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세계육상선수권대회’
달구벌 뜨거운 열기에도 나의 열정은 식어있었다.
A, “야! 가지고 있는 카메라, 망원렌즈, 트라이포드, 스트로보 모두 꺼내고 짐이 많은 것 처럼하고 뛰어 들어가자.”
B, “입구는 한 곳인데 경찰이 저렇게 열을 지어 있는데 저기로?”
A, “어떡하노,,, 부산까지 왔는데 빈손으로 갈 순 없잖아. 그냥 들이데 보는 거지...”
B, “에라이 모르겠다. 가자.”
그리고 나선 우린 마치 사진기자처럼 보이기 위해 비록 보잘 것 없는 촬영 장비였지만 한 꺼 폼을 내고 20여 미터 일렬로 입구에 서 있는 경찰들 사이로 돌진했다.
경찰, “(나를 잡아채며) 뭡니까?”
A, “(소리치며) 이거 놔! 시간 늦었다고, 빨리 뛰어!”
웅성웅성 거리는 경찰들의 소리를 뒤로하고 냅다 입구를 향해 돌진했다.
경찰; “뭐 야”
“기잔가 봅니다.”
한 30여 미터를 달렸나, 우리를 잡는 경찰은 없었고 무사히 경기장 내부로 들어 갈 수 있었다.
2002년 10월 부산아시안게임 대한민국 대 북한의 농구 경기가 있었던 금정체육관 앞에서 벌어 졌던 일이다. 북한과의 경기여서인지 청명한 가을 하늘과 싱그러운 공기와는 다르게 체육관 앞은 난생 처음 보는 김일성,김정일 배지를 찬 사람이 서성거리고 있었으며, 경기장 외각은 많은 경찰과 국정원 직원들로 메마른 사막의 공기가 지배하고 있었다.
당시 대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보도사진연구회 정기 전시회를 앞두고 2001년부터 월드컵과 부산아시안게임을 중심으로 사진전을 준비 하고 있었다. 부산, 울산, 대구, 서울까지 많은 경기장을 찾아 다녔고 그 때마다 금정체육관에서 벌어졌던 일과 비슷한 경우가 많았었다. 때로는 TV중계라인이 연결된 뒷문으로 스탭인 척 들어가 보기도 하고, 졸업한 기자선배께 무리한 부탁도 해보고... 그 때마다 AD카드를 목에 메고 자유롭게 경기장을 드나드는 기자들을 그냥 바로보고 있노라면 AD카드 한 장은 나에게 부러움과 존경의 대상이었다.
2011년 8월 27일 3대 스포츠 대전이라 일컫는 세계육상선수권 대회가 뜨거운 대지의 열기가 아우르는 인구 2백 5십만 인 이곳 달구벌에서 열렸다. 그 중심이 되는 대구스타디움에 지금의
나는 중계라인이 연결된 뒷문을 기웃 거릴 필요도, AD카드를 빌리 필요도, 입장권을 살 필요도 없어졌다. 나는 존경과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내 이름이 적힌 AD카드를 목에 걸고 당당히 IBC와 MPC거쳐 경기장으로 향했다. 사실 1년차 2년 차 때 세계육상대회 준비 과정인 대구국제육상경기 취재 시 그 설렘과 흥분은 대단했다. 설익은 카메라 기자로 뷰파인더를 보고 셔터를 누를 때엔 학창시절의 모습이 스쳐 지나서인지 그 전율이 발끝에서 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벌써 5년차 인가, 십 수년 경험한 여러 선배들께는 부끄러운 말이지만 이제 그런 흥분과 떨림은 없어져버렸다. 열정이 식어버려서인지 아님 한계에 부딪힌 것인지...
2011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는 202개국 참가 3500여명의 선수, 임원 등 규모면에 대회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2002년 월드컵, 2003년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겪었지만 단일 대회로는 대구에서 열린 가장 큰 규모의 대회이기도 했다. 육상대회조직위는 대회 사상 처음으로 선수촌을 건설하여 선수단 및 미디어의 숙소를 지원했고, 역대 최고의 대회답게 연일 경기장을 가득 채운 관중과 미소를 잃지 않은 600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있었기에 그 빛을 더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회 조직위의 운영에는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셔틀버스가 크게 부족한데다 시간마저 들죽 날줄 하여 불만이 터져 나왔으며, 스타디움 쇼핑몰이 공사 지연으로 제때 문을 못 여는 바람에 몇몇 식당만 운영되면서 음식이 형편없다는 비난도 쏟아졌다. 그리고 대회 초반에는 보안을 이유로 밤에 스타디움을 폐쇄해 외신 기자들이 갇히는 소동도 있었다.
내가 속한 KBS는 주관방송사로써 116대의 중계카메라, 3D카메라, 스파이더 캠 등 최첨단 방송장비를 동원하여 국제신호로 제작 하여 전 세계에 전파를 쐈다. 서울올림픽과 월드컵 제작 경험을 바탕으로 지난 4년간 철저히 준비한 덕분에 선수 움직임 하나하나를 포착할 수 있는 영상구현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개막초기에는 국내 TV중계를 하지 않아 총국으로도 시청자의 많은 항의가 있었다.
완벽한 대회를 꿈꿀 순 없지만 대회사상 최고, 최초 여러 미사여구가 등장한 만큼 작은 부분의 미숙함은 아쉬움에 남는다.
육상대회취재 시 만났던 지역 선배들로부터 이런 말을 많이 들었었다. “KBS는 주관 방송사인데 뭐 할게 많이 있나?” 사실 녹화 데크만 두 대였다면 거의 모든 중계화면을 녹화를 해 뉴스영상에 사용 할 수 있으므로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러나 나 스스로도 이런 생각이 독이 된 듯 했다. 경기결과에 대한 아이템인 경우 문제 될 것이 없으나 경기 외적인 경우와 한 선수의 내용을 담는 취재의 경우는 중계영상으로 담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스스로 ‘빨리 복귀해 편집해야지.’ ‘내일 또 해야 할 것을...’이런 생각들이 내 머리를 지배한 건 사실이다.
‘주관방송 KBS’ 그건 아마 본사의 이야기 일 것이다. 조직위와 본사 육상방송기획단이 중심이 되다 보니 총국 보도국에서는 미디어 주차장 출입증 하나를 얻지 못했고, 선수촌, 보조경기장 등 취재를 하고자 할 땐 많은 어려움과 취재를 거부당하기도 했다.
지역 언론의 일원으로서 이번 대회에서 무엇보다도 아쉬운 것은 대회소식이 전국뉴스에 과연 얼마나 많은 비중을 차지했냐는 부분이다. 뉴스의 질을 빈도수로 따지는 것이 무의미 할 수 도 있지만 주관방송인 KBS뿐만 아니라 대부분 방송사 메인 뉴스에서 대회소식은 두 꼭지에서 세 꼭지 정도에 불과 했다. ‘2011세계육상선수권대회’, 지역뉴스에서만 이슈가 되었지 전국뉴스에서는 그저 대구에서 육상대회가 있다는 것에 불과했다. 언론은 세계 3대 스포츠 대전이라 스스로 칭하면서 그 가치를 아시안게임보다 못하다 여긴 것 같다. 물론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언제 또 대구에서 이런 큰 대회가 있을지, 언제 또 다른 나라 다른 도시에서 이런 대회를 취재할 수 있을지 지역에서 이런 경험을 다시 하기에는 쉽지 않을 것 같다.
2011년 8월 여름이 다갈 무렵 202개국에서 모여든 전 세계 사람들로 잠시 식었던 달구벌의 열기는 다시 뜨겁게 달아올랐음에도, 부끄럽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부분과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의 한계를 느끼며 내 마음속의 열기는 2003년 금정체육관 앞보다 식어 있었다.
KBS 대구총국 김동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