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17 16:40

길(路)의 재발견

조회 수 269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인쇄 첨부

길(路)의 재발견

 

image01.png

▲ 성산대교 밑 보도 한쪽에 잠자리를 사냥한 거미의 모습

 

 

 2019년 12월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19가 시작됐다. 첫 보도는 원인 모를 폐렴으로 우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때는 이것이 나의 삶과는 상관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2020년 10월 말 현재, 한국을 포함해서 전 세계가 코로나19 소용돌이 속에 목숨을 잃는 중이다. 코로나19라 불리는 전염병은 한 명이 동일 공간에 있다면 가벼운 접촉만으로도 여러 명을 감염시킬 수 있고 밀집, 밀폐된 곳에서는 전염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한두 명으로부터 시작된 후에는 인적 네트워크가 여러모로 감염 확산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삶의 풍경이 변하고 있다. 2020년 3월. 많은 기업이 재택근무에 들어갔다. 대중교통 이용이 마음 편하지 않다. 생면부지의 불특정 다수와 함께 좁은 공간에 밀폐되는 일은 이제 감염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이런 변화 속에서 나의 길(路)의 재발견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직선거리 7km의 도보 출근. 첫 시작은 코로나19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행위로써의 걷기뿐만 아니라 길 위에서 발견하는 소소한 즐거움에 중독되고 말았다. 한강 산책로를 따라 여의도까지. 귀에 이어폰을 꽂고 유튜브로 90년대와 2000년대 가요를 듣는다. 특정 가요가 유행했던 옛날, 개인적 경험들이 어제 일처럼 기억 속에서 소환된다. 내 기억 속 검색 주제어는 가요 제목인 것 같다 - 나는 기억 소환 해시태그#라 부른다. 이승환의 ‘천일동안’,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 등. 이런 기억의 소환을 통해 당시를 회상하는 마법 주문 같은 경험을 한다. 잊은 채 살아가고 있던 일, 기억의 존재조차 망각하고 있었던 것 등을 불러내는 것이다.
 

 소환된 추억을 곱씹으며 알 듯 모를 듯 묘한 미소와 함께 한강 산책로 아스팔트 위를 한 발짝 한 걸음 힘차게 내딛는다. 신기한 것은, 탁 트인 한강변에서 불어오는 뒷바람을 맞으면 평균 두 시간 남짓 걸리던 것이 대략 15분 정도 단축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맞바람을 맞으며 걸을 땐 우선 무척 괴롭다. 모자가 뒤집힐 듯 날리고 눈도 게슴츠레 떠야 한다. 한 손은 모자를 붙잡고 상체는 바람을 맞으며 몸을 구 부정히 한 채 걸어야 한다 - 인간이 바람에 맞서는 본능적 자세다. 바람은 걸음을 도와주기도 하고 때론 발걸음을 붙잡기도 한다. 마주 오는 사람들의 시선을 애써 피해 보지만 사실 이런 때 사람 구경은 돈 주고 살 만하다. 사람들 각각의 외모도 외모지만,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얼굴과 몸짓 손짓에서 그(그녀)의 삶의 궤적을 상상해 보는 것도 재미를 준다. 상대방도 나를 힐끗 보다 시선을 돌린다. 서로가 서로를 살피고 탐색한다. ‘그’ 또는 ‘그녀’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할까?라는 엉뚱한 생각도 해 본다. 멋진 사이클의 행렬에 이어 어느 순간 따릉이들 한 무리가 바로 옆 아스팔트 위 페인트칠로 경계를 이룬 자전거도로를 쏜살같이 (때론 강바람을 만끽하듯 여유를 부리며) 지나간다. 마스크를 썼지만, 그 순간만큼은 코로나19도 잊은 듯한 행복감이 마스크 너머로 드러나는 것 같다. 일부러 가식적으로 지을 수 없는, 마음이나 가슴에서 표현되는, 행복한 표정들의 행렬이다.
 

 앞만 보고 갈 때. 주위를 살피며 걸을 때. 어제는 못 본 대상, 사소하고 작은 것들이 오늘 보이는 경험. 오늘이 어제가 되었을 때, 내일, 또 다른 새로운 발견이 일어난다. 물론 대단한 발견은 아니다. 한 달 동안 같은 길을 오갔는데 굉장히 낯선 시설물이 눈에 들어온다 - 낡고 허름하다. 처음 본 것 같다. 하지만 실은 최소 십수 년을 그 자리를 지켰을 시설물이다. 단지 내 뇌의 저장을 담당하는 기억 속에 입력이 안 됐을 뿐이다. 아마도 조물주가 인간 뇌가 터질까 봐, 아니면 기억이 아닌 창의적인 생각 좀 해보라고 일부러 망각이라는 여유 공간을 남긴 걸까?
 

 저장된 기억의 소환에는 필히 모종의 연결고리가 필요하다. 오늘도 길 위를 걸으면서 주위를 잘 살피고 관찰하지만 놓치는 것들이 있다. 인간은 놓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반복’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는지도 모른다.
 

 한강변 산책로 귀퉁이 늘 같은 자리에 있던 거미. 평상시에는 잊고 있다가 뇌 속 기억을 소환하는 연결고리가 벼락 치듯 번쩍하고 이어지면 문득 생각난다. 성산대교 아래 한강 펜스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거미 녀석. 잠자리 날개를 잘 포개어 놓고 거미줄로 단단히 고정한 채 맛있게 포식 중이던 녀석이다. 아니, 정정한다. 거미 녀석이 아니라 그냥 거미로 불러야겠다. 암컷인지? 수컷인지? 거미에 대한 나의 지식으로는 모를 일이다. 검색하면 알 수도 있겠지만 귀찮다. 암튼 한동안 그 거미를 잊고 살았다. 내 기억에 있는지조차도 기억 못 하고 있었다.


 한강변을 걸으며 우연히 다른 펜스에 횅하니 한가운데 500원 동전 크기의 구멍이 뻥 뚫리고 거미는 온 데 간 데 보이지 않는 주인 없는 거미집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기억의 연결고리가 만들어졌다. 기억 속 어둠의 심연 속에 파묻혀 있던 성산대교 밑 그 거미가 번쩍하고 생각난다. 잠자리 체액을 쪽쪽 빨아먹으며 포식하고 있던 그 거미. 발걸음을 재촉하며 그 거미가 있던 곳으로 가본다. 지형지물을 확인하고 위치를 가늠해 도착해 보니 회색빛 보호색으로 몸을 위장한 채 다리는 얼룩무늬를 띄고 있는 것이...여전하다. 거미줄 한가운데 거미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무사하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 거미를 만날 수는 없을 것을 알고 있다. 그날 이후 그 거미는 내 기억 속 어둠의 공간에 또다시 던져서 다시 기억할 수 없게 됐다.
 

 코로나19로 걷기 중독자가 된 나는 오늘도 길(路) 위를 걷는다. 걷다 보면 세상이 한없이 높은 벽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별것 아닌 것처럼 자신감이 충만해질 때도 있다. 잘 닦인 길 위를 걸으며 주위를 살피기도 하고 때로는 의도치 않게 보이는 뭔가 새롭게 발견하기도 한다. 코로나19가 나를 길(路) 위의 방랑 중독자로 만들고 있다. 길(路)이 작고 소소한 관심이 주는 삶의 재미와 성찰을 선물했다.

 

 


김상민 / KBS (사진) 김상민 증명사진.jpg

 

 

 


  1. Unprecedented - 코로나 1년과 영상기자

    Unprecedented - 코로나 1년과 영상기자 unprecedented : [형용사] 전례가 없는, 미증유의’ MBC에 입사하기 전, 학생들에게 수능 영어를 가르치던 시절 자주 접했던 단어. 하지만 이 단어를 수능 시험지에서 본 횟수보다 지난 1년간 해외 언론의 기사에...
    Date2021.03.10 Views424
    Read More
  2. 느린 국회, 멈춘 영상기자

    느린 국회, 멈춘 영상기자 ▲국회 기자회견장에서 유튜버들이 민경욱 전의원 취재하는 모습 ▲2020년 8월,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서울지역), 후보 영상 연설모습 일반적으로 변화에 가장 둔감한 조직은 국회, 변화에 가장 둔감한 이들은 정치인이라고 한다. #1....
    Date2021.03.09 Views381
    Read More
  3. [줌인] 행복하고 의미있는 2021년으로 만들어 나가시길

    [줌인] 행복하고 의미있는 2021년으로 만들어 나가시길 어느덧 2020년이 저물었습니다. 2020년엔 어느 해보다 이슈가 많았습니다. 가장 큰 이슈는 코비드-19(COVID-19) 일 것입니다. 신종 코로나의 확산은 전 세계를 완전히 새로운 생활패턴, 완전히 새로운 관...
    Date2021.01.08 Views328
    Read More
  4. 마스크가 바꾼 2020년 취재현장

    마스크가 바꾼 2020년 취재현장 포스트 코로나 시대, 취재현장 보도 윤리·취재 방식도 변화 ▲지난 12월 21일 가족 새해 소망을 듣기 위해 방송사 취재진이 마이크 연장봉을 이용해 마스크 쓴 시민을 인터뷰하고 있다. ▲지난 10월 15일 종로 경찰서 앞에...
    Date2021.01.08 Views486
    Read More
  5. 다양한 경험, 재치 그리고 순발력 뉴미디어 콘텐츠 만드는 데 밑거름

    다양한 경험, 재치 그리고 순발력 뉴미디어 콘텐츠 만드는 데 밑거름 ▲KBS대전뉴미디어팀에서근무하고있는필자 지난 2월 KBS 대전총국 내 새로운 조직인 디지털 관련 부서가 생긴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다큐멘터리 제작을 갈망해 왔지, 사실 디지털 분야는 그...
    Date2021.01.08 Views516
    Read More
  6. 데이터 저널리즘과 영상

    데이터 저널리즘과 영상 ▲SBS8뉴스/ 마부작침(데이터저널리즘) / 법원은‘또다른조두순들’에어떤판결을내렸나 ▲SBS8뉴스/ 마부작침(데이터저널리즘) / 키워드로본'스쿨존교통사고'…사각지대도확인 데이터 저널리즘팀의 뉴스가 새롭...
    Date2021.01.08 Views326
    Read More
  7. 영상기자라는 이야기꾼

    영상기자라는 이야기꾼 ▲〈카스테라EP.15〉코로나 2주 자가격리, 기자가 직접 겪고 말씀드립니다. ▲〈카스테라EP.16〉조두순 출소 현장 취재기/ 조두순 사건 과거와 현재 우리는 가진 이야기가 참 많은 사람들이다. 영상기자라는 직업이 아니었다면 가지 않았...
    Date2021.01.07 Views425
    Read More
  8. 자가격리 14일간의 기록

    자가격리 14일간의 기록 ▲필자가 자가격리 중 먹었던 음식과 용품 서울 시청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오면서 나도 검사를 받았다. 검사결과 음성이 나왔음에도 밀접 접촉자로 분류되어 2주 간의 자가격리를 했다. 14일 동안의 격리가 시작된 것이다. 11월3일~...
    Date2021.01.07 Views375
    Read More
  9. 언시 장수생이 언시 장수생들에게

    언시 장수생이 언시 장수생들에게 모두가 힘든 코로나 시국입니다. 이 시국에 안 힘들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만, 오래된 불안이 불행으로 번지고 있을 ‘언시 장수생’들에 대한 걱정이 앞섭니다. 얼굴도 모를 장수생들을 걱정하는 건 지나친 오지...
    Date2021.01.07 Views928
    Read More
  10. 무선마이크 900Mhz 전환기

    무선마이크 900Mhz 전환기 ▲MBN 영상기자들이 기획취재 장비운용계획을 의논하고 있다. 올해 새로운 무선마이크 장비를 지급받은 영상기자가 많을 것이다. 700Mhz 무선마이크 사용이 2021년 1월 1일부터 금지되기 때문이다. 그간 무선마이크 주파수로 사용하던...
    Date2021.01.07 Views1383
    Read More
  11. 이제 자야지? 이재야!

    이제 자야지? 이재야! ▲막 태어난 딸 '이재'를 처음 안아보는 필자 2020년 11월 2일 아침 6시 아내에게 진통이 찾아왔다. 불안감과 설레는 마음을 뒤로 하고 야간 근무를 서기 위해 오후 4시 30분 회사로 출발했다. 다음날 오전 3시, 성남에 사는 처제...
    Date2021.01.07 Views415
    Read More
  12. “영상기자와 촬영감독, 뭐가 달라?”

    “영상기자와 촬영감독, 뭐가 달라?” ▲지난1월25일영상보도가이드라인광주전남지부온라인교육 <사진왼쪽부터> 나준영부장(MBC뉴스콘텐 츠편집부), 양재규변호사(언론중재위원회), 윤성구기자(KBS 전략기획부), 이승선교수(충남대언론정보학과) 대학...
    Date2021.01.07 Views672
    Read More
  13. “10년 2개월 21일, 딱 그만큼 걸려서 다시 입사한 것”

    “10년 2개월 21일, 딱 그만큼 걸려서 다시 입사한 것” ▲지난 6월 초, 소양강 상류에서 외래어종 침투와 생태교란 문제를 취재한 필자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재능이 없는 편이라 내 실력에 낙담하기 일수였다. 그러다가 &lsqu...
    Date2021.01.07 Views403
    Read More
  14. [줌인]힌츠페터가 지금 언론에 시사하는 것

    [줌인]힌츠페터가 지금 언론에 시사하는 것 “나는 그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를 모두 들었다. 너무 슬퍼 눈물을 흘리면서도 나는 기록했다. 한국 언론에서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진실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진실을...
    Date2020.11.18 Views451
    Read More
  15. MBC ‘보도영상연구회’

    MBC ‘보도영상연구회’ ▲ 지난 9월 21일‘4k 카메라와 UHD프로세싱’을 주제로 진행된 MBC보도영상연구회 세미나에 참가한 MBC 영상기자<사진>. ▲ 1998년부터 1999년까지 2년 사이 진행된 보도영상연구회 포럼내용을 정리한 제1호 자료집...
    Date2020.11.18 Views338
    Read More
  16. 영상기자에게 출입처란

    영상기자에게 출입처란 ▲ 2019년 겨울, 국회 영상기자실에서 영상기자와 함께 2019년 말, 신입 때부터 이어진 약 3,650일이라는 약 10년간의 사회부 생활이 끝나고 국회로 출입처 발령을 받았다. 모든 변화에는 기대감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법. 나 역시 그동안...
    Date2020.11.17 Views430
    Read More
  17. ‘좋은 취미’에 관하여

    ‘좋은 취미’에 관하여 취미를 선택받는 모든 사람에게 ▲ 만화를 좋아해 땡땡(tin-tin)의 대모험 전시회에 참석한 필자 취미란 무엇인가? 취미의 ‘취(趣)’는 ‘서두르다’, ‘빨리 달려간다’는 뜻이고, ‘미...
    Date2020.11.17 Views345
    Read More
  18. 길(路)의 재발견

    길(路)의 재발견 ▲ 성산대교 밑 보도 한쪽에 잠자리를 사냥한 거미의 모습 2019년 12월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19가 시작됐다. 첫 보도는 원인 모를 폐렴으로 우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때는 이것이 나의 삶과는 상관없을 줄 알았다. 그러...
    Date2020.11.17 Views269
    Read More
  19. 도심 속 고궁 산책

    도심 속 고궁 산책 ▲ 올여름, 경복궁 근정전 앞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의 모습 “서울은 천박한 도시.” 지난여름, 여당 대표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서울을 가리켜 아파트값만 얘기하게 되는 천박한 도시로 표현해 논란이 됐다. 행정수도 이전의 필...
    Date2020.11.17 Views323
    Read More
  20. 판소리로 춤을 추게 만드는 밴드 이날치를 만나다

    판소리로 춤을 추게 만드는 밴드 이날치를 만나다 ▲ 지난 10월 초, 파주의 한 연습실에서 연습에 한창인 이날치 밴드 따랑 땅 따랑~ 따랑 땅 따랑~’ 댄스곡이 시작될 것 같은 130bpm의 흥겨운 베이스 리듬 뒤에 한번 들으면 계속 흥얼거리게 된다는 킬링...
    Date2020.11.17 Views384
    Read More
  21. 귀사(貴社)의 테이프(Tape), 안녕하십니까?

    귀사(貴社)의 테이프(Tape), 안녕하십니까? ▲ MBC강원영동 방송사가 보관하고 있는 테이프 자료<사진> 14,040개. 저희 회사가 보유한 테이프 개수예요. 손으로 하나하나 셌으니, 약간의 오차는 있을 수 있지만 크게 틀린 숫자는 아닐 거예요. 1986년 자사 TV개...
    Date2020.11.17 Views341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Next
/ 11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