역 군바리들의 군생활 무용담처럼, 출장 무용담이 바로 그것이다. 이 때 모든 전쟁과 재난, 사고의 현장은 그 기자 중심으로 각색되게 되어있다. 그리고 이 대화의 승자는, 주로 ‘얼마나 하드코어한 공간이었냐’에서 판가름난다. 때문에 북극에 다녀온 나는 조용히 이렇게 말해줄 것이다.
‘해외출장, 너 어디까지 가봤니?’
박주일 MBC 영상취재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