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와 우리
나는 기독교인이다. 요즘 이 말을 하는 데 전에 없던 용기가 필요해졌다. 교회가 산발적 집단 감염의 온상으로 주목받으면서다. ‘너네 교회는 온라인 예배해?’ 주변 사람들이 무심코 던지는 질문에도 걱정보단 경계심이 묻어 있다. 마치 교회 집단은 모두 위험하다는 듯이. 신앙도, 자유도 사회 안전보다 중요한 건 아니라는 듯이. 그렇다고 의도적으로 방역을 방해하고 국민들에게 더 큰 불안에 안겨준 일부 교회까지 옹호하고 싶은 건 아니다. 자유와 방종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부 집단의 일탈이 특정 집단 전체를 증오하는 이유가 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속한 사회에 위기가 닥쳤을 때 위험을 타자와 관련짓는 반응은 인류 역사에서 반복해서 발견되어 온 현상이다. 매독이 유럽을 휩쓸던 15세기에 매독은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영국에 선 프랑스 두창, 프랑스에선 독일병, 일본에선 중국병으로 불렸 다. 매독뿐 아니라 콜레라, 흑사병, 나병에 이르기까지 집단적인 질병은 늘 타자와 연결 지어졌다. 스페인 독감은 단지 최초 보도가 스페인 언론을 통해 이뤄졌다는 이유만으로 이름 지어졌다. 코로나19 바이러스 초기에도 우한폐렴이라는 명칭 사용을 두고 치열한 논쟁이 펼쳐졌다는 점을 기억할 것이다.
위험을 타자와 관련짓는 행위는 곧 책임과 연관된다. 위기 시에 누군가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일은 쉬워지고 타인을 포용하는 일 은 몹시 어려워진다. 계속되는 사회적 거리두기의 폐해는 이러한 심리적 단절로 나타난다. 어제 영웅이었던 의료진이 오늘 이기적 인 집단으로 치부되는 게 현실이다. ‘비정상’이라고 딱지 붙인 대상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는 점점 더 배타적이 되어 간다. 코로나19가 언젠가 끝이 나면 물리적 거리는 금방 좁혀질 수 있다. 하지만 갈라진 심리적 균열은 좀처럼 다시 붙기 힘들다.
정치의 부재도 아쉽다. 국민 안전과 생명이라는 가치와, 개인의 자유라는 가치 중 어느 것이 우선하는지에 절대적인 답을 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큰 가치들이 서로 상충할 때 이를 상황에 맞게 조정하고 설득해 따르도록 만드는 게 정부의 역할이자 정치의 본분이다. 그러나 현재 정치권이 보여주는 ‘네 탓’ 공방은 낯 뜨겁다. 남의 무능력을 발판 삼아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남의 천박함으로 자신의 천박함을 가리려 한다. 정치가 올바르게 작동하지 않으니 국민들끼리 분열하고 갈등한다.
많은 전문가들이 이제는 ‘포스트 코로나’를 넘어 ‘위드(With) 코로나’ 시대라고 진단한다. 전자가 ‘극복’을 필요로 한다면 후자는 ‘동행’이다. 어떻게 슬기롭게 살아갈지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는 얘기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이제 누가, 어디서, 언제 감염돼도 이상하지 않은 단계에 이르렀다. 확진자에게 던지는 돌이 얼마든지 다시 나에게 돌아올 수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지향해야 할 태도는 분명하다. 타자를 설정하는 행위를 중단하고, 확진자에게 던지는 따가운 시선을 거둬야 한다. 인류에게 닥친 집단 감염을 다룬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저자는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이유, 인간이 존재하는 본질적 이유에 대해 말한다. 우리 내부에 이름 없는 무언가, 바로 ‘우리’라는 것 이다. 우리는 모두 코로나 사태의 피해자인 동시에 책임져야 할 주체들이다. ‘우리’의 가치를 되새기는 일이야 말로 코로나 시대 를 살아내는 유일한 희망이다.
왕시온 / 명예영상기자 14기 (한국체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