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준비는 늘 즐거웠다. 입가엔 미소가 가득했다. 여행 블로그를 탐험하는 내 눈동자엔 에메랄드빛 바다가 선명히 맺혀있었다. 항공기 예약을 끝으로, 나의 할 일은 줄어드는 디데이(D-day)에 설렘을 만끽하는 것이었다.
그 날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인터넷으로 여행 정보를 보다가 뉴스 페이지를 클릭했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으레 습관이었다. '중국 우한, 원인 없는 폐렴 발생' 중국에서 전염병이 돈다는 기사가 눈에 띄었다. 별로 대수롭지 않았다. 클릭하여 볼 생각조차 없었다. 당연히 나의 '싱가포르 가족 여행'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그 후, 한 달 정도가 흘렀을까. 우리나라에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방송국들은 대대적인 속보 경쟁을 펼쳤다. 순식간에 전염병의 공포가 온 나라를 집어삼켰다. 내가 가려 했던 싱가포르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일장춘몽. 나는 여행 사이트에 들어가 항공기 예약 취소 버튼을 눌렀다. 꿈같았던 여행 계획은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그 대신 마스크가 내 얼굴에 올라가 있었다.
허무하게 끝난 여행 계획…감염대응팀 발령난 아내는 오늘도 ‘부재중’
나는 이번 봄 여행은 못 가지만, 여름에는 갈 수 있을 거라고 아내에게 힘주어 말했다. 아내의 생각은 사뭇 달랐다. "오빠, 회사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아내는 보건소에서 일하는 공무원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내의 주 업무는 보건소 회계였다. 아내는 보건소에서 코로나19로 인해 감염팀 인원을 계속 확충하고 있다고 했다. 본인도 그 대상에서 예외는 아닐 것 같다고 덧붙였다. 나는 코로나19에 대해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설마 메르스만큼 힘들까.’ 나는 메르스가 우리나라를 강타한 2015년에 결혼했다. 결혼식장에 하객들이 많이 오지 못할 것 같아 전전긍긍했던 기억이 있다. 또, 메르스 위험 현장을 취재할 때 느꼈던 무색무취한 전염병의 공포가 머릿속에 아직도 선명했다. 메르스는 나에게 전염병의 공포를 명징하게 심어주었다. 하지만, ‘장마같이 한 번 휩쓸고 가는구나’ 하는 짧은 공포 기간에 대한 안도감을 주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코로나19도 그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여파가 작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꼭 그러길 바랐다.
아내는 몇 주 되지 않아 정말 코로나19 감염대응팀으로 발령받았다. 아내는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방호복을 입고 일했다. 나는 “이야~내가 그 복장을 한 의료진을 오늘 촬영했잖아.”라고 반겼다. 아내와 처음으로 취재원과 취재진으로서의 인연이 이어진 게 신기해 촐싹댔던 거 같다. 아내는 그런 내가 못마땅해 보였는지 퉁명스러웠다. “이거 입고 일하는 나는 죽을 맛이야.”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집에서 힘들어하는 아내의 어깨는 주물러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코로나19 1차 유행’이 시작되자, 아내는 그 우주복 같은 방호복을 입은 채 정말 우주로 갔는지 집에 좀처럼 복귀하지 못했다.
오늘도 볶음밥이다. 어제는 감자가 많이 들어갔다면 오늘은 게맛살을 많이 넣었다. 딸과 내가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간편식 요리에 볶음밥만한 게 없다. 둘만의 저녁 식사가 시작됐다. 이제 딸은 엄마가 언제 오는지 내게 물어보지 않는다. 그저 유치원 친구들 이야기, 좋아하는 캐릭터가 새겨진 옷을 갖고 싶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을 뿐이다. 이 어린 것이 나보다 어른 같아 보였다. 딸은 서걱서걱 거칠게 썰어놓은 채소를 포크로 찍으며 말을 이었다. “아빠, 코로나 때문에 키즈카페도 못 가는 거지?” 엄마가 저녁에 없는 현실을 감내하고 있는 딸에게 그새 다른 시련이 찾아왔다. 딸은 다른 아이들처럼 키즈카페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뛰어놀 수 있는 곳에 못 간다는 시련은 엄마의 부재만큼이나 힘든 모양이었다. 그때부터였을 거다. “아빠, 코로나가 끝나면~” 딸은 가고 싶은 곳을 내게 말할 때 늘 어두에 ‘코로나가 끝나면’을 붙였다. 나는 딸의 간절한 소망들을 휴대폰 메모장에 잘 정리했지만, 기약 없는 기다림이 될 것 같아 측은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도 딸은 밝았다. “아빠, 콧구멍 보인다. 마스크 올려 써야지~” 외출할 때 배시시 웃으며 내 걱정까지 해준다. 나보다 ‘거리두기’도 잘한다. 숫자를 배우는 시기인데, 고사리 같은 손으로 사람 수를 센다. “하나, 둘, 셋, 넷. 이제 아무도 오면 안 돼. 유치원에서 다섯 명이서~ 모이면~ 안 된다고 했어.” 딸의 숫자 세는 모습에 감탄해야 하는지, 코로나 시대의 애처로운 단면에 한탄해야 하는지 나는 그저 실없이 웃기만 했다.
아이랑 볶음밥 먹으며 지낸 1년…아내는 다시 백신팀으로 차출
우리나라에 백신이 들어오기 한 달 전, 보건소 내에서는 백신팀이 뜨거운 감자였다. 백신팀에 인력을 투입하기 시작하면서 코로나 대응에 새로운 국면을 맞은 것이다. 그 백신팀에 아내가 또 차출되었다. 아내는 내 생각보다 더 고수였던 걸까. 무림의 고수가 도장 깨기라도 하듯 코로나 관련 부서를 모두 깨고 다니는 아내의 모습에서 나는 고수의 위세를 느꼈다. 그러나, 현실은 영화가 아니다. 도장 깨기 고수의 눈 밑은 다크서클이, 볼에는 마스크를 많이 한 탓에 뾰루지가 나 있었다. 더 이상 묘사한다는 것은 고수에 대한 예의(?)가 아니어서 못하겠다. 늘 피곤에 절은 모습이었다. 어느 토요일 아침, 나는 잠에서 덜 빠져나온 눈을 하고 거실에 나왔다. 아내는 머리카락도 다 말리지 못한 채 부엌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맨날 애를 볶음밥만 해 먹여? 고기랑 브로콜리 구워놨으니까 같이 먹어. 브로콜리는 저거 다 먹여야 해!”
나는 알았으니 출근하라는 신호로 성의없이 팔을 흔들어댔다. 딸의 유산균이 식탁에 있다며 꼭 챙겨주라는 목소리가 현관문이 닫히면서 작아지자, 그녀의 출근을 다시 실감했다.
그날따라 유난히 맑은 파란 하늘이 거실 창을 통해 들어왔다. 좋은 날씨에 괜히 마음만 심드렁해졌다. 딸과는 인형놀이를 하며 시간을 메꾸고 있었다. 인형도 우리도 맑은 하늘은 그저 병풍에 불과해 보였다.
“띠링~오빠, 나 데리러 올래?”
아내의 문자였다. 웬일인가 싶어 바로 전화를 걸었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억울하단다. 함께 공원이라도 가서 놀자고 했다. 그 말을 전해들은 딸은 애지중지하던 엘사 인형을 바로 던졌다.
딸과 함께 차를 타고 아내가 있는 보건소로 갔다. 아내는 보건소 정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아내가 타자, 바로 내비게이션에 근처 공원을 입력했다.
스트레스 날려줄 최고의 엔도르핀은 자식…아내는 언제쯤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우리는 그저 파란 하늘 아래 푸른 잔디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비록 마스크가 입을 가리고 있었지만 아내와 딸 모두 웃는 모습임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아내는 보건소에서 있었던 일들을 내게 얘기했다. 보건소의 인력난이 심해 보건소 직원들은 아내와 같이 다들 힘든 처지였다. 매일 반복되는 야근에 결혼한 여직원들은 모두 이혼당할 위기라며 웃픈(?)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아내는 “코로나19에서 언제쯤이면 벗어날 수 있을까.”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잘 되겠지, 올해만 넘기면...’ 난 이 말을 속으로 삼켰다. 이미 열 두 번도 더한 말이었고, 말에도 시효가 있다면 이미 지나도 한참 지난 말이었다. 대신 딸이 영재일지 모른다면서 딸의 비상한 행동을 전하며 화제를 돌렸다. 아내는 크게 웃었다. 지극히 평범한 자식의 가끔의 재미난 돌발행동과 말은 언제나 부모들의 최고의 엔도르핀이었다. 이 엔도르핀으로 아내의 스트레스가 그나마 희석되길 바랐다.
해가 질 무렵, 우리는 돗자리를 개며 저녁에 무엇을 먹을지 의논했다. ‘예전 같았으면 외식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서로에게 묻어나왔다. 집에 가기 위해 차에 올라탔다. 아내가 딸의 안전벨트를 여미는 모습이 룸미러에 비치자 나는 시동을 걸었다. 라디오에서 때마침 뉴스가 흘러나왔다.
“우리 정부는 올해까지 국민의 70퍼센트 이상 코로나19 예방 접종을 할 것이라고...”
나와 아내는 조용히 듣기만 했다. 그렇게 코로나 시대의 어느 하루는 저물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