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도록 고생하기, 이제는 러시아에서...
-다이하드: good day to die
존 매클레인 형사(브루스 윌리스)는 크리스마스마다 죽도록 고생했었다. 휴가를 내어 근무지 뉴욕에서 대륙의 반대편 LA에 있는 와이프를 보러가는 것은 만만찮은 일인데, 얼굴을 보기 전에 크리스마스 파티를 망치려고 작정한 악당들을 소탕해야만 했다. 다음 해에는 와이프가 뉴욕으로 오는 걸 마중 나갔다가 공항을 접수한 특수부대원들과 맞장을 떠야 했다. 이후에는 LA에서 죽은 동생의 복수를 한다며 뉴욕 시내를 설치고 다니는 꼴통 형의 경거망동을 수습하고, 국가의 모든 네트워크를 장악한 악당을 응징하기 위해 총 한 자루를 든 채 아날로그 액션을 벌여야 했다.
부인과의 상봉을 할 때마다 어깃장을 놓는 나쁜 무리들을 처단했지만, 부인과의 서먹한 관계는 좋아지지 않고, 자식들이 커가면서는 아버지를 영웅이 아닌 꼰대로 보기 시작했다. 딸은 아버지가 마초라고 깔보다 부친인 형사와 동행한 머리 좋은 프로그래머를 사귀면서 관계가 좋아진 반면 몇 년 동안 얼굴 보지 못한 아들 녀석은 갑자기 러시아의 감옥에 갇혀있다는 소식만 전해주었다.
존 매클래인 형사의 죽도록 고생하는 모험을 그린 ‘다이하드’ 시리즈의 5번째 이야기는 아들 때문에 골머리를 썩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스파이의 본분대로 아무도 몰랐던 정예 요원인 아들 잭(제이 코트니)는 러시아 정부의 극우세력이 집권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국방장관 후보자의 비리를 알고 있는 체르노빌 출신의 핵 기술자의 비밀 장부를 입수하기 위해 3년째 공들여왔다. 잭 매클레인 요원이 코마로프(세바스티안 코치)를 빼돌려 미국으로 탈출하기 직전 그의 목숨을 노리던 마피아의 습격을 받고 재판 방청을 왔던 존 매클레인 형사가 이를 목격하고 아들과 함께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이 영화의 줄거리이다.
이번 영화는 이 시리즈의 다른 작품과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다. 미국에서 발생한 사건을 해결하기 바쁘던 뉴욕 경찰이 러시아에서 마피아와 맞장을 뜨고, 딸과의 화해 이후 평탄하리라던 예상과 달리 아들이 뭐하는 지도 모르는 파탄난 부자 관계를 끌어들였다. 모스크바 시내의 추격전은 ‘007 골든아이’의 탱크 추격전과 ‘본 슈프리머시’의 자동차 추격전을 뒤섞어 벤츠의 SUV와 러시아 군의 장갑차의 대결로 변주 시켰다. 가족의 여자 구성원과의 화해는 마초의 액션으로 해결했지만, 첨단 무기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신세대 첩보원인 아들은 아날로그적인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세대간 불화를 보여주는데, 이 영화는 이것을 양념으로 활용한다.
한편으로, 단선적인 이야기를 보여주던 이전 작품과는 달리 이번 작품은 최근 영화의 유행인 반전을 활용한다. CIA가 빼돌리려던 정치범이 알고 보니 몇 년간 치밀하게 탈옥을 준비하던 악당이라던가, 영화 초반 본드걸처럼 등장한 인물이 알고 보니 이 악당의 계획을 실행하는 가장 중요한 악역이며, 군부를 장악한 극우 정치인이 허망하게 사라지는 모습을 통해, 감독은 관객을 홀리기 위해 영화의 흐름을 뒤섞어 버린다.
그러나, 가장 큰 아쉬움은 웃음 코드의 실종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작들을 통해 맨몸으로 뒹굴면서도 넋두리를 내뱉고 악당들보다 저질인 체력으로 고생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우연이 만난 보통사람들의 힘을 빌리면서도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던 동네 경찰관의 이미지가 이 작품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물론 여기에는 유일한 대화 상대인 아들이 자기를 무시하고 말이 통하지 않는 러시아에서 유일하게 대화한 사람이 영화 초반 잠깐 등장한 영어를 조금 말하던 택시 기사뿐이라는 설정상의 한계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결국, 액션과 스케일을 키우면서 늙은 육체를 이겨나가는 영웅을 만든 의도는 성공했지만 이 시리즈의 특징인 잔재미를 희생시켜 조금 밋밋한 작품이 되고 말았다.